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f5hQ84xJgA
모닥불이 된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12월, 1950년 바로 이맘때쯤 지금 북한 지역의 흥남부두입니다. 1.4 후퇴 직전 중공군에 의해 미군이 완전히 밀리기 시작하면서 육로가 막히자 군인들을 비롯한 모든 피난민들은 해로를 통해 피난하고자 흥남부두에 몰려듭니다.
당시 빅토리호 선장의 증언입니다.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적지않은 배들은 오직 미군인들을 철수시키기에 바뻤고 수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살기위해 닫히는 군용선에 메달리지만 그 틈새에 끼어서 죽거나 바다에 떨어지기 일수였다고 합니다. 그때 군수물자인 항공유를 싣고 왔던 60인승 메러디스 빅토리호 라루 선장은 무기를 다 다내리고 오직 본인의 결단에 따라 정원의 200배가 훨씬 넘는 1만 4천명의 피난민을 태웁니다. 사람 수를 세고 세다가 너무나 많은 인파들이 몰려드니까 사람수 세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하루 온종이 피난민을 태우고는 라루선장은 가장 위험한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 배는 군용배였고 군수물자인 항공유를 싣어나르는 배였습니다. 당시도 그 배에는 적지 않은 항공유가 싣어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항공유가 있었다는 건, 거대한 폭발물을 싣고 있었다는 겁니다. 도로에서 가스차나 휘발유 잔뜩실은 트럭들 사고 나면 대형사고가 나잖아요. 그런 겁니다. 전시였고 바다에는 적지 않는 기뢰들이 있었고 전투기나 폭탄에 의해 한발만 그 배에 닿아도 순식간에 거대한 폭탄으로 변하는 배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선장이었던 라루라는 선장은 전쟁물자 대신 그 배에 피난민들을 싣고 목숨을 건 항해를 합니다. 당시 한 배에 타고 있던 2등 항해사였던(그 사람은 훗날 미해군참모총장이 됨) 러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그의 증언에 의하면 라루라는 선장은 그날 순식간의 공포로 아수라장이 된 그 피난민 대열에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거제도 까지 배를 운항하는데 자신이 그 배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어떤 분의 기운에 이끌려 항해를 하는 느낌이었었다고 합니다. 그 선장이 그 날의 체험이 얼마나 강열했으면 그는 전쟁 후 일체의 모든 일을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거의 50년 동안을 조용히 은둔자로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날 그때 자신이 인생에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부은 거지요. 심지어 수도원에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한국전쟁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날 그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중에 한 부부가 100일도 지나지 않아 한 아이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분이 누구예요? 문재인 현 대통령입니다. 우리 역사는 당시 그 피난민 대열에서 고통받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순간에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사람들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시인 안도현 님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 넌 누군가에게 그토록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라고 노래했죠. 추운 겨울, 한번쯤은 뜨겁게 열정어린 순간을 다 바친 연탄재처럼 모닥불처럼 자신의 전부를 태워 누군가의 시린 가슴에 따스함을 지피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야기에서도 이런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마태의 족보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봤지만 이 족보에는 짓밟히고 강간당하고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가족 친척들에 의해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하나같이 운명에 포로가 되어 찌글어져 지내지 않고 판을 새롭게 바꾸어내면서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회복해갑니다. 오늘 마리아의 모습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예술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작품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깊은 통증과 슬픔을 그린 작품입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아기 예수를 축복하면서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칼이 자신을 꿰뚫는 듯한 슬픔>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녀의 인생 전체에 드리워진 통증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제사에 비둘기를 드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한 여인이었고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짓밟힌 여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고 나와있습니다.
