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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일면식조차도 없었던 김영탁 시인으로부터 시집을 내자는 난데없는 제안을, 그것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돌아보면 모두 쭉정이들뿐인데 미안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여기저기 기웃댈 것 없이 황금알에다 다섯 번째 시집을 맡기기로 했다. 2016년 예순셋의 가을 迎舞軒에서 이종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 이종문
순애야~ 날 부르는 쩌렁쩌렁 고함 소리 무심코 내다보니 대운동장 한복판에 쌀 한 말 짊어지시고 아버지가 서 계셨다
어구야꾸 쏟아지는 싸락눈을 맞으시며 새끼대이 멜빵으로 쌀 한 말 짊어지고 순애야~ 순애 어딨노? 외치시는 것이었다
너무도 황당하고 또 하도나 부끄러워 모른 척 엎드렸는데 드르륵 문을 열고 쌀 한 말 지신 아버지 우리 반에 나타났다 순애야, 니는 대체 대답을 와 안 하노? 대구에 오는 김에 쌀 한 말 지고 왔다 이 쌀밥 묵은 힘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래
하시던 그 아버지 무덤 속에 계시는데 싸락눈 내리시네, 흰 쌀밥 같은 눈이, 쌀 한 말 짊어지시고 아버지가 서 계시네 계엄군을 투입하라 이종문
화물연대 부산지부가 총파업을 선언하여 이른 바 물류대란이 코앞에 다가오자, 급해진 중앙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했다
고료도 없는 시를 매일 써온 시인들도 드디어 총궐기 해 총파업을 선언하고, 당분간 시 짓는 일을 일체 작파키로 했다
뭐라고? 그래 봤자 눈도 깜짝 않는다고? 천만에, 그럴 리가? 다급해진 대통령이 공권력 투입한다며 으름장을 놓겠지 흥,
이 놀라운 사태 앞에 경악한 대통령이 국가적 위기라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말로 계엄군들을 투입하게 될지 몰라
그래 부디 그 계엄군 투입하라, 투입하라 시인들이 작파를 해도 공권력을 투입하는 기차고 신명 난 세상, 그게 꿈이니까 얼쑤!
깨가 쏟아지게 살게 이종문 익어 간다는 것은 매 맞을 날 온다는 것 익기가 겁이 나네, 매 맞기가 무섭다네 하지만 매를 맞아야 깨가 쏟아지는 것을 <!--[endif]--> 그래, 익자 익자, 매 맞을 날 기다리며 어차피 맞을 거면 속 시원히 맞고 말자 아무렴 사랑의 맨데 고까짓 거 못 맞을까
우와! 때가 왔다, 와 이렇게 좋노 몰라 어르듯이 달래듯이 찰싹찰싹 때려다오 깨알이 찰찰 쏟아져 깨가 쏟아지게 살게
킬링트리(killing tree) 이종문
요다음 세상에선 꼭 나무가 되고 싶어 참 오랜 기도 끝에 나무로 태어났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무럭무럭 자랐다.
나의 그늘 아래 아이들이 뛰어놀고 내 둥치에 등을 대고 엄마가 젖을 줄 때, 나는야 꿈을 이뤘다, 뜀박질을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떼 악마가 나타나서 아이들 발목을 잡고 마구 빙빙 돌리다가 내 몸에 머리를 치고 구덩이에 던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미친 듯 절규했다. 분노했다, 통곡했다, 몸부림쳐 거부했다. 하지만 나는 뿌리를 땅에 박은 나무였다.
이제 난 공범이다, 아이들을 떼로 죽인, 정말 끔찍하고도 치 떨리는 죄를 짓고 가슴에 킬링트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산다.
*킬링트리; 캄보디아의 킬링필드(killing fild)에 있는 나무 이름. 크메르 루즈들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이 나무의 둥치에다 수많은 아이들의 머리를 쳐 죽인 데서 유래한 이름임.
