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포 소리/박철영
시골의 여름은 모내기 철이 시작되면서부터 바빠진다. 먼저 논에 심은 하지 감자를 캐느라 바쁘고 누렇게 익은 보리를 타작하느라 바빠진다. 논에 있는 그런 것을 치워야만 모내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모내기를 할 때면 가뭄이 정해진 것처럼 찾아왔다. 식정리 너른 들판을 요천수에서 끌어온 물로 다 적시려면 대단한 인내를 요구했다. 사람들은 순서를 기다리다 지쳐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려고 하다 이웃 논 주인과 물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고 싸움을 하느라 거칠어진 풍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네 앞을 시간마다 삼남 여객 버스가 지나갔다. 삼남 여객 버스가 지나간 뒤 신작로에 깔린 자갈과 길가 코스모스에는 흙먼지가 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어렵게 날을 잡아 모내기할 때면 또 다른 진풍경이 벌어졌다. 흙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쓴 신작로로 새참 때가 되면 아기 티를 갓 벗은 여자아이들이 더 작은 젖먹이를 광목 띠로 동여 업고는 힘겹게 걸어 나왔다. 자기 엄마가 모내기하는 논까지 가는 동안 배고픈 젖먹이 아기는 몸을 뒤로 젖히며 울어 젖혔다. 생각해봐도 고달픈 일상이었지만, 아이를 업은 여자아이들은 몸이 힘들어도 표정만큼은 환했다. 새참 때가 되어 모내기하는 논에서 빠져나온 엄마들은 마음이 바빴다. 얼른 새참을 먹고는 아기 젖을 먹이느라 포플러나무가 있는 시원한 곳을 찾아가 젖을 빨리곤 했다. 모테 논 방천에서도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여름 해는 긴 것 같지만, 금방 점심이 찾아오고 해거름이 찾아들었다. 그러다 보면 아버지는 서두르는 표정을 자주 비쳤다. 주어진 놉으로 계획된 모내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모내기하려면 먼저 볍씨를 뿌려 만든 모판에서 자란 어린 모를 뽑아야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심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어린 모를 뽑는 것을 모를 찐다고 말했다. 찐다는 뜻은 찢는다는 말의 변형일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 불린 볍씨를 모판에 뿌릴 때 촘촘히 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볍씨들이 성장하면서 어린 모들의 뿌리가 엉겨 붙어 그것을 낱개로 분리하느라 찢는다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 모판에서 놉으로 온 엄마들이 한 모판에 양쪽으로 두 분씩 짝을 지어 모를 뽑아나갔다. 모를 찌면서 그동안 밀린 엄마들의 동네 이야기가 시작되곤 했다, 뒤에서 엄마들이 찌어놓은 모를 일정한 양만큼 지푸라기로 묶어냈다. 그러면서도 솔깃한 내 귀는 엄마들의 동네이야기로 자꾸만 기울어져 갔다. 동네 이야기란 게 특별할 것도 없다. 누구누구네 집 아들이 서울 가서 무엇을 한다거나 누구네 집 딸이 시내 총각하고 연애를 한다는 정도였다. 가끔 며느리 흉도 들쳐졌지만, 모 찌는 소리에 이내 잦아들었다.
시간이 흘러가며 모판마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현저히 나타났다. 그러다 보면 눈치껏 속도를 내곤 했지만,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였다. 모 찌는 실력이 금방 느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모를 뽑아 요령껏 물에 찰박거리며 뿌리에 붙은 흙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까지가 모 찌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엄마들의 허리가 아파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누군가의 입에서 “뱀이야”하는 비명이 울렸다. 그 소리에 더 놀란 물뱀이 다른 모판 쪽으로 황급히 달아났고 연이어 그 뱀에 놀란 다른 엄마의 겁먹은 모습이 모판을 뒤흔들어놓았다. 나도 뱀이 무서웠지만 아이 같은 내가 남자라고 뱀을 멀리 쫓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술렁이던 모판이 잠잠해지며 두런거린 소리가 잦아지다가도 유달리 겁많은 사람의 발목에 붙어 모질게 피를 빠는 거머리 때문 또 한 번 요동을 치곤 했다. 모판에서 흔히 있는 또 하나의 아슬한 풍경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모를 찢는 날이면 하늘에는 제비가 수없이 논 위를 날아다녔다. 내 옆을 스쳐 지날 때는 꼭 부딪칠 것만 같았다. 제비들은 용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날아가며 모판에서 튀어나온 나방을 잽싸게 낚아채갔다. 모내기하는 날은 제비들의 잔칫날이었다. 당시에는 제비가 시골 집집마다 둥지를 틀어 새끼를 낳고 같이 살았다. 아예 제비가 집에 들지 않으면 불길하다며 집을 잘 짓도록 처마에다 받침대를 대어 주기도 했었다. 모내기하는 날은 제비는 제비대로 먹이 사냥에 바빴고 모를 찢는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손이 바빴다.
