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1. 살다 보면 종종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인지 의문스러운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지식으로 판단하기에는 도무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러나 받아들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끌어내어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시면서 이 말씀을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더 잘 알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알지 못하고, 더 잘 알지 못할 것 같으나 그 마음이 겸손한 자들에게는 알려 주시는 것이 있다는 말씀으로 판단된다.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거나 자기 지혜를 믿어 하나님을 외면하는 교만한 종교 지도자들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제자들과 겸손한 이들이 어린아이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구원과 진리의 은혜는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들 같은 겸손한 자들에게 깨닫게 해 주신다는 법칙(?)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법칙이겠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명백하게 밝힌 것이다.
2. 여기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로 나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힘주어 전하고 있지만, 인간 철학과 이성적인 눈으로 보는 헬라인들은 그것이 지혜롭지 못한 가르침이라고 하고, 놀라운 표적을 보아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간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혀 무능력한 죽음이라고 비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것이다(고전 1:24-25). 이 지혜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6-9)”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도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진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오직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으며”(마 11:27), 그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에 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비밀은 정말로 크고 깊은 비밀이니 함부로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의 눈과 귀와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세계를 나의 한계 안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면 쉼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주님의 초청이 얼마나 감사한가.
3.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어보고자 하여서 마태복음부터 읽다가 지금 생각하면 그리 길지도 않은 족보의 기사가 당시에는 왜 그리 길고 힘든지 몇 번이나 시작하고 중단하기를 계속하였다. 시간이 지난 후에 알고 보니 거기에 나오는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가 예수님의 조상의 족보에 실려 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그리고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을, 즉 장남보다 차남을 더 우선적으로 택하시는 것도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4.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배우고 따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심히 책망하시고, 세리와 창기들은 친밀하게 대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부정하다고 멀리하던 난치병 환자들을 가까이 하시면서 치유해 주시는 모습과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시는 모습들은 당시 문자적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심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법적이고 괴이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셨다. 그것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8-40)
5. 그리고 나의 소원이나 기도나 일의 결과가 다른 모습으로 보일 때에도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바로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종종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가사를 “내 주여 내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바꿔서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의 이름도 부르고, 제사도 드렸지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간 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사기 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좋았던 개혁자 히스기야 왕이 살던 시대에도 제물은 풍성했지만 생활에서의 모습은 죄악이 가득한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지적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1-4)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0-14)
6.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반복되기 쉽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교회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에 왜 교회 안에 이렇게 문제가 많고, 자주 책망을 받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모든 교인이 그런 것은 아니기에 감사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는 자기를 높이고, 분열을 조장하며 질서와 화평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이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교회 안에 알곡과 함께 가라지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라지와 함께 교회 안에는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도 있을 수 있고, 악한 누룩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혹은 정치적, 경제적 핍박과 육체적 박해도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만들고, 연단을 받게 하며, 원만하고 장성한 신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음”을 감사하며 찬송하게 한다.
7. 욥에게 일어난 이상한 고난은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얼른 알기가 어렵다. 욥 자신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에 가면 욥의 고백이 우리의 의문을 모조리 없애준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2-6)
친구들과 논쟁(?)할 때에는 너무나 당당했던 욥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오직 회개할 뿐인 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경험하는 일들을 다 깨닫지도, 알 수도, 헤아리기도 어려운 한계 안에서 사는 지극히 연약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께 묻고 알게 해 주시기를 구하여야 마땅하다. 그리고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는 말씀을 기억하고, 이미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주님의 모든 말씀을 잘 배우고 실천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항상 의문을 품거나, 불평하기 전에 잠잠히 기다리며,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온유한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를 누리는 복된 자일 것이다. 그러면 오늘 내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나에게 짊어지게 한 일도 능히 책임지고 충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려울 때에 낙심하지도 않고, 잘 될 때에 교만하지도 않으며,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