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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의미를 느껴라!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를 읽고 / 이민숙
어이없다, 인간에게 태어남이 굴레라니.....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의 세계관은 자신의 삶, 즉 경험을 통해 뭔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것도 까마득히 잊혀져버릴 유년의, 태어남의, 사회적 그물들의, 또한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거의 모든 것! 배움, 사랑, 결혼, 욕망, 경제적 자립, 가족, 이웃, 성공, 직업, 죽음......그리고, 육체적 장애 즉, 굴레라는 어떤 것!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질문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의 세계관과 몸(Maugham)의 세계관은 얼마나 서로 공감할 수 있을까. 샘뿔인문학연구소에서 함께 이 책을 읽었던 악동클럽 회원들은 말한다. ‘그래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난해하지 않았고, 친절했다. 작가의 이야기 방식에 동의하며 읽을 수 있었다. 재미있었다.’
서머싯 몸의 자서전 격인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필립이다. 필립은 타고난 스스로의 육체적 굴레를 걸머진 어린 영혼이다. 순수하다 못해 바보 같은 남자, 어떤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무수히 많은 상처를 덤으로 받고, 그 상처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보는 소심한 인간이다. 그를 향한 우정은 더불어 행복한 관계가 아니라, 더불어 굴레를 만들어내는 굴레에 익숙한 일상들이다. 일상 속의 인물들도 서로의 굴레를 서로에게 투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피사체들은 단순히 굴레일 뿐인가? 작가의 앵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시점에서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까?
“행복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일치를 보지 못 했으며, 현자들과 대중이 제시하는 설명은 완전히 상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해석방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똑같다고, 아이가 웅변하는 손을 번쩍 쳐들며 “외칩니다!”하고 말하듯이 강조하고 싶은 지금이다. 어떻든, 우리가 겪어야 하는 세계는 전혀 뜻밖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삶의 외형적, 내면적 그물망을 짜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객관성이란, 애시당초 존재할 수 없는 어떤 도그마인지도 모른다. 누가 어떤 것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고 한들, 그것이 모든 생명의 인식의 평균율을 보여줄 수 있다고? 그것이 위대한 철학자의 촌철살인의 언어라고 해도? 그러나,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세상은 서로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공감’만이 우리의 어지러운 철학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징검다리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묻는다. ‘굴레(Bondage)’라고 한 작가의 개념적 언설은 과연 무엇을 총칭하는 것일까.
일단 그에게 공감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굴레는 ‘신체적 장애’이다. 절름발이! 그는 그 때문에 동심을 유린당한다. 그 누구도 그 굴레를 눈감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수치스러운 그 발을 통해 수없는 놀림을 당하고, 스스로 극복하지 못할 유년의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고 만다. 불운한 출생과 함께 따라온 신체적 굴레란....얼마나 커다란 굴레인가! 부모도 없이 살아가는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보통의 영역은 아닐 수도 있지만, 또한 상당히 흔한 상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만, 가엾구나! 하는 정도. 가슴 아픈 일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할 존재들에게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필요악’이라고 했던 내 얕은 인식의 어느 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그에게 또한 ‘사랑’은 풀리지 않는 굴레다. 왜일까.....인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정욕적인가. 그 정욕의 극복과정이 허락되지 않는 청춘의 시절이라면 사랑 역시 굴레일 수도 있겠다. 여자와 남자, 만남과 만남의 씨줄 날줄이 팽팽하게 아름답게 균형을 이루며 진행하는 일상이라면 무에 걱정인가. 그러나 어찌 그렇게 살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만나는 여자들은 때론 순수하고 때론 아름답고 때론 구차하다. 설렘과 따스함과 감미로움이 사랑일 듯한데, 필립에게 사랑이란 무수한 굴욕적 순간들의 벽과 같은 답답함, 육체적 정욕에의 패배감, 가난한 여자에게 책임져야 할 경제적 부담까지.....왜 인간은 사랑과 같은(?) 끝없는 역설의 길을 걸어가야 할까? 하는 물음 앞에서 자유스럽지 않은 필립의 삶! 그와 다르지 않은 우리들의 삶!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은 인간에게 있어서 음양의 조화로써 풀어버릴 물음과 절벽의 상황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것 아니고 풀 수 있는 방식은 없다!라고 했다. 그러한 감각적 세계를 확보하면 모든 문제는 자동해결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음과 양이 서로 조화로운 환희의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시공간적 영역은 얼마나 까다로운가! 그건 너무도 환상적인 어떤 조건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를 감싸 안은 우주적 에너지까지를 필요로 하는 일련의 사태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아와 자존으로부터 시작하여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때론 스스로의 자존을 포기하거나 위험천만한 도전도 담보할만한 이타적 사랑의 범주까지 해결할 수 있어야 그 능력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사랑의 굴레! 사랑이라는 무한 영역! 영원히 풀기 어려운 숙제라고 느끼는 중생들의 고뇌가 그 시점에 존재한다 할 것이다.
