<바벨론 강가에 앉아>에 대하여 <시편137편>
최의상
이 시는 BC587년 유다왕국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가면서 무명의 유대인이 쓴 시입니다.
바벨론의 사람들은 유다의 포로를 붙잡아 바벨론의 강변에 두었습니다. 유다의 포로들은 바벨론의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시온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성전이 있을 때에는 성전이 얼마나 복인가를 몰랐습니다. 성전을 잃고 이방인의 땅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 성전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라 잃고 떠다니며 울던 사람들이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고 6일 전쟁에서 이집트(애급)와 싸워 승리를 하고 세계의 반열에 등장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은 국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오늘날에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라를 사랑합시다,“하면 꼰대 같은 소리 한다고 웃어댑니다. 나도 6,25남침시 피난생활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하고 집을 잃고 심지어는 걸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피난민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 유다(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빌론강가에서 통곡하며 예루살렘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으나 이미 예루살렘성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생활을 하며 2000년을 울며 떠돌아다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국가를 위하여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돈과 이기주의로 흘러 나라가 공산화가 되건, 민주화가 되건 상관 없이 제 멋대로 나대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꼴을 보면 저 바빌론 강가에서 슬피울던 유다인들이 생각나서 여기에 이 노래를 올립니다. <최의상>
<바벨론 강가에 앉아>시편137편
시인/포로중 한 사람의 유대인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더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페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해설:
이 시편은 ‘보니 엠'(Bonny M)의 ‘바벨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라는 노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개인적인 고난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심정을 노래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1절)습니다.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과 성전을 두고 울며 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다”(2절)는 말은 더 이상 찬송을 부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사로잡아 온 자들” 즉 그들을 “짓밟아 끌고 온 자들”(3절)은 “시온의 노래”를 불러 자신들의 흥을 돋구어 달라고 명령합니다.
“시온의 노래”는 시편 46편 혹은 47편 같이 하나님의 성전을 찬양하는 노래를 말합니다. 그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한 이유는 멸망 당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두고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4절). 시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내 깨나 시온만을 생각하며 눈물 흘려 기도합니다(5-6절). 다만, 그들을 짓밟아 끌고 온 자들 앞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 거리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바빌론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 되던 날에 그들이 했던 악한 말과 행동을 기억하면서 그들도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7-9절).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9절)라는 저주는 악담이 아니라 바벨론 침략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악한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고발하는 말입니다. 그 악한 행위를 기억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묵상: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마음 아픈 일은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 당하는 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의 불행을 두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혹은 “하나님을 믿더니 꼴 좀 보라?”고 빈정거릴 때, 우리는 참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낍니다. 내가 모욕 당하는 것은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존귀하신 하나님이 모욕 당하는 것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의 징계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일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불행에 대해서는 “다들 당하는 일인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탓입니다”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도 이상의 불행을 당하거나 당하는 불행이 오래도록 지속될 때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그분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토록 나를 못살게 굽니까?“라고 저항하게 됩니다. 그런 의문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식어지고, 냉담함이 계속되면 결국 믿음을 떠나게 됩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73:17) 그 의문과 불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뜬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의문 투성이입니다. 성소에 들어가 눈을 감고 세상을 바라보면 그 의문이 하나씩 종적을 감춥니다. 현실의 문제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고 그분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강 ***
현대의 지리로는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의 엘힐라 부근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두 강이 가까워지는 곳에 위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