거의 모 찌는 것이 끝날 때면 몇 단씩 못단을 들고 모를 심을 논으로 옮겨갔다. 나는 못단을 엄마들의 뒤로 끊임없이 날라다 주어야 했고 간혹 묶인 못단을 멀리 던지다 보면 끈이 풀려 주위에 모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곤 했다. 그럴 때는 적당히 개중거려 놓아야 했다. 논이 넓어서 지게 발대에다 물이 홍건한 못단을 담아 수렁 같은 논을 걸어가다 보면 한쪽으로 기우뚱거리며 처박기 좋은 상황이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 없는 자존심이 나를 바로 일으켜 세웠다. 오늘 우리 집 모내기를 하러 온 놉 중에 영심이 어머니도 와 있기 때문이다. 창피하게 못단을 지게에 짊어지고 옮기다 논에서 처박히는 꼴을 보이기는 싫었다. 항상 의젓하게 보여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들 뒤에서 수발을 들다 보면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노는 나이에 무릎까지 빠진 논에서 일하는 것도 고역이 분명했다. 그러다 보면 수면 위로 눈만 빠끔히 내놓은 맹꽁이가 눈에 자주 띄었다.
맹꽁이가 방방 하게 들어찬 논물 속에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듯했다. 맹꽁이가 울 때면 귀 옆으로 난 작은 돌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우는 소리가 만들어졌다. 그런 모습은 꼭 조그만 풍선을 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는 맹꽁이를 지켜보다 날쌔게 맹꽁이를 잡아냈고 잡힌 맹꽁이를 하늘로 던지며 놀다 보면 지루한 것을 잠시라도 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름날 하루의 뜨거운 해는 아직도 머리 위에서 지근거리고 있었다. 모내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못줄 띄우기였다. 빨간 꽃술이 달린 푸른 나일론 줄을 앞줄과 이십 센티 정도로 정확히 줄을 띄어주는 일이 못줄 잡는 사람 몫이었다. 간단한 것 같아도 논이 워낙 넓어서 물먹은 못줄을 들어 올리는 데도 힘이 많이 들어갔다. 못줄을 들어 올리는 것도 요령이 필요했다. 못줄을 자기 쪽으로 살짝 당기듯 하며 순간적으로 동시에 머리 위로 들어올려야 했다. 못줄을 어설프게 들어 올리다 보면 가운데 간격이 너무 벌어져 버리거나 좁아져 못줄이 엉망이 되곤 했다.
그러면 뒤에서 지켜보던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매가 여지없이 등에 꽂히곤 했다. 당연히 그동안 일 잘한다는 칭찬은 무색해지고 만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에도 점심때를 알리는 오포 소리가 남원 시내에서 고독한 사람의 신음처럼 울려오기 시작했다. 그 싸이렌 소리는 우우우우~웅 거리듯 하며 깊고 넓게 울려 퍼졌는데 왠지 슬픔이 짙게 밴 듯했다. 오포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알지 못한 동굴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온 소리일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우리 동네는 남원 시내와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내에서 울려온 오포 소리는 도통리 동주 고개를 가볍게 넘어와 월락리와 고죽리 그리고 감람골을 지나 갈치 앞 삼거리에서 나누어져 동네까지 울려 퍼져온 소리였다. 한 오 분 정도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고단한 허리를 펴고 귀담아 들을라 치면 금방 나에게서 더 멀리 사라져버렸다. 그 시절은 집집마다 시계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낮 열두 시의 오포 소리는 밥때를 알려주었고 고단한 농사꾼 엄마들 어깨를 다독여주는 소리였다. 거기다 밥 끼니를 거른 배고픈 사람들의 위안이 되어주는 최고의 소리였다. 새참 때처럼 미리와 논 가 방천에서 우는 젖먹이를 어르던 아이들에게도 한시름을 놓을 수 있는 점심때가 찾아온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다들 밥 한 끼가 소중한 시절이라 젖먹이를 업고 온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점심을 때우곤 했다.
