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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바이칼.호수가 얼어붙으면 그 위로 도로와 철로가 놓인다. |
가는 곳이 곧 길
바이칼로 가는 길은 보통 세 코스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다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이 있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역시 비행기나 열차로 갈아 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노보시비르스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방법이다.
한때 동대문이나 남대문을 들락거리는 보따리장수들 때문에 생긴 전세기가 직접 서울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데려다 주었던 적이 있었다.
한번은 운 좋게 그 편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비행기가 뜨네 못뜨네 요란을 떨기 일쑤였고 탑승했다가도 늦은 저녁까지 이륙하지 못해 평창동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떠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돌아올 때도 현지에서 너댓시간씩 기다리게 만들어 러시아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아름답지 못한 문신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국적의 한 항공사가 문제였다. 이번 코스는 이미 한번 밟은 적이 있는 울란바토르를 경유해 가는 노선이었다. 2001년 6월14일 새벽 5시30분에 인천공항에 집결한 우리는 점심 무렵까지 항공사 직원들과 집요한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처음에는 2시간 연발을, 나중에는 현지 기상악화를 이유로 다음날 오전 7시30분에 뜬다는 통보였다. 당시 그 항공사는 파업중이어서 결항이 잦았는데 그들은 일반인이 확인하기 힘든 현지 공항의 일기 악화를 핑계로 승객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다음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몽골 대사관 영사와 통화해 현지 기상자료를 건네받기로 했다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끝에야 겨우 이륙할 수 있었다. 현지 자료를 받아보니 전날 결항한 노선은 이 항공사뿐이었다. 몽골에서 바람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그것을 구실삼는 데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항공사의 횡포로 인해 일행은 출발부터 지쳐 있었다. 하지만 네시간의 비행 끝에 문득 맞닥뜨린 몽골의 초원은 언제 보아도 나그네의 주럽을 싹 가시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초록 초원은 바다였고 비행기는 그 위를 떠가는 배였다. 드넓은 초원에 구름 그림자가 얼룩진다. 눈이 새뜻해지고 의식이 환기된다. 이곳은 초원의 나라, 바람의 고향인 것이다. 귓가를 때리는 말발굽 소리도 전혀 환청이 아니다.
언젠가 울란바토르에서 고비 사막으로 날아간 적이 있었다. 쌍발 여객기가 사막에 랜딩하는데 활주로가 따로 없었다. 착륙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을 만큼 심하게 흔들렸지만 눈을 떠보니 세상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도 길이 아닌 곳으로 얼추 방향만 잡고 마구 달렸다. 섬광처럼 스치는 착상이 있었다.
‘청년아, 네가 가면 그곳이 곧 길이다!’
오지여행이 선사한 아포리즘이었고, 드넓은 사막 혹은 초원에서나 가능한 명제지만 이후내 뜨거운 피는 언제 어디서든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맥박을 다듬질했다. 산다는 것이 저마다의 길 찾기이니 길이 어디 공간에만 있던가.북방에서 승마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전혀 어렵지 않다. 몽골의 유명한 휴양지 테렐지나 만주벌판,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도 신나게 말을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허벅지가 헐거나 떨어지기도 하고 뒷발질에 채일 위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실제로 윤박사는 말에 채여 정강이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탐험가로 유명한 그는 말을 타고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베테랑이지만 말에서 내려 무심코 곁에 서 있다 채이는 바람에 여행 내내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깁스를 해야 했지만 앞으로도 결코 말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단다. 그만큼 말타기는 신나는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초보자라도 곧잘 말을 달린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부러운 듯 쳐다보기만 하는 유럽인들이나 일본인들과는 확실히 그 기질이 다르다. 우리가 진취적인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나는 한국인의 맥박 속에는 말발굽 소리가 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니 어찌 놀라운 발견이 아니겠는가. 국내에서도 승마공원이 여럿 생겨 얼마든지 말을 탈 수 있다지만 역시 대초원을 달려야 제 맛이다.
“추, 추!”
