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발표글 ‘온전한 나’
안녕하세요. 9학년 장경원입니다.
제가 몇 년째 힘든 순간에 품고 있던 말 중 ‘이 정도로 안 죽어’라는 말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이번 순례에서는 초반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피레네를 넘을 때 적응이 덜 된 상태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걸으니 다리에 조금 이상이 생겨 며칠 고생할 때 이 말 덕분에 적응을 더 일찍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 말과 더불어 예전에 후마가 공양간 청소 도중 하셨던 말 중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고 땀을 흘릴수록 남들은 더 편하게 쉴 수 있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이 거창하게 꾸며낸 말보다 담백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다듬어진 말인 것 같아서 한 번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도 ‘이 정도로 안 죽어’라는 말과 느껴지는 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안 죽어’는 시간이 지나도 같았지만, 이 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느껴지는 게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그냥 마음에 와닿는 멋진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기댈 수 있는 편안한 말, 그리고 지금은 위로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순례 가기 전에는 다른 순례자를 하루에 1~2명 정도 만날 줄 알았는데 막상 순례자 여권을 만들러 생장에 가니까 30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크고 작은 배낭을 메고 같이 온 일행과 여러 가지 언어로 대화하는 걸 듣고 있자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중에는 한국분도 계셨습니다. 그때는 한국분을 만났던 게 정말 운이 좋은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 한국분을 만난 건 별로 운이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걸으며 만난 한국분들만 대충 스무 명이 넘어갔습니다. 그중 몇 명은 스쳐 가듯 인사만 하고 또 몇 명은 같이 걷기도 하고 밥도 먹으며 꽤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특히 9학년 네 명만 따로 떨어져서 갈 때 만난 부부가 가장 친숙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고 간단한 질문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9학년끼리 가는 도중 우연히 숙소도 거의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같이 가서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대화했던 사람들은 첫인상이 괜찮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별 이유 없이 다가가기 꺼려지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번에 저희 순례단 이름이 꼬리별입니다. 이 이름은 혜성을 우리말로 말한 것입니다. 뜻은 돌아왔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출발한다는 뜻으로 정한 이름입니다. 저희 모두 순례길의 끝인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해서도 덤덤했습니다.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일이면 다시 걸어야 할 것 같다.” 등 걷는 건 끝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순례도 그날 그곳에서 끝나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 느끼는 자신의 도착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지만 저는 800킬로를 걷게 한 힘 중 하나가 도착했을 때 나의 감정과 드는 생각들이 궁금해서, 또는 기대돼서였는데 덤덤함만 느껴지니 아쉽기도 했습니다. 분명 가기 전에 본 영상에서는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순례자라는 공통점 하나만을 가지고 생긴 것도 언어도 완전히 다르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정말 감동적이고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구나 하며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별생각이 들지 않아서 의아했습니다. 심지어는 저희 말고도 다른 순례자들도 저희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영상에서 봤던 것은 연출이었나 싶기도 했습니다. 제가 순례 동안 쓴 열 편의 시는 거의 ‘나’라는 주제로 썼습니다. 이번에는 일찌감치 ‘온전한, 꾸밈없는 나를 찾는다’란 개인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걷기를 시작하곤 한 걸음씩 온전한 나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시를 한편씩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이기적인 게 나쁜 거라는 것도, 베푸는 게 착한 거라는 것도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라는 제 나름 데로의 일차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 멀쩡한 원래의 나를 놔두고 더 꾸며서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간 쓰러트릴 도미노를 쌓는 것과 같은 이유겠죠. 