모내기하는 날이면 논에서는 아버지가 바빴고 어머니는 일손을 거들다 어느 정도 모내기가 손에 잡힐 때 동로골 집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모내기하러 온 놉만큼 쌀을 씻어 밥을 얹히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밥양이 많기 때문 밥솥이 끓어 넘치더라도 한참 불을 더 지펴야 했다. 이후에도 불기운이 살아있는 잉그락 불을 삽으로 몇 번 떠 솥뚜껑 위에 소복이 덮어놓았다. 밥이 설익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바쁘면 모내기 철에는 부뚜막의 부지깽이도 한몫한다는 속담이 생겨났을까 짐작이 간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국과 반찬을 만들었다. 반찬이라야 시내에서 새벽부터 머리에 이고 올라와 집집마다 팔러 다닌 생선 장수 아줌마한테 건네받은 갈치에다 감자를 송송 썰어 넣어 끓이면 최상이었다. 김치는 집에서 기른 심이 뻣세진 배추 포기가 어렵사리 왕소금에 절여져 버무려진 것이었다. 이것저것 몇 가지를 더해 양은 함지박에다 밥과 반찬을 담느라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정오를 알리던 오포 소리도 사라지고 없다. 지루한 시간을 논에서 일하던 놉들도 아픈 허리를 한 번씩 펴면서 어머니가 오는가를 도랑 쪽을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 어른이나 아이나 누구나 힘든 것은 같았다. 그럴 때 어머니가 큰 함지박을 이고 정호형 네 측백나무 울타리를 따라오다 작은 도랑을 건너오는 모습이 보였다. 달려가 머리에 인 함지박을 내려드리면서도 그때는 어머니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만 생각했다. 무거운 함지박을 이고 오느라 아팠을 어머니의 머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어머니의 쪽 찐 머리의 머리숱이 빠져 휑한 모습은 나이가 휠씬 더 지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방천가에 밥을 차려놓느라 또 한바탕 바빠졌다. 여기저기서 모를 심던 사람들이 그만 밥 먹고 하자며 논을 빠져나왔다. 새참 때처럼 젖먹이를 업은 여자아이들이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심을 먹은 뒤 방천가 포플러나무 아래 그늘에 흩어져 낮잠을 자느라 몇 몇 씩 누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 딸린 엄마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곤 했다. 반나절을 쫄쫄 굶었던 갓난아기도 엄마의 젖에 포만감으로 잠을 곤히 잤다. 여전히 땡볕은 어른이나 아기들을 가리지 않았다. 잠시 어머니의 품에서 땡볕에 땀을 흘리며 잠을 자던 젖먹이 아기들이 지금은 사십 대 중 후반이 되었다. 세월을 이길 사람이 없듯 세월은 그 누구도 피해가지 않으니 참으로 무상하다. 그렇게 모내기가 끝나고 나면 갑봉 형님과 형수는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를 해주었고 함께 저녁까지 먹고 집을 나섰다. 물론 따라온 아이 둘도 갑봉 형님 뒤를 졸졸 따라나섰다. 나에게도 무쇠솥에서 잘 만들어진 깐 밥이라는 누룽지를 한동안 먹을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누룽지를 깐 밥이라고 했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머니가 쥐여준 깐 밥을 맛나게 깨물어 먹던 소리가 내 귀를 자꾸 울린다.
첫댓글 고백하자면 생활에 조금은, 아니 많이 불성실하셨던(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걸 벗어나기 위해 수십년을 노력해야했었지)아버지 덕분에 시골생활을 조금 했었다네요. 일종의 좌천인 셈인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시골에서 살지 않았다면 자네 글을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까 싶네. 그런 점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이 고마울 때가 있다네. 퍽 낭만적이고 정의로운 면도 없지 않았던 아버지가 나에게 좋은 것도 물려주신 것 같아 고맙지만 말일세.
사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나 방학 때면 어김없이 일을 해줘야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스무살 집을 떠나 부평을 올라갈 때까지 그랬었지요. 당시는 그런 일들이 싫었지만 되돌아보며 이렇게 글로 추억하는 아름답던 시절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다들 사는 것이 힘들었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는 경우바른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형도 장수나 그 이외의 아버지 덕분에 경험하게된 시골 생활이 색다른 삶의 에너지가 되었다는 것을 공감합니다.
이문구 선생의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의 잊혀진 농촌 풍경이 어슴푸레 떠오름니다.잊혀지고 변해버린 지금,옛날이 되어버린 시간을 불러보게 하네요.잘 읽었습니다.
김시인님이 제일 그런 환경에서 부딪히며 살아가는데
이제는 내가 쓴 글 속의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지요
간혹 그런 풍경을 재현하는 곳도 있지만 치열한 삶의 정신마져 재현하기에 부족함이 많겠지요
오포 소리 보다 나는 방앗간에서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발동기 소리가 더 정겹게 느껴졌었는데. 뭔일 있을 때도 나던 오포 소리는 조금 불안한 마음을 들게 해서
그러게 다들 성장기의 추억은 환경의 개별성으로 다가오겠지. 그 시절의 방앗간의 발동기와 물고 돌아가는 벨트의 마찰음은 대단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