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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자녀다운 마음과 삶을 기도하나이다
은성: 이 찬송은 가사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부르고 있어요.
아버지: 그래? 어떤 찬송인데 그리 좋다고 하는 거니?
은성: 찬송 32장인데 가사가 제 마음 깊이 감동을 주어요.
(1)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사람이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2) 화려한 동산 무성한 저 수목 다 아름답고 묘하나
순전한 예수 더 아름다워 봄 같은 기쁨 주시네
(3) 광명한 해와 명랑한 저 달빛 수많은 별들 빛나나
주 예수 빛은 더 찬란하여 참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https://www.youtube.com/watch?v=DqZ2la7P4Sk
아버지: 이 찬송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1절은 만유(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존귀하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찬양하며, 영원히 섬길 나의 영광이라고 고백하고, 2절은 동산의 무성한 나무와 꽃들처럼 세상의 자연도 아름답지만, 순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보다 더 아름다워 마음에 봄날 같은 생명과 기쁨을 주신다고 노래하며, 3절은 하늘의 밝은 해와 달,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보다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빛이 훨씬 더 찬란하여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도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아름답고 존귀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고백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음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을 느낀다.
은성: 이런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이나 말이나 생활도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고 슬픈 마음이 들어요.
아버지: 네가 잘 생각했다. 빌립보 교회에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때에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고 말씀하신 바울 사도가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은성: 그런데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빌 1:15)고 했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도 한마음이 되지 못하고 투기와 분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아버지: 그것은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를 하면서 경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평화롭게 지내지만, 교회에 어떤 행사가 있어서 계획을 세우거나 실제로 그 계획을 실천할 때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타협이나 양보를 거부하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은성: 맞아요. 이번에 저희 청년회에서 야외 모임을 갖기로 했는데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면서 한 청년이 자기 주장을 강하게 고집해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리고 조편성을 할 때에 불평을 하는 청년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고,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어떻게 조리할지에 대하여 논란이 벌어지고 감정이 상하는 청년이 생겼어요.
아버지: 교회에서 가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은성: 돌아보면 우리는 은근히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며, 섬김을 받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 내 주장을 고집하고, 남의 방법을 용납하기보다 나의 방법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파당을 만들게 하고, 나중에는 서로 대적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버지: 교회 안에는 그 자라온 배경이나 경험이나 알고 생각하는 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면 안되고,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는 하나님의 말씀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는 말씀을 무겁게 받고 겸손히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은성: 아버지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해요. 사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보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닌가요? 특히 세리였던 마태와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서로 어울리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생각되어요. 거기에 가룟 유다까지 함께 있었고, 요한과 야고보는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우에 앉기를 청하고, 그에 대해 제자들은 “누가 크냐”의 논쟁을 계속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후에 그들의 달라진 모습이 놀랍기만 해요. 우리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로 보내주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주장하실 때에만 아름다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요.
아버지: 네 말이 맞다. 본질을 잊어버리니까 지엽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지. 바울 사도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은성: 그러니까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사명을 확실히 발견한 사람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해도 되겠네요. 언젠가 들은 말에 “태양이 뜨면 촛불을 끈다”고 했는데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말 4:2)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촛불이나 전깃불만 붙들려고 하면 참 빛이 밝히는 넓은 것은 못 보고, 한계 안의 작은 밝음으로 만족하며, 그 너머의 것은 오해하거나 왜곡하기가 쉽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참 좋은 말을 했다. 그러니까 본질에 충실하고, 지상명령(至上命令-마 28:19-20)에 부지런한 사람은 사소한 것을 고집하며 귀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상처를 주거나, 지엽적인 것으로 논쟁하며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는 것을 피하고, 어찌하든지 형제를 세워주며 교회의 유익을 증진하기를 힘쓰게 된다. 요즘은 교회에서 자기들의 이익과 권리만 주장하면서 심지어 세상 재판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는데 바울 사도가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고 말씀한 것을 귀담아 들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은성: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는 말이 생각나네요. 일반적으로 활동적이고 바쁜 생활이 슬픔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잊게 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저는 자기 사명에 바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끌어내고 싶어요.
아버지: 고인 물은 썩고, 냄새가 나는 법이지. 개인이나 교회도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봉사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부흥과 번성을 주셨으니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당시가 그렇다. 그런데 안일에 빠지고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게 되면 교회는 말씀의 본질에서 떠나서 배교와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진정으로 주님의 일에 부지런한 사람은 자기의 봉사나 경험을 내세우거나 인정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고 겸손히 고백하며, 주님이 자기를 일하라고 하신 그것으로 기뻐하며 감사할 것이다.
은성: 교회에서는 교인으로 등록하거나 자녀들이 입교할 때에 하는 문답에 “그대는 하나님의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肢體)로서 교회의 거룩함과 화평을 위해 힘쓰며, 교회 전체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 개인 생활의 목적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생애를 다 드려서 주님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있는데 이 질문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유익과 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힘써야 하겠지만,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의 거룩함과 화평을 위해 힘쓰며, 교회 전체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 개인 생활의 목적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생애를 다 드려서 주님을 섬기려는 서약이 너무나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자기의 주장이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양보하고 타협하며, 다른 사람들을 존귀하게 대할 것이고요.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간절히 바래요.
아버지: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의 한 부분이 우리의 이야기와 잘 연결되는 것 같아서 함께 읽고 싶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다른 사람을 축하하기가 힘들기 마련이지만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자기 관심사 위에 세운다면 그만큼 더 나빠진다. 교만과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만족스러운 관계를 위해 자기 관심사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기독교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가르친다(롬 12:15). 모든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돌아보는 참된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물론 사람들이 자기의 관심만 보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무시한다면 그와 같은 만족스러운 공동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적 정체성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왕의 자녀로서 가치와 존엄성을 부여받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도록 존재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야망이나 헛된 속임수가 아닌 참된 가치로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빌 2:3). 이는 우리를 자신에게서 돌이켜(진정성과 개인주의의 시대에는 아주 괴상한 생각이다.) 다른 사람과 세상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자유롭게 한다. 기독교는 삶과 진정한 우정을 위한 비전을 제공하여 건강한 관계와 만족스러운 공동체를 만드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위한 깊은 갈망은 복음의 배경에 있는 신비하고 독특한 기독교적 관점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스스로 언제나 관계적인 존재로 존재하셨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이 천사나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관계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관계성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있어서 언제나 근본적인 것이었고 현실에까지 확장된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채트로우, 마크 앨런 지음, 노진준 옮김,『십자가 중심 변증학』 346-347
은성: 삼위 하나님의 관계로 설명을 하니 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이것을 바르게 깨달으면 교회 안에서 우리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겠네요.
아버지: 이런 근본적인 깨달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좋은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이런 것들을 배우기에 힘쓰자.
은성: 오늘 너무 많이 배웠어요. 항상 감사드려요.
아버지: 나도 많이 배워서 고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