박차를 가하면서 내지르는 몽골말이다. 일찍이 이처럼 속도감 넘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추, 추!’ 소리에는 바람을 가르는 비장함과 오금에 힘이 뻗치는 긴장감이 스며 있다. 이 단음절 속에 강인한 기마민족의 얼이 온축돼 있는 것이다. 세계를 정복한 공포의 기마병단을 떠올려 보라. 아직도 유럽인들은 그 시절을 악몽으로 여기고, 찬란했던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해진 오늘의 몽골인에게는 내심 긍지로 자리해 있다. 몸은 비록 남루해도 자부심을 새기고 사는 그들이 은근히 부러웠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의 유산에 기인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지만 아직도 역사적, 정신적 열패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 바이칼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은 우리 땅에서 열차를 타고 북한을 경유하여 백두산 천지에 올라보고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본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바꿔 타는 코스일 것이다.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를 누벼보는 것인데, 이 길은 일찍이 우리네 선각자들이 달렸던 길이고 무엇보다 경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열차를 ‘철마’로 부르기도 하지 않던가. 말을 타고 다녀야 대륙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직 이 길은 기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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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성낭당과 너무 똑같은 몽공의 오브. |
북방종족의 성소, 하늘연못
그러니 현재로서는 몽골 코스가 최상인 듯싶다. 테렐지나 고비 사막, 혹은 몽골인들의 정기가 나온다는 흡수골(000) 호수를 거쳐 바이칼로 가는 것이다. 특히 흡수골은 몽골인들이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제사지내는 성스러운 호수다. 바이칼 바로 남서쪽에 자리하는데 그 또한 달라이 에치, 곧 어머니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거대한 호수다. 수정처럼 맑은 이 호수를 몽골인들은 바이칼에 전혀 손색없다고 자랑한다. 나라마다 성스러운 호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북방종족들의 특징이다. 티베트인들에게는 마팜융초가 있고 만주족에게는 징보후(鏡泊湖)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백두산 천지가 있다. 하늘을 모시고 살며 제사하는 풍습이 있는 북방종족들에게 높은 지대의 호수는 천신이 강림하는 성소다.
2001년 6월16일 오전 8시45분, 막 이륙한 울란바토르발 이르쿠츠크행 소형 미아트 여객기 안에서 5년 전의 바이칼 여행을 회상했다. 1996년 8월7일 오후 9시. 나는 그때 막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행이라고는 전직교수 이동한 형과 나, 이렇게 달랑 둘이었는데 둘 다 초행이었고 확보된 정보도 거의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날 오후 10시 울란우데에, 그 다음날 오전 9시에는 이르쿠츠크 역에 닿을 것이었다. 몽골쪽 여행사와 러시아쪽 여행사의 업무 연결은 매끄럽지 못해 예약 확인조차 안되는 상태에서 떠나 몹시 불안했다. 일면식도 없는 한인 체류자들의 연락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한가닥 위안이었다.
차창 밖에는 비가 내렸다. 또 무모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일제때 여러 해 동안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했던 아버지는 불량한 떼놈, 호떼놈, 붉은 이리떼들이라는 원색적인 용어를 동원해 가며 나의 거듭된 오랑캐(?) 땅 여행을 경계했다. 옛 시절의 일이라며 적이 안심시켜 드리고 떠나왔지만 강도나 비행기 추락 따위의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열차강도가 있다는 풍문도 들었겠다, 일몰 속에서 미지의 시베리아로 북행하는 침대차에 누운 심사는 고달펐다. 눅눅한 실내 공기도 우울함을 더했다.
4인용 ‘쿠페’ 침대칸에는 몽골인 보따리장수 부부가 합석했다. 그들은 침대칸이 미어터지도록 짐을 바리바리 싸서 쟁였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던지 불안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러시아 뚱보 여차장의 고압적이고도 세세한 검표가 끝나자 그들은 비로소 자기네와 닮은꼴의 외국인인 우리 쪽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곧 친숙한 표정으로 접근해온 여자는 그물코에 붙이는 납덩이보다 별반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조잡한 진주 목걸이를 한 타래 꺼내 보이면서 사라고 권했다.
자연산이라고 하는데 동그란 구슬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도 질세라 투박한 가죽잠바를 꺼내 들고 진짜 소가죽이라고 초를 쳤다. 모두 사실일 것이었다. 다만 취향이 아니었기에 기분 나쁘지 않게 사양하고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고비사막에서 묻어온 피로의 여파로 잠이 몰려왔다. 곧 알타이 유물인 ‘얼음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깃배가 들어오면 포구에 파시가 서듯, 시베리아의 역에서는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시장이 선다. 열차가 20∼30분씩 정차하므로 시간은 충분하고 팔 것도 살 것도 많다. 산딸기와 찐 감자, 피로조크(고로케), 맥주와 보드카…. 울란우데 등 바이칼에서 가까운 역에서는 오믈 훈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오믈은 바이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버린 청어 비슷한 생선인데 비린내도 나지 않고 맛도 좋아 보드카와 곁들이면 그만이다. 내리기 귀찮으면 창문을 통해 물건을 살 수 있고 그마저 귀찮으면 열차에서 상시 공급되는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끓여 먹어도 된다. 식당칸을 찾아 러시아 음식을 체험할 수도 있다. 검은 빵과 생수, 샤실릭이라는 꼬치구이, 샬란카라는 돈가스 비슷한 요리와 닭고기 요리도 있는데 값은 생각보다 비쌌다.
