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글쓰기 16-19 Sei allem Abschied voran(2023.10.19)
새벽까지 가을비가 거세게 내렸다. 아직 다 쏟아내지 못한 하늘은 사방을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물기 가득한 가을 아침 속을 걸으며 나는, 며칠 전 안문영 선생님과 함께 읽은 릴케의 시를 떠올렸다.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마치 이별이
네 뒤에 있는 것처럼, 막 지나가는 겨울처럼.
겨울 중 어떤 것은 끝없는 겨울이라서
겨울을 나며 네 마음은 그냥 견뎌야 하리니.
언제나 에우리디케 안에 죽어 있어라, 더 노래하며 올라가라,
더 칭송하며 순수한 연관 속으로 돌아가라.
이곳,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쇠락의 왕국 속에 있어라,
울리는 유리잔이 되어라, 울림 속에서 이미 깨져버린.
존재하라 -- 그리고 동시에 비존재가 그 조건임을 알아라,
너의 내밀한 진동의 무한한 근거를 알아라,
그리하여 네 진동을 이번 한번에 완수할 수 있도록.
충만한 자연에서 써버린 것과 묵묵히 말 없는
비축분,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총합에
환호하며 너를 더하고 숫자는 없애버려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창비> -
Sei allem Abschied voran, als wäre er hinter
dir, wie der Winter, der eben geht.
Denn unter Wintern ist einer so endlos Winter,
daß, überwinternd, dein Herz überhaupt übersteht.
Sei immer tot in Eurydike --, singender steige,
preisender steige zurück in den reinen Bezug.
Hier, unter Schwindenden, sei, im Reiche der Neige,
sei ein klingender Glas, das sich im Klang schon zerschlug.
Sei -- und wisse zugleich des Nicht-Seins Bedingung,
den unendlichen Grund deiner innigen Schwingung,
daß du sie völlig vollziehst dieses einzige Mal.
Zu dem gebrauchten sowohl, wie zum dumpfen und stummen
Vorrat der vollen Natur, den unsäglichen Summen,
zähle dich jubelnd hinzu und vernichte die Zahl.
- Rainer Maria Rilke, <Die Sonnte an Orpheus> Ⅱ-Ⅷ -
2018년 겨울 쾰른에 있는 어학원에서 공부할 때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물었다. 독일어를 왜 공부하냐고. 음악 미술 체육 등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나이든 아줌마가 독일어 기초반에서 공부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책을 읽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 내게 또 묻는다면 역시 '책을 읽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거다.
내가 낼 수 있었던 최대한의 시간인 90일 동안 독일에 머물며 독일어 기초를 배우고 돌아와 정말 멋진 선생님들께 '독일문학'을 배울 수 있었다. 괴테, 귄터 그라스, 브레히트...... 그리고 릴케!
안문영 선생님께 릴케의 시를 배우게 된 것 (현재 진행형이다)은 올해 내가 누리는 행운 중 하나이다. 다른 것과 달리 시는 이해가 아니라 공감을 해야하는데 외국시는 어려웠다. 번역하신 분들은 자신들이 공감하고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독자에게 전하려 애썼겠지만 은유와 상징 그리고 운율이 있는 시를 번역본으로 공감하기는 힘들었다.
<두이노의 비가>를 읽은 첫 시간에 나는 그 시가 갖고 있는 넓고 깊은 무엇에 압도되었고 또한 매료되었다. 그리고 어려워서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선생님과 함께 <두이노의 비가>를 읽는 시간은 끝났지만 여전히 그 언저리의 언저리의 언저리만 서성일 뿐이다. 그래도 좋았다.
지금 읽고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제 가끔은 공감하고 찬탄하며 읽는 부분도 있고 오늘같은 날은 생각나서 다시 펼쳐보고 중얼중얼 읊조리는 부분도 있다.
"Sei allem Abschied voran, als wäre er hinter/dir,".
임홍배 선생은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 마치 이별이/네 뒤에 있는 것처럼,"(<모든 이별에 앞서가라/창비> 239쪽)이라고 번역하셨다. 염승섭 선생은 "이제 막 지나치는 겨울처럼 모든 작별에 앞서/있어라"<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부북스> 189쪽)이라 번역하셨다. 더 이상 어떻게 번역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좋은 우리말 번역본에 더해 원어가 주는 느낌을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 내가 떠올리는 '이별'이라는 단어의 느낌은 슬프고 애잔하다. 눈물을 기본 장착하고 맞이해야 하는 것이 기본 정서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별'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밖에 없는 독일어 단어 'Abschied'에서 내가 받는 느낌은 다르다. '압쉬트', 압에 강세를 넣고 발음하면 이 단어에서는 결기가 느껴진다. 새로운 시작으로 출발하는 작별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네 진동을 이번 한번에 완수할 수 있도록' 살았던 이가 누릴 수 있는 어떤 것 같다. 이것도 역시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렇게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놨지만 사실 별 얘기는 아니다. 안문영 선생님과 릴케의 시를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말이고, 오늘 같은 날 릴케의 '모든 이별에 앞서가라'와 ' Sei allem Abschied voran'을 함께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얘기고, 그러므로 릴케의 시가 좋아졌다는 얘기다.
'책을 읽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그럴 수 있어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