21세기 인권이 이렇게 많이 신장되어 있는 사회에서조차도 조동연씨와 같은 말도 안되는 피해자가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받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예수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당시는 로마 군인들이 지배하는 시대였고 갈릴리 세포리아 주변으로는 일개 군단의 로마군인들이 점령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여인들을 짓밟는 시대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들여다보면 마리아의 가슴에는 세상에 대한 깊은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가 느껴집니다. "주께서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지긋지긋한 넌덜머리나는 세상의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세상을 노래했습니다. 이건 노래가 아니라 분노입니다. 비겁하고 잔인한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 대한 분노입니다. 가진 사람들은 하루아침에도 뒷돈으로 50억을 받지만 평범한 서민은 하루 12-14시간을 일해도 쉼없는 노동속에서 몸이 망가질때로 망가져도 병원 한번가보지 못하고 또다시 일터로 나가야만 오늘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정한 세상에 대한 분노입니다.
끝없는 가난과 언제든지 잔인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 그리고 짓밟혀도 가해자처럼 더럽고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는 야만적 사회에서조차도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면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존재하고픈 한 여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을 보십시오. 요셉이 조용히 마리아과 결별을 하려고 했지만 꿈에서 조차도 천사가 나타나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알려주고 이름까지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는 걸 보면 요셉도 적지 않게 이 문제로 고민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그 여인이 겪고 있는 모든 수모와 멸시를 다 감당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부모는 얼마나 반대했겠습니다. 많은 많은 여자중에서 하필이면 왜 꼭 반드시... 여러분 여러분들이 곱디곱게 자식을 키웠는데 어느날 여자친구라고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왔는데 당차기는 그 배포와 당당함이 열남자 부럽지 않구요, 가진 것은 없는데 유일하게 가진게 아빠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요셉은 이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둘사이에 어떤일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은 정말로 마리아를 사랑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랑에 자신의 인생을 겁니다. 그 모든 사회적 비난과 조롱과 멸시가 있었을텐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저도 속아서 결혼했거든요. 저는 아내가 농촌목회하자고 해서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안수를 받으니까 유학을 가자는 거예요. 사기 결혼입니다. 저는 지금도 땅에서 살고 싶어하는데 아내는 땅이 싫데요. 완전한 사기 결혼입니다. 그래도 제가 아내를 사랑하니까 살지요.(ㅎㅎㅎ)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둠이 깊어서가 아니라 너무 현란한 빛에 눈이 멀어서다"고 박노해 시인이 고백했는데 삶을 살아가다보면 진실을 왜곡시키고 방해하고 그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수없이 많은 유혹들이 즐비한데 그런 현란한 불빛속에서도 진정한 사랑에 자기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인생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닥불처럼 자신의 인생의 충만함을 불살라 무언가, 누군가에게 자기 심장을 줄 수 있는 인생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 장례를 치르면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누구나 한번 왔다가 한번 떠나는 인생인데 살아계신 동안 누구나 충만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아낌없이 다쏟아 부으며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볼래 일할래 하면 누구나 다 일한다고 할정도로 아이를 돌보고 사람을 돌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재원 집사님 어머님 투병시작하시면서 때로는 몸의 힘겨움 때문에 쏟아내시는 온갖 감정, 점점 나약해지시면 아이처럼 되어 가시는 과정에서 감당해야했던 말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어려운 일(여기에는 정말 감당하기 쉽지 않는 것들을 감당해 나간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들을 손수 감당하시면서 어머님 마지막 떠나가시는 과정에 친구처럼 애인처럼 아빠처럼 자식처럼 어머님과 동행하시면서 아낌없이 다 쏟아부으셨어요. 누구나 그렇게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고 옳고 마땅하다고 여기지만 그렇게 실제로 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끝까지 뚜벅뚜벅 잘 살아내셨습니다. 잘 감당하셨습니다. 온전히 자신을 불살라 어머니 마지막 이생에서 떠나가시는 과정에 따스한 모닥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정말 존경하고 감사하고 참으로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학자 마커스 보그에 의하면 "믿음" 크레도라는 건 "심장을 받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신실한 사랑이라는 거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심장을 받치는 가장 신실한 사랑이 우리의 관계와 오고가는 삶의 여정, 통증과 아픔으로 신음하는 모든 곳, 좌절과 절망으로 낙심하고 있는 모든 곳에 따뜻한 모닥불로 충만히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