잠자는 땅, 혹한의 거친 대지를 깨우며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은 체험일 것이다. 객차는 2인용 ‘룩스’, 4인용 ‘쿠페’, 6인용 ‘프라취’ 이렇게 세가지가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6박7일에 주파한다고 한다. 그 사이 60개의 역을 지난다.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리며 맞는 일출과 일몰은 사이버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베리아는 으레 동토(凍土) 혹은 검은 땅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빛의 대지이고 숲의 바다다. 겨울이라고 해서 살벌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눈 덮인 설원에 비치는 햇살은 오로라를 방불케 한다.
비록 겨울이라 해도 숲이 있는 대지는 따뜻해 보인다. 본래 우리는 숲의 인간이었고 우주목(宇宙木)이 즐비한 시베리아 타이가(아한대 침엽수림이 주종을 이루는 삼림지대)는 제신들이 축복을 내리는 성지였다. 언덕이건 호수건 숲이건 바라보이는 그 무엇을 들추어도 요술처럼 북국의 신화가 풀어헤쳐질 것만 같다. 특히 샤먼들이 우주목으로 즐겨 쓰는 자작나무 숲은 신화 그 자체다. 섬세하고 우아한 가지와 파란 이파리를 달고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자태는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순수하다. 게다가 은빛이 감도는 그 순백의 껍질에 이르러서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자작나무는 빛의 나무다. 만지면 백색 가루가 묻어나는 둥치에 햇살이 비치면 나무는 날개를 퍼덕이며 둥둥 떠오른다. 시베리아 샤먼의 엑스타시는 이 나무의 상승작용에 편승한 현상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꿈길이며 시적인 길이지만 다른 얼굴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저렴한 공간이동을 위해 열차에 탔다면 그 순간 열차는 철창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수많은 유형수들을 시베리아 강제노역장으로 이송하는 데 쓰인 교통수단이 바로 이 철도라는 것, 그래서 지옥행처럼 지겹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역사는 1891년 3월17일,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가 칙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급속히 늘어 1인당 경작지가 줄어만 갔고, 이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할 탈출구가 필요했다. 당시의 활발했던 공업화 추세도 농촌의 유휴노동력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인구분산 효과도 얻고 공업화에 따른 철과 석탄 그리고 목재 등의 풍부한 자원도 공급받을 수 있는 시베리아 개발은 좋은 탈출구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의 생명선이 시베리아 철도였다.
모스크바에서 우랄산맥까지는 이미 1880년대에 건설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16년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첫 기차가 이르쿠츠크를 지나간 것은 1898년의 일로, 이때 이르쿠츠크의 온 시민이 꽃을 들고 나가 기차를 맞았다고 한다. 이르쿠츠크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의 중간지점으로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 쪽으로 한시간 반 거리에는 ‘팔로비나’라는 간이역이 있다. 말 그대로 정확히 시베리아 철도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세운 역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무리 낭만의 상징이라 해도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한다. 세면도구나 부식거리, 캠핑용 스테인리스 컵 등을 준비하면 약간의 불편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차창 밖 풍경을 완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마다 반복되는 오랜 정차와 그때마다 잠기는 화장실 등을 겪다 보면 새뜻하게 다가온 자작나무나 적송 등으로 이루어진 타이가 풍광 바라기도 어느덧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울란우데 근처에서는 바이칼을 보려는 의욕으로 다시 눈이 크게 떠졌지만, 오랜 열차여행은 확실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면 유서 깊은 역에서 내려 주변을 며칠씩 둘러보고 가는 것도 좋다.
무너져내린 불칸동굴의 전설
소설가 김종록의 한민족 원류 탐험기 바이칼에 서다 ②
저간의 5년여 동안 나는 소설을 내놓지 않았다. 아니, 예전에 출간한 소설도 시나브로 잊혀지게끔 내버려두었다. 재출판하자는 출판사도 많았지만 노루 때려잡은 몽둥이 10년 우려먹는 것 같아 사양했다.
뜻은 애초부터 다른 데 있었다. 얼마쯤 여비를 벌었으니 산문(山門)을 나와 문학을 시작하면서부터 품었던 초발심으로 돌아가 필생의 작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땅과 역사와 조상과 내 영혼의 4중주를 풀어낼 수 있는 광활한 무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 땅을 무른 메주 밟듯 돌아본 뒤 곧바로 한민족의 원류를 찾아 북방역정(北方歷程)을 감행한 이유다.
그 대장정이 거의 끝나간다. 그동안 만주벌판을 넘어 싱안령(興安領)과 위대한 바이칼을 보았다. 1996년 8월 바이칼을 처음 찾은 이래 지난 3월까지 네번을 다녀왔다. 이제 이 역정에 살을 붙여 글로 빚어내는 인고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이 글은 그 서문과도 같은 보고서로, 역정의 순서에 개의치 않고 테마별로 느낌을 정리한 것이다.