그의 굴레는 또한 삶의 여건을 마련해야 할 능력, 즉 직업과 경제력이다. 고아일 뿐인 그는 후원자인 백부의 기대감을 일찌감치 버림으로써 종교적인 굴레를 벗어난다.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중세의 암흑을 형성하면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회체계의 억압적 기제였음을 우리는 이 작품 속에서도 예외 없이 발견하게 된다. 종교적 자유! 그러나 그 벗어남의 사건은 또한 그에게 경제적 후원을 해야 하는 백부와의 관계를 갈등관계로 맺어버림으로써 또하나의 굴레를 만들고 만다. 스스로 마련해야 할 대학 등록금이나, 생활비 문제, 설상가상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에게 끝없는 경제적 부담을 지우고 살아가는 연인 ‘밀드레드’와의 동거, 그녀의 파렴치한 외도 또는 이기적 태도,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녀를 떨치지 못 하는 일상 속의 비굴함, 사랑인지 비통인지 모르게 얽히고설킨 수 년의 가난한 생활....그런 와중에 그녀와의 사랑도 파경을 맡게 된다. 절망 속에서 급기야 백부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인간의 비애, 그렇게 백부는 죽고 그는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어느 시점에선 안정기로 접어드는데......그 평화의 시점, 필립은 인생 전반을 응시한다.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굴레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그리고 지금의 홀로 된 한 존재에 대하여......정신적 자유까지는 이르지 못할망정, 그에게 삶이라는 가시울타리는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할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접하게 된 친구 ‘헤이워드의 죽음’을 접하면서 필립은 깊은 상념에 잠긴다. 유능했으며 미래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차 있던 헤이워드, 어쩌면 그에겐 부러움과 경건의 대상이었던, 그러나 아무 것도 이루지 못 하고 조금씩 조금씩 실패자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만 헤이워드, 하잘 것 없는 병으로 맞이한 그의 죽음! 태어나지 않았던 것보다 나을 바 없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필립.
필립은 자문한다. “도대체 살아서 뭐 한다는 말인가?” 얼마나 허망한 삶인가? 고통과 병과 불행의 비중이 너무 무거운 삶! 그의 상념 속에서 명백한 답변 하나,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주를 돌고 있는 별의 한 위성 지구 위에서, 이 유성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조건에 영향을 받아 생물이 발생했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탄생했듯이 그것은 다른 조건 아래에서는 끝장을 볼지도 모른다. 다른 생명체보다 하등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 그 인간도 창조의 절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물리적 반응으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립은 동방의 현자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떤 왕이 인간의 역사 전체를 관망하고 싶어 그 장구한 경험들을 정리하라고 명령한다. 그 명령을 받은 현자는 오백 권의 책을 통해 정리하고자 했으나 불가능해서, 다시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왕에게 가져간다. 그러나 왕도 현자도 늙어가는 와중에 그도 너무 많아 읽을 수가 없게 되자 한 권의 책으로....그러나 또한 그동안의 세월에 피하지 못할 병으로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마저 읽을 수 없게 된 왕! 마침내 단 한 줄로 줄여 말하라고 명령한 임금에게 그 현자는 말했다지 않은가.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사람의 삶이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무의미의 의미부여에 따른 결과다. 삶이 무의미하다면, 이제까지 박해한다고 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을 가져버렸다는 필립!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면, 실패도 성공도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아! 삶이여 그대의 독침은 어디에 있는가?”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짜는 행위에 대해 은유적으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우리에게 삶의 양탄자 짜기 놀이를 제시한다. 그것(삶)이라는 하나의 예술품!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뿐인 양탄자 같은 삶. 그저 하나의 예술품! 인간의 죽음도 그 예술품을 보며 마지막을 맞이하는 그 이상의, 어쩌지 못 할 운명적 길, 한없이 걷고 있을 뿐인. 우리는 죽어 사라지지만, 그러나, 그 살아있음의 아름다움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란다. 비로소....행복한 필립!
세계의 현상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인식의 폭인 경험철학을 선물한 영국에서 태어나, 그 철학적 삶을 교육받으며 살아왔을 서머싯 몸! 존 로크를 비롯한 또 한 세계의 거장인 다윈의 나라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생물학적 인식 체계를 나는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문장 곳곳에서 우리는 그러한 패러다임으로 안내 받는다. 소설의 진행과정 속에서 아무런 구성의 묘도 없이 잔잔히 서술된 일생의 굴레들은 발단이니 전개니 절정이니 결말이니.....그러한 플롯의 한계를 일찌감치 뛰어넘어 버렸던 것이다. 삶은 그저 진행형인 일상의, 경험의 오롯한 세계일 뿐! 그러나 그 엄청난 경험철학의 세계관이 극복하기 어려웠던, 세상을 비극적이고 굴욕적으로 살아내야 했던 그 시대의 인생들! 가난과 전쟁의 경험들은 그야말로 ‘경험’을 끝까지 밀고나갔던 존 로크의 ‘경험론’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한계가 분명한 철학적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끌어당겨야 했던 ‘무의미의 생’에 대한 해결방식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절실한 이념이 아니었을까? 그 철학의 해결책이 싯달타와 닿아있다면 내 억측일까? 경험이냐? 추상이냐? 실존이냐? 무(無)에 대한 무한상상력이냐? 영국적 또는 영미문학적 공간 속에서 찬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서머싯 몸의 소설 영역은 그러므로 그들의 경험철학의 한계를 무의 동양적 삶의 해탈방식과 함께 해결함으로써 설득시켜버렸던 통쾌한 끝내기 홈런이라고 나는 결론지으려 한다.
