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자아활동으로 아스트랄체에 침투한다면, 여러분은 음악을 갖게 됩니다(발도르프 치유교육, 2021, 130)."
위 문장을 읽고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침투했으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가 있을까? 먼저 인간의 내부를 이해해야 하고, 이해가 되면 내부는 서서히 조금씩 발달해 나아가므로, 그 때 자아의 활동을 통해서 음악을 가질 수가 있다. 문제는 정신이 보이지 않아서 발달하지 않은 듯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발달한다는 것이 정신의 속성이므로 내가 먼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정신을 배제하고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정신은 곧 잠들고 만다. 왜냐하면 현실 삶에서 자아는 상속에 있지만, 이 자아는 본질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아도 계속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내가 정신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자아가 자신의 역할을 하도록 내가 자아를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한다면, 자아를 보고 내가 열심히 할려고 하니 도와주기를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아는 알아듣고 열심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정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내부를 이해할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담인데 필자는 화를 내고 싶지 않은데 어떤 상황에 놓이면 저절로 흥분을 하고 화를 내어서 후회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정말 화를 내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내가- 화를 낸다. 마치 차 바퀴가 내리막에 굴러가듯이. 그래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더니, 에테르체가 변형되었기 때문이라는사실을 깨달았다.
에테르체는 생명작용으로 마치 공기 중에 빛이 반짝이듯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런데 영혼이 충격을 받으면 에테르체의 움직임도 바뀐다. 충격의 강도가 세거나 그 충격이 반복되면 에테르체가 저절로 그 움직임이 될 것이므로, 그런 상황이 되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인데 습관이 좋게 들여지기도 하지만, 나쁘게 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나쁘게 들여지는 경우가 업이다. 생명작용인 에테르체의 움직임이 곧 생명작용과 연계해서 이루어지므로, 에테르체가 변형된 경우, 생명작용과 연계되어서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만약 바꾸고자 한다면 생명을 버릴 각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충격을 언제 받을까? 물리적인 충격도 있고, 정신적인 충격도 있다. 물리적인 충격은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치유되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스스로 알기 어려우므로 자신이 깨달았을 때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보아야 한다. 이미 업으로 굳어져 버린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계속해서 이어지면, 영혼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을 것이므로 그것이 영혼에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처가 에테르체의 변형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상속의 자아가 그 상(어려운 현실 문제)을 상으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상속의- 자아가 상에 휘말려서 종내는 영혼의 상처가 되고, 이것이 다시 에테르체의 변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이런 문제를 대상(타인)으로 돌리는 경우, 타인을 해치는데 있다. 그런 경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혼이 입은 상처가 에테르체의 변형을 가져오고, 변형된 에테르체가 그런 상황에 놓이면 저절로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업이 업을 만들어서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돈다. 만일 자신의 에테르체를 파악한다고 해도, 변형된 에테르체가 다시 돌아오기는 굉장히 어렵다.
만약 자신의 에테르체가 변형이 되었다면 먼저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늘 관리해야 한다. 충격이 클수록 시간이 오래걸린다. 두 번째는 자신의 상황을 잊지 말고 그런 상황에 놓였을 경우 화를 내더라도 '아! 화가 나는구나'를 파악해야 한다. 어렵지만 조금씩 강도가 약해지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에테르체가 변형되었지만 에테르체는 물질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생명의 힘으로 호흡처럼 움직일 뿐인데, 내가 그 생명작용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그 감정, 아스트랄체의 '감정'이 브레이크이다. 구체적으로 이 생명의 힘은 아스트랄체에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화는 아스트랄체 작용(감정)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아스트랄체가 에테르체에 연결되어서 에테르체가 변형이 된 것이다. 변형되어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힘, 에테르체가 다시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아스트랄체가 물질적으로 드러난 것이 화이다. 생명의 힘이 연결되었으므로 아스트랄체의 힘이 얼마나 강할지는 상상해 보면 알수가 있다.
이때 등장하는 존재가 자아이다. 자아가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아스트랄체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이 자아의 작용이 없다면,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작용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성찰이다.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이 이와 같은 일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인간의 내부를 파악하면, 아스트랄체의 작용을 이해한다. 그러면 자아를 아스트랄체에 침투시킬 수가 있다. 침투시킨다는 말은 아스트랄체의 활동을 자아가 이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음악활동,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면 내가 나의 자아로 그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 활동이 아스트랄체가 드러나는 활동이다. 즉 우리가 하거나 듣는 음악은 아스트랄체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자아가 음악 속에 있음을 -내가-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 속에 있으면 내가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나는 나의 자아를 파악할 수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드러난 자아를 만나고 싶은 까닭은 현 인류의 자아를 현실 삶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의 주장에 따르면, 현 생의 자아는 다음 생에서나 만날 수가 있다고 한다. -이런 자아를 현 생에서 발달시키는 것이 인간의 진화이다-.
결론을 말하면, 인간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관점에서 보면, 음악을 하는 것이고, 내부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부의 활동을 모르면, 음악을 할려면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안다.
음악이란 아스트랄체가 드러나는 것이고, 이는 아스트랄체가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아스트랄체가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방법이 아스트랄체가 탄생 하기 전에, -아스트랄체는 사춘기 무렵 탄생한다- 아스트랄체로 하여금 인간의 몸을 악기처럼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에테르체가 탄생하여 자유로워진 시기, 7-14세 사이 음악을 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인간의 몸을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다가, 7세가 되면 서서히 인간의 몸안으로 들어간다. 이때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면, 호흡과 같이 아스트랄체가 인간의 신경체계를 타고 몸안으로 들어간다.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 아스트랄체의 탄생이고 그 시기가 사춘기이다(슈타이너의 주장). 그래서 음악은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스트랄체 탄생 전에 인간의 몸을 악기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 자아가 음악 안에 있다면, 그 기쁨이 굉장하다는 사실도 안다. 음악을 통해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현생에서 만나지 못하는 -나의- 자아를 음악을 통해서 만나기 때문이다. 아마 상상을 초월한 기쁨일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침투할 수 있다면, 자아가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아스트랄체를 통해 표현할 수가 있다. 단계가 여기까지 가야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여담으로 유튜브 음악을 들어보면, 가요, 팝송, 세미 클래식 클래식 등등 모든 음악에 있어서 자아가 음악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자아가 음악을 표현하는 단계까지 가야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드러나지도 않은 자아가 음악을 표현해야 하니, 그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외부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의 내부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바르게 인간의 내부가 발달하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재란 인간의 내부가 올바르게 발달한 경우이다. 누구라도 가능한 일인데, 현 인류가 인간의 내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그 수가 적어지고, 또 병(정신)에 걸리는 경우도 많아지는 것이다.
꼭 세계적인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음악을 통해서 자아를 만날 수가 있고, 자신의 자아가 음악의 정서를 표현할 수가 있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요컨대 현실에서 자신의 자아를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음악을 통해서나마 만난다면, 그 기쁨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는 의미이다. 통상 지구에서 인간이 느끼는 기쁨 중에서도 가장 크다고 한다.
과거 선지자들을 현재의 시선으로 볼 경우, 아무런 것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 또한 자아를 현생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정신이 보이지도 않아서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반드시 찾는다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배제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