이제 대강 알 것 같네 이종문
어릴 때 그 우람턴 동구나무 그늘 아래 하얀 모시옷 입고 흰 수염을 나부끼며 흰 구름 바라보시던 우리 동네 어르신들
저 하늘 밖 이치까지 환하게 다 꿰뚫었을 그 신선 같은 분들 담소談笑를 나눌 때면, 그 무슨 고담준론高談峻論인지 그게 정말 궁금했네
내 환갑을 넘고 보니 이제 대강 알 것 같네 허리가 아프거들랑 동원한약방에 가고 천식엔 마늘을 구워 먹어보란 얘기였네
숨을 쉰다는 것 이종문
북극해 얼음 밑에 살고 있는 바다표범, 수시로 숨구멍에다 콧구멍을 들이밀고 큰 숨을 들이켜 쉰다, 안 그러면 죽으니까
얼음 위 북극곰이 참 용케도 그걸 알고 바다가 꽁꽁 얼면 제 이마를 쿵쿵 찍어 숨구멍 뚫어놓고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
표범이 숨구멍에 콧구멍을 들이밀면 북극곰이 득달같이 아 냅다 달려들어 한바탕 잔치를 한다, 피 칠갑을 하는 잔치
표범도 다 알지만 곰이 기다리는 것을,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 목숨을 잃는 터라, 에라 이, 숨을 쉬려다 숨이 멎는 것이다
니가 와그카노 니가? - 민달팽이 하시는 말 이종문
니가 하마터면 날 밟을 뻔 하고서는 엄마아~ 비명 치며 아예 뒤로 넘어가데
죽어도 내가 죽는데 니가 와 그 카노 니가?
느낌표를 찍을 일이 - 갑일 아침에 이종문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다툴 건가 돌과 돌 맞부딪혀 스파크가 '번쩍!'할 때 삶이란 그 ‘번쩍!’ 하는 그 불빛과 같은 거라*
그래 그 ‘번쩍!’ 하는 그 찰나가 삶이라면 그 가운데 ‘번쩌’까진 이미 죄다 지나갔고 마지막 기역 자 쓰는, 그게 겨우 남은 건가
아니지, 그러고도 더 큰 일이 남아 있지 이 세상 가슴 가슴에 바위가 쿵, 떨어지는 그 무슨 천둥과도 같은 느낌표를 찍을 일이
*백거이의 시 [對酒]의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을 변용.
무심코 이종문
무심코 대추 하나 와락, 깨물었죠 벌레 한 마리가 어쩔 줄을 모르데요
우주가 천둥을 맞고 두 동강이 났거든요
그 나무가 자살했다 이종문
강원도 정선 고을 첩첩 산 첩첩 골에 천삼백 살이나 먹은 참 우람한 소나무가 시퍼런 기를 뿜으며 시퍼렇게 살아왔다
군郡 관광 상품으로 개발을 하기 위해 첩첩 산 첩첩 골까지 길을 내어 포장하고 손님을 받으려는데 그 나무가 자살했다
저 천기를 호흡하며 내 이렇게 살았는데, 아 글쎄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가? 차라리 죽지 뭐 하고, 숨을 끊은 것이다
소 이종문
문득
황혼 무렵
그 소가
생각난다
찾아
이 산 저 산
다 헤매다
돌아오면
어느새
먼저 돌아와
움모~, 하고
울던 소!
웃지 말라니까 글쎄 이종문
시인 이중기 형의 양아버지 되는 분은 삼사 대 양자 집에 또 양자로 들어가서 세상에 딸-딸-딸-딸-딸, 딸 다섯을 낳았다요
미치고 환장하고 애간장 탄 그 어른이 용하다는 점쟁이께 점을 치러 갔는데요,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아들 수數가 없다 네요.
급기야 이사를 가 또 딸 셋을 내리 낳고 아들아들 하고 빌며 아홉째를 낳았는데, 아 글쎄 딸 쌍둥이가 튀나왔다 카더라요
눈물로 온 집안이 뒤범벅이 되었는데 내 일이 아니라고 호호 하하 웃지 마요, 그래도 자꾸만 웃네, 웃지 말라니까 글쎄
새로 부르는 서동 노래 이종문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이웃 마을 처녀에게 한눈에 반해 이 수작 저 수작 다 걸어 봐도 눈길조차 한 번 안 주는 거라
에라 이 도분이 나 옛날 두건장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쳤다는 도림사 대숲으로 냉큼 달려가 ‘순애는 내 꺼다, 순애는 내 꺼다, 제일여상 다니는 순애는 내 꺼다’ 하고 목청이 터지거라 외쳐댔더니, 바람이 불때마다 대나무 숲이 ‘순애는 종문이 꺼, 순애는 종문이 꺼, 제일여상 다니는 순애는 종문이 꺼’ 하고 막무가내로 외쳐대는 통에 시집갈 데가 영 없게 되어버린 그 처녀 순애가 미치고 폴짝 뛰고 환장하다가,
이놈아, 이 원수 같은 놈아 하며, 내게 엎어진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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