그리하여 한 여자, 셀리를 사랑하게 된 필립은 굴레인 스스로의 삶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지난 날의 기나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필립은 자신의 과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삶을 그처럼 힘들게 만들었던 불구도 받아들였다. 불구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음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불구 때문에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내면 성찰의 힘을 기를 수 있었음도 아울러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조롱과 멸시를 엄청나게 받아왔지만 그 조롱과 멸시는 그의 정신을 안으로 향하게 했고, 영원히 그 향기를 잃지 않을 정신의 꽃들을 피워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몸에든 마음에든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알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온세상이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까닭이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은 불구이고 마음은 비뚤어진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한 가지 분별 있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고 잘못은 참아내는 일뿐이다.......”
비극성이 비극일 뿐이라면 인간의 삶은 애시당초 살아낼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비극은 비극이면서 열락의 한 씨앗이요, 비극이면서 기쁨과 행복의 한 도구이며, 비극이면서 가슴 속에 애절하고 따스한 사랑을 뿌리내리게 하는 자비의 근원인 것이다. 비극이여 비굴이여 굴레여! 이제 어찌 하려는가? 독자인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경험적 결론은 어쩌면 또다시 뻔해 보인다. 그러나 진정 뻔....한가? 그렇게 쉬운가?
그의 굴레를 굴레답게 만들어버린 필립! 그것은 모든 생명의 일반적 특징이면서 단 한 가지, 그것에 대한 애착과 굴욕을 끊어버리고, 그 때문에 받았던 멸시와 슬픔도 끌어안아버리는 것! 그들이 던져주었던 모멸감까지도 받아들여 좋은 점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밖에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우주다! 그 우주의 가장 빛나는 생명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인간은 저토록 어두운 굴레를 다시 한 번 우주의 빛으로 환생시키는 일을 담당해야 할까? 그때, 인간은 그 어떤 어둠도 밝힐 수 있는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까? 참 지당하면서 외경스러운 질문이면서 해법이다. 사랑이란.....굴레를 벗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굴레를 끌어안고 함께 뒹구는, 굴레의 하루를 즐길 수도 있는, 굴레인 열락을 텀벙거리는 이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의 바닷속 애무인 것이다. 그 애무의 대상이 누군들, 무엇인들 시원하고 감미롭지 않으랴! 그 애무만이 음양의 조화와 더불어 환희의 완성에 이르는 사랑이라는 화엄세계라 할 것이다.
첫댓글 굴레를 끌어안고 함께 뒹굴 수 있을까요
굴레가 무서워 손 내밀기조차 버거운데... 외면하고 있는 일인입니다ㅠ.ㅠ
삶은 굴레같지만 또한 굴레를 통한 극복의지도 선물로 받지요. 아이들도 부정적인 굴레를 느낄 때는 소심해지지만, 성장과정에서 남다른 용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지요....굴레의 인간화. 용감하게 직시하기~ 신적인 용기.....즐거운 긍정....
잘 읽었어요. 아름다운 리뷰네요. 저도 악동 클럽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생각을 해보았네요. 순천에서 전주로 이사오면서 그 가능성이 배는 더 멀어졌지만요. 하하. 잘은 모르지만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 대한 성찰과 긍정은 장 폴 샤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존재는 우연의 산물일뿐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기에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것이 유의미하다'는 역설적인 해석(강신주)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인간은 이미 본질이 정해진 사물과 달리 자기 삶에 있어서 스스로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로운 존라는 거!! 오늘 만나네요!!
좋은 이야기 공감합니다.
인생은 무에요 다 허무 한 거죠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 그저 행동일 뿐이에요 세상에 선과 악이 어디 있답니까? 그것 다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거에요..... 내가 누구를 터치 했어요.. 생각하기에 따라 쓰다듬었다고 여길 수 있고 때렸다고 여길 수 있잖아요.. 다 그런 거에요... 다만 그런 부질없는 우리의 사고로 좋은 의미를 만들고 좋게 생각하려고 스스로 세운 것이 선이고... 그것아닌 것은 죄라고 이야기 할 뿐인데.. 보다 더 고차원은 이미 선과 악을 탈피해 그 모든 것 앞에 무 속에 들어 서는 것........ 원래 모든 것은 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