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통해 나를 찾는 길
길었던 산티아고 순례가 끝이 났습니다. 약 40일, 지금까지 갔었던 순례들의 4배에 달하는 시간이었는데요. 그 시간 동안 배운 것 들은 정말 많지만, 사실 대부분의 배움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느끼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순례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들도 있기에 그것을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제일 많이 생각했던 것은 바로 ‘변화’였습니다. ‘산티아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꼭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고, 그렇기에 매년 6만 명이 찾는다는 순례길. 그렇기에 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 뭔가 대단한 변화가 있고 더 뜻깊은 배움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순례가 저의 사상과 가치관을 뚜렷하게 잡아주길 기대했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어린아이이고, 지금부터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자칫하면 꽉 막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그런 생각으로 섣불리 무엇인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세상의 모든 것, 특히 어른들의 말을 다 조심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장함에 따라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생겨버린 가치관은 결국 무엇이든 애매하게 받아들이고 이도 저도 아닌,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전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라 기대하던 산티아고 순례에 가서 최소한 제 가치관의 틀이라도 단단히 잡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가본 산티아고는 생각보다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신기하던 건물 모양도, 드넓은 평야도 며칠 지나니 곧 익숙함으로 다가왔고, 산을 탈 때는 지리산 둘레길의 느낌도 났습니다. 또한, 생활 패턴도 하루하루가 비슷했기 때문에 제가 바랐던 새로움에서 나오는 변화와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나는 왜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힘들게 걷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제가 왜 그 길을 걷고 왔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제가 두 발로 산티아고 길만 걸으려고 그곳에 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례 도중, 변화를 발견하고 가장 산티아고다움을 느꼈을 때는 바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때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오랜 걸음으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늘 환한 웃음을 띠며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모습은 산티아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고 경험하니 어느새 제 마음속에 산티아고는 길이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산티아고를 매해 6만 명이 찾는 특별한 길로 만든 것은 바로 ‘이 길을 거쳐간 수 많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때는 길을 보고 오더라도 떠날 때는 사람을 기억할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만큼 길 위에 사람들 속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내가 남에게 힘이 되고 남이 나에게 힘이 된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남에게 말을 잘 못 거는 성격임에도, 이번에는 많은 외국인들에게 말을 걸고 다녔습니다. 물론 알아먹는 것이 반, 못 알아먹는 것이 반이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때만큼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아닌, 에너지로 대화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좋고 긍정적인 에너지로요. 그리고 말하는 사람들마다 모두 각자의 신념, 또는 인생을 그 에너지에 담고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허투루 한 걸음을 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분은 후안이라는 아르헨티나에서 오신 분입니다. 사실 후안도 영어를 거의 못해서 의사소통은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후안이 제일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의 에너지’ 때문입니다. 후안이 하는 말에는 모두 확신의 에너지가 담겨있었습니다. 그 에너지 때문에 후안이 자신의 인생의 확신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확신을 품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정말 멋져 보였고 그 자세에서 왠지 모를 위안을 얻어서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후안은 말할 때나 들을 때나 항상 상대방의 눈을 또렷히 보고 계셔서 더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이런 좋은 기운과 영향을 받은 후로는 제가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티아고를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취와 그 삶을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도 저도, 저마다 나름대로에 삶을 발걸음에 담았을 테니까요.
산티아고 순례를 하며 크게 다가온 또 다른 한 가지는 ‘자립’이었습니다. 이번 순례를 관통하는 주제로 9학년 합동 시를 지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모두의 의견이 자립으로 모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수많은 형태로 자립을 연습했지만, 그중에서도 제 돈을 스스로 관리한 것이 가장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계획도 세워보고, 그 계획을 위해 아껴보기도 하며 살았는데, 그 자체가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나를 살필 줄 아는 눈’이 길러져 있었습니다. 나에게 지금 얼마가 있는지, 얼마를 더 쓸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체계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힘은 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걸을 때 저의 상태나, 제 컨디션 그리고 제 마음이 어떤지를 살필 때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 힘은 훗날 제가 사회에 나가 살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것 말고도 어른들과 떨어져 지내보기도 하고 줄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가는 등, 이번 순례는 자립과 개인에게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나의 힘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립을 직접적으로 경험해보고 연습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처음에는 매우 거대해 보이고 넘기 힘들어 보였지만, 막상 가보니 다른 순례들과 비슷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어린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순례는 배운 것들도 많지만 무엇보다 제가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이제 앞으로 이 힘과 배움들을 발판삼아 나아가보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고마워요..듣자니..순례대장덕을 많이 받았다고..^^ 석영에게 부드러운 시간들이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