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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면’ 혹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말과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1.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참된 교회에서는 인간의 선한 행위나 공로, 혹은 고행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하고, 우리 시대에는 듣기가 쉽지 않은 귀한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부족한 말이고, 믿는 인간 편의 노력과 수고와 공로가 함께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나,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구원을 가르치는 자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2. 우선 ‘믿음’ 혹은 ‘신앙’에 대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교회 역사에서 우리 선생님들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경우를 잘 정리해 주셨다. AI는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① 역사적 신앙(Historical Faith)-성경의 기록이나 역사를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믿음이다. 특징: 성경을 사실로 믿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함. 상태: 지성적 동의에만 머무름. 비유: 야고보서 2장 19절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에 해당. 결과: 인격적 변화나 구원이 없음.
② 기적적 신앙(Miraculous Faith)-기적을 행하거나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생기는 믿음이다. 특징: 초자연적인 이적, 신유, 문제 해결에 집중함. 상태: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만 하나님 자신은 신뢰하지 않음. 비유: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떡을 먹기 위해 따르던 무리들. 결과: 기적이 끝나거나 고난이 오면 곧 사라짐.
③ 임시적 신앙(Temporal Faith)-일시적으로 기쁨과 열정을 보이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믿음이다. 특징: 감정적 자극이나 환경에 따라 쉽게 뜨거워지고 식음. 상태: 죄에 대한 깊은 회개나 영적 뿌리가 없음. 비유: 마태복음 13장의 ‘돌밭에 떨어진 씨앗’(잠시 견디다 환난 때 넘어짐). 결과: 시험이나 박해를 만나면 신앙을 저버림.
④ 구원에 이르는 신앙(Saving Faith)-성령의 역사로 영혼이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참된 믿음이다. 특징: 지식(지성), 동의(감정), 신뢰(의지)가 모두 포함된 전인격적 믿음. 상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의지함. 비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 결과: 삶의 변화와 행함의 열매가 나타나며 영원한 구원에 이름.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잘 믿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지금은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지 못하고 있다가 때가 이르니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 ‘믿음 줍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신앙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름만의 신앙이다.
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를 보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할 때에 아주 신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제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실되다고 아는 참된 지식이며 또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전적인 신뢰는 복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내 안에 창조하신 것으로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남들과 함께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믿음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본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실되다고 아는 참된 지식’이다. 이 말은 많은 교인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리된 교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짧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알아야 하는 것인데, 이어지는 22문과 23문을 통하여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이요, 그 핵심은 ‘사도신경’이라고 알려준다.
제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 복음의 요약은 범교회적으로 인정되고 의심의 여지 없는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제23문: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답: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런 내용을 바르게 가르치고, 그것을 잘 깨닫고 믿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한 것이 초대교회였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생사가 달린 심각한 문제였다. 지금도 공산주의 국가와 이슬람 국가들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붙들고 나아갈 때에 얼마나 엄중하고 떨리는 일인가. 그런데 이런 확실한 검증도 없이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하여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은 교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무너뜨리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교회 안의 상당수의 교인들은 이러한 확실한 지식의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교회의 생활만 익숙하게 잘하는 종교인들의 삶을 산다. 이런 분들 중에서 ‘순교자의 소리’니 ‘오픈도어스’를 통하여 전해지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핍박과 순교의 상황에서도 사도신경에 나타난 신앙을 고백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4.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에 자기의 전한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바울 사도가 살던 때나 오늘날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 밖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이 있고, 심지어 신학교 교수나 교회의 목사들 중에도 많이 있다고 한다.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기독교인이라는 자들이 믿는 종교적인 지식이나 환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마 자기들이 생각해 낸 새로운 구원의 방법이 많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굳게 붙들고 있다가 결국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무서운 선언이 연상된다. 왜 믿음이라는 세계에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5. 삶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의 증거가 드러나야 진정한 믿음이 되며, 자신에게는 확신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도의 기회가 된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십자가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낮아짐이요, 죽음이다. 십자가는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죄수를 처형하던 잔인한 형틀이었고, 가장 비참하게 모든 명예를 잃고 죽는 저주와 수치의 표시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때는 이러한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를 흘려 죗값을 치렀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헌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부터는 내 삶에서 나를 부인하고 내 고집과 욕심을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 기꺼이 헌신과 순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조금도 양보할 줄도 모르고, 용서할 줄도 모르며, 자기의 뜻과 욕망만 관철하려고 한다면 그의 신앙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내주어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고, 자기의 것은 조금도 주려고 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며, 교회에서도 무엇인가를 받고 누리기만 원한다면, 혹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인정해 주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된 교인은 없으니 생활에서 보이는 부족한 것을 토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화가 없고, 오히려 더 자기 주장이 강해지고, 더 섬김만 요구하며, 다른 사람과의 화평이나 교회의 질서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의 소유자라고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좋아하며, 세상의 문화와 풍습을 좇기를 즐거워한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서 더 많이 누리고 살기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고백과 일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는다는 사람들이 상대하기가 더 힘들고, 그들이 더 고집도 세고 자기 욕심만 챙긴다”는 말을 듣는다면 과연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의 고백이 진실한 것일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지금 내 삶에서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가 되었다(엡 2:5-6).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에게 역사하셨던 이 부활의 놀라운 능력이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2:19-22)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의 부활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도 부활을 믿고, 그 부활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나누는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를 잘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3-27)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안다고 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신다. 이미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요 5:24),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며(롬 1:16-17; 3:24),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빌 3:20),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요 1:12; 요일 3:1). 물론 아직 영화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부족과 허물이 있고 가끔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꾸준히 장성해가면서 부활의 생명력을 더욱 드러내고, 하늘나라의 삶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드러낸다. 이전에 보여주던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과 좌절과 원망의 모습에서 해방되고, 기쁨과 평안과 담대함과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서 나오는 따뜻한 친절과 용서와 봉사와 섬김과 찬송의 모습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의 눈은 하나님께 향하지 자기 자신에게 향하지 않고, 그의 발걸음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간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장차 우리가 갖게 될 온전한 신령한 몸이다.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고귀한 상태의 몸이요, 천사라도 허락받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은혜로 받은 선물이다. 그것을 지금부터 맛보며 살게 하시는 은혜를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너무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의미를 깨달은 자는 그 삶이 완전히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고백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이 고백을 하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을 자신에게 제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니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모든 교인들이 이런 믿음을 고백하며, 이런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확실히 드러나며, 주께서 구원받는 자들을 날마다 더해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