바이칼 호수는 살아 숨쉬는 신화다. 찾을 때마다 그 비밀스러운 생명력 앞에서 외경을 느낀다. 몽골리안의 본향(本鄕)인 그곳에서 영혼을 씻으면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때 머리 바로 위에서는 북두칠성이 거대한 국자를 기울여 빛의 세례를 내려주었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다. 숲은 길 하나만 열어주고 있어서 가르마 같은 그 오르막길을 달릴 때면 먼 하늘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숲은 많은 오솔길들을 숨겨두고 있다. 그 숲길을 더듬어 여러 차례 숲으로 들어갔다. 원시성을 지닌 자연은 신선하면서도 신비로워 처녀라는 말을 붙여야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처녀림! 얼마나 가슴 뛰는 조합어인가. 처녀의 몸을 헤치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환희에 젖는다.
그 속에 하얗게 빛나는 둥치와 황금빛 이파리를 나풀거리는 자작나무가 있다. 만지면 희디흰 가루가 묻어나는 둥치들은 눈을 아리게 할 만큼 강렬한 반사광을 뿜어낸다. 우리가 백양나무 혹은 백화수라고 부르는 나무다. 몽골인들은 ‘호스못’, 러시아인들은 ‘비로자’라고 부른다. 특히 시베리아의 자작나무는 샤먼이 영계를 오르내리는 신성한 매개체, 곧 우주목(宇宙木)이다. 자작나무로 인해 시베리아 타이가 숲은 비로소 영성(靈性)을 띠는 것이다.
코리족은 자작나무를 경외스러운 마음으로 대한다. 그들은 이 나무를 ‘에크헤 모돈’, 곧 어머니 나무라고 부른다. 자작나무가 없으면 샤먼의 신성한 정화 의식은 불가능하다. 코리족뿐 아니라 이곳 타이가 숲 속에 사는 모든 종족은 나무를 귀중하게 여긴다. 우리와 사촌쯤 되는 시베리아 원주민 부리야트인들은 함부로 나무를 자르면 목숨이 짧아진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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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타이가 숲의 자작나무. 시베리아 자작나무는 샤먼이 靈界를 오르내리는 宇宙木이다. |
숲속의 목수시인 미샤
처음 바이칼을 찾았을 때 숲의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일행은 몇 되지 않았다. 뒷자리에 앉은 금발의 러시아인이 말을 붙여왔다.
“어디에서 왔는가?”
안경을 낀 후덕한 인상의 사내였다.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길렀는데도 깔끔하고 멋진 외모였다. 가이드도 나도 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의 본능이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은 한참 마주보며 뜸을 들인 다음에야 꺼낼 수 있었다.
“한국은 따뜻하고 좋은 나라다.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그곳을 꿈꾼다. 남으로 가는 철새들처럼 그곳을 여행해 보고 싶다.”
생전 처음 보는 중년 사내가 건네는 말치고는 아주 감상적이었다. 눈빛만으로도 별종은 별종을 알아본다. 내가 작가라고 하자, 그는 시를 쓰는 전직 목수라고 했다. 목수와 시인처럼 잘 어울리는 직업도 없을 듯싶었다. 가이드는 대낮부터 술에 취한 그를 경계했지만 나는 왠지 친근함이 느껴졌다.
“바이칼에는 왜 가려고 하는가?”
“내 지친 청춘의 영혼을 씻으러 갑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썩 괜찮은 대답이었다. 실제로 나는 바이칼에 뛰어들 참이었다. 오래도록 내 청춘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그 사품에 메마르고 각박해져 있었다. 옹달샘 같았던 내 영혼은 이글거리는 불꽃이 되어 무엇이든 집어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정작 이뤄지는 것은 없었고,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 세월만 흘렀다. 사랑에 고무되고 지식에 인도받으며 영적으로 진화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사랑에 상처받고 혼란스러운 지식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댔으며 영적 진화는커녕 자본주의가 허락하는 풍요로움을 잡으려고 안달했다.
“바이칼에서는 능히 그럴 수 있으리라. 아내의 생일이어서 조촐한 파티를 할 생각인데 내 오두막에 함께 가겠는가? ”
뜻밖의 초대에 우리는 다시 한번 당혹했다.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가이드를 돌아보니 가이드는 이런 식의 즉흥적인 어울림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오두막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물어주세요.”
그리 멀지 않다는 회답이 전해졌다.
“가 봅시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도중에서 내렸다. 도로를 건너니 오솔길이 울창한 자작나무 숲 속으로 풀려 있었다. 오솔길 초입에 ‘자라아’가 드리워져 있다. 나뭇가지에 헝겊조각을 주렁주렁 매단 주술적 장식물이다. 우리의 서낭당에 해당한다. 브리야트족의 기원 풍습이다.
“어떤가? 이곳은 프리바이칼스카야 바자다. 한때는 휴양지였지만 이제는 옛일이 돼버렸다. 저 방갈로들은 내가 한창 인기 있는 목수였을 때 지은 것들이다.”
