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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의 <동주열국지>는 총 114회로 구성된 이른바 화본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화본소설은 구술되던 것을 그대로 글로 옮겼다는 의미이며, 그 내용을 장이나 회로 분류해 수록하여 장회체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화본소설은 대체로 송나라 시대 이후에 유행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상공업이 발달한 주요 도시를 기반으로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같은 강창(講唱)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야기와 노래가 결합된 강창의 대본은 남녀의 애정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다룬 것들이 많았는데, 풍몽룡 역시 당대 유행하던 화본소설의 형식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담아냈던 것이다.
<동주열국지> 2권은 ‘진문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제나라 환공에 이어 패자로 인정받는 진(晉)나라 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순자>에서는 제환공과 진문공에 이어 초나라 장왕을 춘추오패로 열거하고 있지만, 논자에 따라 2편에서 다루어지는 송나라 양공이나 진(秦)나라 목공을 춘추오패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대체로 춘추오패로 평가받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위에 현명한 참모들이 다수 존재하며, 제후들 역시 그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정책에 반영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당시의 천자국인 주나라 왕실을 높인다는 명분을 취하여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패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환공 사후 제효공을 세운 송나라 양공이 후대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춘추시대의 패자 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송양공은 주나라 왕실과 불화하면서 반목하고, 초나라 성왕에 포로로 잡히는 등의 행적으로 진정한 패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 하겠다. 송나라 양공과의 세력 다툼을 통하여 차츰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한 초나라 성왕은 후에 초장왕이 중원의 패자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밖에도 백리해와 건숙 등의 뛰어난 참모들을 거느리고, 진나라 문공을 제후로 등극하도록 만들어준 진나라 목공을 패자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진목공은 서쪽에 치우쳐 있던 진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뛰어난 참모들과 함께 생전에 중원의 권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등 어쩌면 진정한 패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라 하겠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제환공에 이어 진나라 문공이 패자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에는 후대의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사실 진문공의 경우 제후로 등극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행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헌공 사후에 호언과 조최 등의 참모들과 함께 공자의 신분으로 열국을 떠돌아다니던 과정이 2권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진문공은 제후로 등극해 9년 남짓 활약했지만, 작가는 오히려 제후에 등극하기까지의 19년 동안의 그와 참모들의 극적인 행적에 주목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춘추시대의 열국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얽혀 배신과 동맹이 수시로 엇갈리는데, 패자로 자리를 잡았던 제환공과 진문공의 경우 ‘존왕양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아마도 제후로서의 활동과 업적은 진목공이 더 뛰어난 면이 있겠지만, 진문공이 제후로 자리를 잡고 패자로 정립하기까지의 과정이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더 각인되었을 것이라 이해된다.
개인적으로 진문공의 참모 중에서 개자추의 형상에 대해서 주목하게 되었다. 진문공이 제후로 등극하여 참모들이 서로의 공을 내세울 때, 조용히 뒤로 물러나 숨어살던 개자추의 태도는 진정 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로 인해서 진문공이 깊이 숨은 개자추를 세상에 나오기 위해 그가 사는 산에 불을 냈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노모와 함께 불에 타 숨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한식(寒食)’에는, 개자추가 죽은 날을 기리기 위해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처럼 2권은 진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중심으로 그려내면서, 진(秦)나라와 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3권의 ‘진초시대’가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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