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 춤추는 사자성어 유감(최영록)
최영록(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연말연초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레퍼터리중 하나가 ‘사자성어’(四字成語)이다. 세칭 지식인이라는 교수들이 가는 해와 오는 해의 한국사회를 풀어내는 사자성어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는데, 이게 좀 문제라는 생각이다. 언제 한번 듣도 보도 못한 사자성어를 ‘4서 3경’같은 고전(古典)에서 잘도 찾아내 현학(衒學)을 한껏 자랑한다.
<소모적인 분열 갈등양상 반영한 사자성어들>
하여튼 교수신문 일간지 등에 칼럼을 쓰는 교수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지난해에는 ‘상화하택’(上火下澤․아래는 연못인데 위에는 불이 타고 있음)이 1위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주역(周易)에 나온다는 이 말은 서로 분열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로 끊임없는 정쟁, 행정도시를 둘러싼 비생산적인 논쟁, 지역 및 이념 갈등 등 우리 사회의 소모적인 분열과 갈등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그 다음을 차지한 것이 ‘양두구육’(羊頭狗肉․양머리를 대문 앞에 달아놓고 개고기라고 속여 팖)으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위선이 그 어느 해보다 많이 드러났음을 비꼬는 것이라 하겠다. 반성할진저!
3위로 뽑힌 게 ‘설망어검’(舌芒於劍. 혀는 칼보다 날카롭다)인데, 정제되지 못한 언어가 난무한 한 해를 촌철살인으로 지적한 것이리라. 그 다음은 상대방의 작은 허물을 찾아내 비난한다는 뜻의 ‘취모멱자’(吹毛覓疵), 힘을 써도 공이 없이 헛수고만 한다는 뜻의 ‘노이무공’(勞而無功)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뽑은 사자성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대안이 없는 비판과 비난만 있으면 뭐하냐는 게 생각이 앞서거니와, 대부분 한글세대인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런 사자성어는 어쩐지 생뚱맞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며칠만 지나면 언중들이 금세 잊어버릴텐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기도 하다. 2004년말에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목소리의 당을 만들어 다른 파를 공격함)였는데, 지난해에 얼마나 개선되었을까.
<“작은 생선이라고 굽는데 함부로 뒤집지 마라“ >
그런 가운데, 새해 정치 사회 경제 등 각계의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가 최근 각신문에 돋보이게 편집돼 눈길을 끌었다. 교수들이 뽑은 새해의 소망은 ‘약팽소선’(若烹小鮮)이다. 천학비재(淺學菲才)한 필자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은 들어봤어도 당연히 금시초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노자(老子) 60장에 나오는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의 줄임말로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작은 생선을 요리할 때 너무 뒤적거리면 본래의 모습이 어그러지므로 진득하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잘 하려는 의욕이 넘쳐 너무 흔들어 되레 일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한 말이라 하겠다. 어려운 한자이긴 하나 틀림없는 비유이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경계를 이르는 게 아니겠는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도 떠오른다. 우리는 늘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기에 귀가 엷다. 그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말은 아닐까.
그 다음에 꼽은 성어는 더욱 어렵다. ‘회황전록’(回黃轉綠), 초목이 겨울에는 누렇게 물들어 떨어지지만 여름이 되면 다시 푸르러진다는 뜻이다. 인화위복(因禍爲福)이 그 다음을 잇는데 때를 잘 이용만 하면 재화도 복리가 된다는 뜻으로, 국가가 처한 위기를 잘 극복하는 슬기를 발휘하자는 다짐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뒤를 잇는 노마지지(老馬之智)는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본받을만한 지혜가 있다는 뜻인데, 격화되어가는 듯한 이념갈등에 대한 우려를 담은 듯 하다.