그 시절에는 경기가 좋았고 자신의 인생에도 서광이 비쳤다고 했다. 그 무렵 그는 20년 연하의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류부쉬카 페트로바라는 처녀였다. 물론 당시 그는 이르쿠츠크에 가정이 있는 마흔살의 유부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아들까지 두었다. 벌이가 좋았던 시절이어서 두 가족들을 부족함 없이 돌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힘은 잔인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나라살림은 엉망이 되었고 내 삶도 망가져갔다. 이 쇠락한 숲속에 류부쉬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도시로 떠난 이후 보드카를 입에서 뗄 수 없었다. 그래도 달랠 수 없는 아픔을 이기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도시에 사는 가족들은 그런대로 살아가지만 이 숲속의 가족들은 남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게는 이들을 도울 능력이 없다. 오늘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인데 이 잘난 샴페인 한병과 토마토 몇개를 선물이라고 들고 왔다. 가슴이 미어진다.”
언제부터인지 여우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미하일 마르겔라프. 그의 이름이었다. 애칭은 미샤라고 했다. 나는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 이처럼 애잔한 삶의 이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이 무척 좋아할 것이다. 멀리 남쪽 나라에서 귀인이 찾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생일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미샤는 커다란 소나무가 비켜선 자리에 터잡은 통나무집 앞에서 멈췄다. 그는 아이와 아내를 불렀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긴 문틈에 메모지가 끼여 있었다. 그가 가이드에게 그 쪽지를 펼쳐 보였다.
‘산딸기와 버섯을 따러 갑니다. 오래지 않아 돌아올 테니 기다리세요.’
미샤는 젊은 아내가 남긴 메모를 소중한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는 온기도 없었고 살림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엌에 물에 담가 놓은 버섯이 한 바가지 있었을 뿐, 식탁과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미샤는 애써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비치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내 코허리도 시큰거렸다. “집에는 빵 한조각 없다. 젊은 여자와 한창 자라는 아이가 버섯만 먹고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내가 이런 삶을 산다.”
급기야 미샤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달렸다.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더운 물을 끓여 내왔다. 식탁 위의 자스민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어깨에 걸친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림해 보았다. 먹다 남은 초콜릿이 전부였다. 초콜릿을 전부 꺼내 그의 아내와 아들 몫을 덜어놓고 그에게도 한개를 권했다. 그는 초콜릿을 받아들고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묘한 분위기를 지닌 얼굴이었다. 슬픔을 얼마나 달게 견뎌내면 저런 얼굴이 될까 싶었다. 문득 그가 말을 던졌다.
“당신은 에고가 너무 강하다. 꽉 죈 집념의 줄을 느슨하게 풀어라. 인생은 물과 같다. 흘러가는 물결에 맡기고 음미하라. 바이칼로부터 그것을 배워라. 시대를 원망하거나 땅을 차거나 하늘을 두들겨 패려 들지 마라. 삶을 꾸밈없이 즐기고 그것을 노래하라.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대가 원했던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하기 위한 삶을 살지 말고 하다 보니 저절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라.”
딴은 명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심사가 뒤틀렸다.
“미샤, 당신 때문에 나는 우울해져버렸소. 남의 에고를 두고 콩팔칠팔 떠들지 말고 숲으로 간 모자 걱정이나 하시오. 비를 맞고 버섯을 따올 그들이 돌아와 먹을 음식이 아무 것도 없지 않소?”
나는 그때 서른네살의 한창 때였고 그만큼 더 기질이 성하던 시절이었다. 하고픈 말을 속내에 담아두는 성정이 아니었다. 제 코가 석자면서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파고드는 것도 가당찮았고, 그 형편에 그처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다.
“어서 가서 바이칼을 보라. 그러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웅숭깊게 내 손을 그러쥐며 말했다.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빛은 여전히 내 심연을 꿰뚫어 왔지만 손으로 전달되는 체온은 포근했다. 그 순간 미샤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화이트골드 반지를 발견하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뭔가. 별자리인가?”
반지에는 삼태성과 북두칠성이 박혀 있었다. 운석과 사파이어로 새긴 성좌였다.
“…별을 좋아하는 영혼은 다른 이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구원받는다. 나도 별을 좋아한다. 내 별자리는 알골(영웅 페르세우스가 왼손에 거머쥐고 있는 악마, 곧 메두사의 잘린 머리)이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이 든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면 나는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것을 느낀다. 그 끝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두렵다. 산다는 것은 두려움을 연장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뒷골이 띵했다. 범상한 넋두리는 아니었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으스스한 한기를 느낀 것은 결코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 가십시다.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어요.”
나는 가이드를 재촉해 서둘러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미샤는 내 속내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눈빛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비는 그쳐가고 있었다. 물안개 속의 자작나무 숲은 귀기마저 품고 있었다. 흰 둥치가 흡사 소복 같았다. 비 끝에 공중을 더듬는 바람소리는 원한 많은 여인의 호곡소리 같았다.