하지만 도미노를 쌓고 있는 사람에게 왜 도미노를 쌓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재밌어서’라고 할 텐데, 그럼 나는 왜 재미없게 살고 있는지 수많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산을 걷다가 가끔 모래가 나오면 그 위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발자국들이 찍혀있었습니다. 저는 그 발자국을 보고 의식하여 그 위에 제 발자국도 하나 남겨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이곳에 남겨졌다. 지워졌을 수많은 발자국을 생각하면 출처 모를 힘이 솟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 숙소에 따로 빼놨던 여권을 두고 왔습니다. 그래서 뒤로 다시 4킬로를 뛰어가는 중에, 그때 본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아마 매일 이정도의 사람이 도착한다고 하면 지금 산티아고로 향한 여러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대략 5000명 정도 된다고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갈 때는 급한 마음에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무시한 채 달렸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도 건네며 여유롭게 달렸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분들을 만났습니다. 라오스에서 오신 딸 둘 있는 가족이셨습니다. 그런데 전에 몇 번 만났던 분들이라 그때만큼은 말 걸까 봐 무서워서 빨리 달려서 지나쳤습니다. 그러다 리스본으로 와서 대성당 옆으로 지나가는 중 정말 우연으로 그분들을 다시 만나서 급하게 자리를 피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인사를 하고 평범하게 지나쳤다면 어땠을까 하고 살짝 후회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제 일지에 갈등에 관한 얘기는 없지만, 갈등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가 공동 시를 지을 때 소리 없는 갈등이 연달아서 몇 번 터졌습니다. 그래서 눈치를 주고, 하지만 직접 강하게 말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직접 말하지 않으니 태도가 확 바뀌거나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도 저 자신에게도 답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남들의 표정을 보니 그 상황에서 제 표정과 닮아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상 속의 갈등은 자유로움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너무나 자유로워서’ ‘나는 하지만 너는 하지 않아서’ ‘합을 맞추어야 하지만 다들 제멋대로여서’ 같은 생각으로 서로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고선 꾸역꾸역 대화를 해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풀어내려 하지 않고 조용히 자연스럽게 넘어갔습니다.
이번 순례는 길었지만 스스로 진정 순례라고 받아들여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날을 산다’라는 느낌을 받아 행복했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걷고 있던 저희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시
힘들 때
끝없이 내려가는 절벽에서
간신히 버티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마치 여기 있는 게 잘못된 것처럼,
이런 의심이 들어 확신을 잃고
나를 믿지 못할 때,
“잘못된 게 아니야”
정작 이런 말을 한 것은 나였다.
그랬다.
가장 혼란스럽고 힘들 때, 도움이 됐던 것은
내 앞에서 길을 알고 이끌어준 사람도
내 뒤에서 힘껏 밀어준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항상 내 옆에 있어 주는 나였다.
새벽
모든 곳이 어두워
어느 누구의 그림자로 보이지 않는
내가 보는 모든 것이 어둡고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그 희미한 땅을 믿고
그 희미한 길을 믿고
그 희미한 나를 믿는다.
나아간다.
너와 나 달라도
이거 조금, 저거 조금,
이런저런 색을 섞어 낸 게 나다.
나도 검정 너도 검정,
하지만 다른 검정
너와 나 둘 다 저기까지 가야 하지만
너와 나는 다른 검정
내가 더 멀고 험해도
네가 더 멀고 험해도
악착같이 한걸음 씩 저기까지
내 겉과 속
태연한 척 고통스러운
여유로운 듯 다급한
내가 애써 감추려는 이 모습
내 무표정 속 슬픔을
내 무표정 속 기쁨을,
이런 나를 알아보는 사람
나밖에 없겠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나를 잘 아는 사람
아마 없겠지
나
난 나쁜 사람이다.
남들이 착한 것을 원한다.
난 착한 사람이다.
난 밋밋한 사람이다.
남들이 화려한 것을 원한다.
난 화려한 사람이다.
나의 나쁜 모습 나쁜 척
나의 밋밋한 모습 밋밋한 척
이 길의 시작과 끝
이 길의 끝엔 뭐가 있을까?
이 길을 시작할 땐 뭐가 있었을까?
지금 이 길엔 뭐가 있을까?
무엇하나 확실한 건 없지만
그래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하나,
시작과 지금 그리고 끝엔 내가 있다.
시작이 어디였더라도
끝이 어디더라도
내가 가는 길엔 항상 내가 있다.
관계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관계들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너도, 나도 남이 떠날까 봐 거짓말하는 관계
거짓 없이 진실로만 대할 수 있는
친구 하나 있으면 만족해야겠지,
이제는 다 떠나도 좋다.
그냥 내가 믿을 수 있는
나 하나만 보고 싶다.
첫댓글 반가운~~..발표회에서 잘 못들었는데 이렇게 글로 보니 반갑네요. 나눠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