<눌언민행 천지교태 선흉후길의 정치판 기대>
말 잘하는 정치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나 보다. 장관으로 징발당한 여당의 한 대표는 ‘눌언민행’(訥言敏行)이라는 성어를 선보였다. 군자(君子)는 말을 과묵하게 하고 자기 개혁이나 선행에는 민첩해야 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중 한 대목이다. 한국의 정치판과 정치인들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실현불가능한’ 소망을 품고 있다고 하겠다. 입 재바른 청와대도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비서실장이란 분이 ‘천지교태’(天地交泰)를 화두로 들이대고 나선다. 하늘이 땅이 화합을 이루는 상태를 그 누가 마다할 것인가. 희망사항이 실천사항이 되기를 빌고 빌 뿐이다. 가장 재미없는 것은 어느 전직대통령의 ‘민주주의’라는 덕담이다. 이런 하나마나한 화두는 아예 활자화를 하지 않으면 안될까.
수십년동안 정치판에서 ‘몽니’(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부리는 성질)를 부린 분의 좌우명은 ‘상선여수’(上善如水)였다. 노자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 이 정도는 돼야 품격이 서지 않겠는가. 압권은 역시 현직 대통령이다. ‘처음은 나빠도 나중엔 좋아진다’는 '선흉후길'(先凶後吉). 역시 그다운 소망이다. 필자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비록 빌빌거리지만 퇴임때쯤이면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어서는 등 장밋빛 청사진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경제 양극화’ 극복하고 감성․문화경영 펼치도록>
이래저래 유식은 점점 더 새끼를 친다. 기업 대표들도 한 마디 안할 수 없다. 지난해 경영환경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사자성어로 CEO들은 경제 양극화를 빗댄 ‘운니지차’(雲泥之差)를 꼽았다. 구름과 진흙처럼 차이가 매우 크다는 뜻이라는 데, 안성맞춤의 단어를 찾아내는 달인들같다. 그 다음이 급어성화(急於星火)인데, 별처럼 매우 급하고 빠르다는 뜻이다. 급변하는 대내외 경제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스피드경영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된 터라, 무협지식 단어를 꼽았을 것이다. ‘미감유창’(美感柔創)도 보인다. 아름답고 감성적이며 유연하고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감성경영, 문화경영의 의지를 엿보는 듯하다. IT업계의 올해의 최대 화두는 경쟁력인 모양이다. ‘숙아유쟁’(熟芽遺爭), 싹은 튀웠으나 쟁점으로 남는 것들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일 터. 국세청 책임자는 ‘극세척도’(克世拓道․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를 부르짖는다.
어찌 됐든 사자성어 만들기도 경쟁이 붙은 듯하다. 최소한 이 정도는 박식해야 교수도 하고 정치도 하고 기업도 경영하는 것일까.
<쉽고 낯익은 ‘희망 단어’로 한 해가 시작되었으면>
한자권문화인 동양 3국에서는 요때쯤만 되면 1년을 압축하는 낯선 단어들이 지면에 춤을 춘다. 중국의 올 한해 외교키워드도 압권이다. ‘화자위선’(和字爲先). 평화, 조화를 우선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숱한 분쟁과 갈등은 가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하는 국제사회가 되는데 ‘대국’이 ‘약팽소선’ 정치로 앞장서 주면 좋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상상력과 창의력에 있어 우리보다 좀 뒤떨어진다는 생각이다. 고작 생각해내는 사자성어가 ‘우정객자’(郵政客刺) ‘전국정파’(全國政波)이다. 부시에 버금가는 ‘정치조폭’ 고이즈미의 활약상을 빗댄 말인데, 우리에게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신사참배를 하거나 말거나 독도는 우리땅이다.
좌우지간 내년 이맘때쯤이면 우리 귀에 익숙한 성어가 선을 보이면 좋겠다. 뭐 이런 것 있잖은가. 금상첨화, 휘황찬란, 아기자기, 통일위업, 세계우뚝, 전도양양, 승승장구, 일취월장, 일석이조... 뭐 이런 것 말이다. 휘-휘-휘 휘파람. 아리아리 꽝!(백기완선생식 응원 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