그 사건이 있고 벌써 7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나는 여전히 삶의 고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금도 시베리아 타이가 숲을 떠올릴 때면 목수 시인 미샤의 깊은 눈이 내 심연을 응시하는 것 같다.
始源의 흔적들 그리고 그리움 1만3천년前
한민족의 발자국을 찾아서…
소설가 김종록의 한민족 원류 탐험기 바이칼에 서다③
금으로 만든 연결쇠.’ 바이칼 호수 남서쪽에 놓인 환(環)바이칼 철도다. 슬루잔카에서 바이칼 항에 이르는 관광철도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철도를 달려 보기로 했다. 오전 9시30분 이르쿠츠크 역에서 슬루잔카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순전히 환바이칼 열차를 타보기 위해 마련한 여정이었다.
인구 2만명의 슬루잔카는 바이칼 남서쪽 끝자락에 낮게 엎드린 조용한 마을이다. 오후 1시에 도착해 열차 시간을 알아보니 오후 2시20분에 떠난다고 한다. 철길을 가로질러 레스토랑을 찾았으나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외식문화가 거의 없는 러시아에서 대도시를 벗어난 여행자가 겪는 불편사항이 바로 먹는 문제다. 안내를 맡은 정정길 사장은 이에 대비해 김밥과 과일을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쓴 그의 아내 한민숙 여사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고마운 사람들 신세만 지고 사는 것 같다.
10여분을 거슬러 올라가서야 가까스로 레스토랑을 찾았다. 썰렁한 홀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국물을 시켜 김밥을 먹기가 바쁘게 역으로 뛰었다. 2량짜리 열차는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해바라기씨 한줌을 사 들고 기관차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열차는 종점인 바이칼 항까지 약 100km 구간을 시속 30km로 4시간 동안 달린다. 달린다기보다 천천히 미끄러져 간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수승(殊勝)한 풍광을 뽐내는 바이칼 호수를 천천히 감상하라는 배려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울창한 타이가 숲이다. 열차는 유유히 설원을 미끄러져 간다. 이 여정의 새로운 동행은 한국토종약초연구회 최진규 회장이다. 그는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데 사진기술도 일품이었다. 20kg이나 되는 카메라 장비를 메고 온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카메라에 숲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산이 좋아, 나무와 약초가 좋아 반평생을 산에 바쳐온 그는 숲만 보면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인기리에 진행되던 방송 일을 놓자마자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겨울 시베리아를 찾아왔다.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열차의 왼쪽은 가파른 절벽이고 오른쪽은 바이칼 호수다. 차창을 열고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거리에 호수가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는 간밤에 내린 눈을 솜이불 삼아 덮고 한낮의 햇살을 받아낸다. 얼음구멍을 내고 낚시를 드리운 이들이나 스키를 타는 이들 모두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번 겨울은 70년만에 맞는 따뜻한 겨울이라고 했다. 리스트비얀카에서는 예년보다 한달이나 앞당겨 얼음이 녹아 호수를 가로지르던 차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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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바이칼 열차를 타기 직전 일행과 함께. |
이런저런 뉴스를 전하는 브리야트인 여승무원 발렌치나의 얼굴이 반갑다. 브리야트인은 언제 봐도 우리 사촌이다. 풍광 좋은 곳에서 열차를 잠시 멈춰줄 수 없겠는가 하고 물었다. 발렌치나는 환하게 웃으며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사장의 말로는 얼마간의 인사를 해야 할 것이란다. 담배 한갑 정도면 충분하다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열차가 아니다. 쉬엄쉬엄 가다 아무데나 설 수 있는 환바이칼 나그네다. 초고속을 다투는 시대에 이런 느림의 미학과 만나다니. 반시대적 역행은 이렇듯 참신하다.
대학 1학년 시절 5월이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그 무렵 내 청춘은 미친 듯 방황하고 있었다.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것이 성행해 술좌석에서 말만 잘못 꺼내도 붙잡혀 가던 때, 교내에서 몇몇 운동권 학생이 고독한 시위를 벌이다 딱정벌레를 닮은 진압대에 에워싸여 닭장차에 실려 가는 사건을 만났다.
당시까지도 나는 절집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억지로 떠밀려온 대학생활을 하느라 전전긍긍했고 오직 밤을 새워 원고지 채우는 일에 희망을 걸던 때였다. 마구잡이식 독서와 막연한 감상에 빠져 지내던 나는 현실을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는 좋은 글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밤 남으로 가는 완행열차를 탔다. 가방 속에는 마르쿠제와 칼 포퍼의 논쟁이 담긴 ‘혁명이냐 개혁이냐’라는 제목의 사회과학 서적이 들어 있었다. 완행열차 안에서 먹고 자며 전국을 일주해 볼 참이었다.
화순에서 부산 가는 비둘기호를 탔을 때였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날의 열차도 이 환 바이칼 열차 못지않게 느렸던 것 같다. 왼편 창가에 앉았는데 제법 넓은 들판을 낀 산자락 마을길을 달려오는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머리에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인 채 손을 휘젓는 꼴이 열차를 세우려는 듯했다. 역도 아닌데 열차가 설 리 없었다. 구부정한 노파의 달음박질은 필사적이었지만 열차는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노파가 인 보따리에는 필시 장에 내다팔 나물 따위가 들어 있을 거였다.
눈을 감아야 했다. 징징거리는 삶의 단면을 애써 외면하려는 심사였다. 그때였다.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차가 멈추기 시작한 것은…. 열차는 얼마간 더 기다려 노파를 태운 다음 다시 시치미를 떼고 미끄러졌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기관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도의 목가적인 산하와 왁자지껄한 완행열차 안 풍경이 한없이 따뜻하고 정겨웠다.
1주일 가량의 열차여행후 나는 어떤 형태로든 동시대의 아픔에 동참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자퇴후 입산수도하려던 뜻을 접고 대학신문사 기자가 됐다. 덕분에 뜨겁고 예리하게 대학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역사의 부채감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졸업후 뒤늦게 맞은 군시절에는 수인선 협궤열차를 즐겨 타곤 했다. 경기도 안산과 인천 사이에 있던 해안부대 인사과에서 복무한 덕분에 틈만 나면 수원으로 가서 덜컹거리는 열차에 올라 송도까지 갔다 오곤 했다. 협궤열차는 언젠가 소에 받쳐 넘어지기도 했다는 풍문을 싣고 추억 속으로 미끄러져 가곤 했다. 갯벌과 갈대와 염전과 새떼의 비상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선배 문인 윤후명 선생은 그 협궤열차에 관한 보고서를 문단에 제출하기도 했다. 개발은 눈부셨고 수인선 협궤열차는 아련한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 무렵 안산의 예술인아파트 앞 포장마차에서 듣던 선생의 탄트라 비전 시리즈도 무대를 옮겨 서울 종로 청진동 골목을 감치고 있다.
바이칼 순환열차는 잔인했다. 어쩌자고 아무런 대책 없이 옛 시절 남도의 완행열차와 수인선 협궤열차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야 마는 것이냐. 산촌에도 어촌에도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한국에서 자연의 원형은 깨어졌고 피끓던 20대 청년은 거추없이 내달려 마흔이 되어버렸다. 하건만 오늘 환바이칼 열차는 느닷없이 느리고 고르게 삶을 경영하라고 주문한다. 언제나 수평잡기를 고집하는 지상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을 보면서 천천히 가는 인생을 배우라고 주문한다. 무엇 하나 허투루 놓치지 말고 유심히 보고 가라고 설득한다.
환바이칼 철도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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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자랑에 열심이던 환바이칼 열차 기관사 루시킨 게나지.(왼쪽은 필자) |
열차가 터널을 지난다. 호수를 향해 돌출한 암벽에 40개의 터널을 뚫느라 공사는 어려웠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같은 길이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평균 공사비용의 14배가 들어 ‘황금 연결쇠’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공사는 2년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환바이칼 철도의 터널은 대부분 아주 짧은데 가장 긴 터널은 807m나 된다. 속도가 워낙 느리다 보니 오래도 통과한다. 터널은 어둡다. 그래서 두렵고 곧잘 고통에 비유된다. 정사장이 준비해온 물과 오이를 꺼내 건네준다. 싱싱한 오이를 씹어 삼키면서 건강에 관해 얘기한다. 최회장은 바이칼에 왔으니 물 얘기를 하겠노라며 석간수, 곧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을 마시고 살아야 좋다고 한다. 갇혀 있는 물, 고인 물은 금해야 한단다. 지하 암반을 굴착해 뿜어올린 물은 부자연스럽게 응축해 있던 물이라서 나쁘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물이 뭐가 좋겠느냐고 묻는다. 수긍한다.
‘결국 순환의 문제로군. 자연도 우리 인체도 순환이 원활해야 생기가 넘친다는 말 아닌가?’
환바이칼 열차를 타고 순환론을 말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절묘하게 여겼다.
“모세혈관이 막히면 만병의 근원이 되지. 담백하고 청결하게 먹어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법이오. 자연에 가장 가까운 먹을거리부터 장만하고 볼 일이지. 한국사람들 함부로 너무 많이 먹어 큰일이오.”
최회장은 소박한 양생법을 펼친다. 예방이 우선이며 병을 얻으면 우선 마음부터 고쳐먹고 생활습관을 고치면서 적합한 토종약초를 쓰면 웬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터널을 빠져나온 열차가 한참을 더 달리다 이름모를 역에서 멈춘다. 안내원 발렌치나가 기관실로 가서 풍광을 마음껏 감상하겠느냐고 제안한다. 물론이었다. 우리는 신이 나 객차에서 뛰어내려 기관차로 옮겨 탔다. 두 사람의 기관사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기관차 앞 난간에 섰다. 담비 털모자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았다. 겨울바람이 살갗을 도려낼 듯 달려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연방 함성을 질렀다. 달리는 기관차 앞에 타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누구나 이런 순간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그 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시간쯤 그렇게 달리면서 바이칼 호수를 감상했다. 바람맞은 온몸이 얼얼하게 얼어들 때쯤에야 난간을 돌아 기관실로 들어왔다. 사람 좋은 루시킨 게나지(43)는 6년째 이 열차의 기관사로 일한다고 한다. 슬루잔카에 산다는 그는 바이칼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르샨 온천에도 들러보라고 추천한다. 슬루잔카에서 130km 거리에 있는 아르샨에서 말을 타고 하루 거리의 슈막 온천은 굉장한 영험이 있다고 한다. 말에 실려 간 환자가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곳이라나.
저녁 7시, 바이칼 항에 도착했다.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관차에서 내리니 승객들은 모두 내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뿐이다. 호수의 다른 곳과 달리 항구쪽은 물이 얼지 않는다. 앙가라 강으로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타야 할 배가 이미 떠나고 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열차가 도착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배려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러시아인들은 도무지 ‘연계’라는 것을 모른다. 이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꼬챙이 같이 살아갈까. 잠시 건방진 이방인의 푸념을 쏟아냈다. 당신들은 이 거룩한 호수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빤히 건너다보이는 리스트비얀카로 가기 위해 우리는 1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얼음이 단단하다는 확신만 있었더라도 걸어서 건넜을 터였다. 저녁 8시30분이 돼서야 겨우 배가 움직인다. 지루했지만 창공에 빛나는 별을 보니 금방 마음이 맑아진다. 일기가 청명하여 별 바라기에는 적격이다.
밤 9시 리스트비얀카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하다. 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접안한다. 그 불빛에 드러나보이는 바이칼 호수 바닥의 해맑은 돌멩이들이라니…. 청수(淸秀)한 풍광은 언제나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 맛에 오늘도 고행을 즐기는 것이다.
예약된 통나무집 숙소까지 3km의 밤길을 걸었다. 저녁 10시가 돼서야 자작나무가 타는 벽난로 옆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최회장이 준비해온 비장의 ‘신선주’가 너무 감미롭다. 술 한잔에 피로가 풀리고, 두잔에 이방인의 시름을 잊고, 세잔에 신선이 돼버린다.
다음날 이른 새벽 호수를 거닐며 일출을 맞았다. 털모자를 썼는데도 한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투명한 얼음 위를 거니는 일은 최고의 운동이었다. 순일무잡, 그야말로 무공해 산책이다. 서울 한남대교 근처 한강변을 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가슴이 뻥 뚫린다.
‘시비리스카야 자임카’라는 숲에서 사우나를 했다. 바냐라고 하는 러시아식 사우나는 예전에도 겪어 봤지만 이번에는 얼음을 깬 물구덩이로 뛰어드는 점이 새로웠다. 자작나무 사우나에서 훈증한 다음 말린 자작나무 가지로 온몸을 두들겨 혈액순환을 돕는다. 그리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려 얼음 구덩이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다. 시퍼런 강물이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있어 뛰어들기가 무섭기도 한데, 그때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몸을 담그면 된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쨍한 느낌이 그렇게 시원하고 개운할 수 없다. 무중력 상태가 이렇지 싶다. 바로 이 맛 때문에 마른 사우나를 즐기는 것이다. 겨울이 기나긴 북국의 이색적인 풍속이다. 겨울 시베리아를 여행한다면 반드시 이 맛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북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르쿠츠크에서 4시간을 날아 북위 65도 언저리에 자리잡은 야쿠츠크공화국으로 가는 행로였다. 북극해로 빠져나가는 아름다운 레나강 중류에 위치한 야쿠츠크는 우리에게 아주 낯선 곳이지만 몇몇 지인들을 통해 적잖은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 하나는 이곳에서 광산 혹은 가스전 사업권을 따내느라 몇개월씩 묵은 적이 있었다. 그가 선물한 매머드 상아 조각품은 아주 훌륭한 것들이었고 광석 샘플도 멋졌다. 특히 야쿠츠크 매머드 상아는 중세 이후부터 중국과 유럽으로 수출되던 명물이었다. 금관을 연구하는 김병모 교수나 무속을 연구하는 서정범 교수도 일찍이 이곳을 답사했다. 나는 그들을 통해 사전 지식을 쌓았다. 순록과 매머드와 다이아몬드와 툰드라 등….
김종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