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에 대한 표랑漂浪속 사랑의 정처 定處
-김명인 시집 《여행자 나무》
박철영
김명인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여행자 나무》를 읽어가며 끝없이 변화되어가는 시의 정처가 사뭇 궁금했다. 시인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는 항상 다른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른 곳은 세상의 것들이지만, 보이는 곳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눈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풍경 속에 숨어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놓지 못한 시의 세계는 다름 아닌 사람으로 인한 긴 그리움의 변주다. 그런 시인의 관점은 사람에 대한 끝없는 표랑漂浪 속 사랑이었고 그리움이란 것을 알았다. 김명인 시인의 시의 출발은 어찌 보면 자신을 낳아준 고향과 불우했던 시절 어머니 곁에 있지 못했던 아픔에서 기인한다. 시인이 한때지만, 고아원에 맡겨져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청년이 되어서는 일자리를 찾아 동두천을 찾아가게 된다. 길지 않는 기간 시인은 동두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낯설지 않은 과거 속 풍경과 맞닥뜨리고 만다.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잠시 잊고 지냈던 과거를 되짚어내는 삶의 중대한 계기가 동두천에서 비롯된다. 상처가 있는 시인보다 더 아픈 또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곧 지금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내를 김명인 시인은 《東豆川》후기에서 담담히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안개에 묻힌 막막한 한 시절이 더없는 괴로움으로 다시 떠오를 적마다, 나는 나를 묶는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유년 시절의 추위와 주림, 동두천에서의 쓰라렸던 경험, 그리고 월남전의 체험까지도 나는 나의 앞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도록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더욱 불가해한 고통의 뿌리에 나는 닿아갔고, 스스로를 확인하는 괴로움 속에서는 시를 선택한 것까지를 포함한 수 없는 뉘우침이 왔다.《東豆川》후기
그런 동두천에서 성장기 체험에 의한 과거 속 고뇌가 온전히 살아났고, 이십 대의 청년에게는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멍에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고통을 유발하였던 시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런 질곡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길밖에 없음을 이미 시인은 알고 있었다.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그 정처는 김현이 시인의 시 세계를 규정한 “더러운 그리움”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미 김현의 평문에서 인용된 “더러운 그리움”은 그리움에 수식된 수식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그 본래적인 의미는 보고 싶어 미치도록 사무친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에 그렇다. 김명인 시인의 시적 출발은 바로 “더러운 그리움” 같은 가슴속 원죄를 지워가는 자기 부정의 과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더러운 그리움”은 역설적이지만, 시인에게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닌 사무치도록 애절함의 본말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시인의 심정적 시어는 그리움이고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반어적 시의 행간을 따라가며 김명인 시인의 사람에 대한 속 깊은 표랑漂浪의 정처定處일 그리움에 닿고자 한다. 그리움의 시작은 아픔에서 비롯됨을 환기 시킨다.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성을 받아 비로소 李가던가 金가던가
朴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갓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强辯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 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 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東豆川 4>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라며 항변하는 아이를 떠올리며 무언중 시를 통해 혼혈 아이의 심정을 이해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모태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희망이 되어주는 삶도 있지만, 혼혈 아이처럼 팽개쳐진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도 있다. 그런 혼혈 아이들은 태생적 고난을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를 이미 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을 낳아주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야 했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브라운이라는 아이. 비록 버림받았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잊혀야 하는 대상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통스러워도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 하기에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동두천은 전쟁 통에 만들어진 도시다. 전쟁은 온전한 것들을 파괴하여 필연적으로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상처투성이인 동두천에서 6개월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한동안 잊고 지낸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 교실에서 만난 동두천 아이들의 슬픈 눈은 과거 속 시인의 눈과 똑 닮았다. 그런 아이들은 언제든지 어디론가 훌쩍 떠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필연적으로 떠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절박한 아이들을 냉혹하게 외면할 수도 없었다. 떠나고 싶어도 쉽게 떠나갈 수 없는 그들은 혼혈아와 고아들이었다. 망연하다. 이 땅의 아이들이 아닌 세상의 비루한 아이들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브라운이 되지 못하고 李가나 金가라고 불려져야 할 아이들이다. 그들의 눈 속에는 꺼지지 않는 그렁그렁한 네온이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그럴수록 환하게 빛날 수 없는 어둠 같은 아이들이었다.
<東豆川 1>에서 시인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게 된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내 급한 생각으로는 우리들도 어디론가/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과 또 그 무리에 속한 자신을 보았다. 떠나가되 누군가를 찾아가는 그 사람들의 가슴이 닿는 곳을 상상하고 있다. 창밖에 내리는 눈 때문에 마음 시린 것이 아니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는 누군가와 함께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 마음 시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픈 것이다. 시인은 동두천을 오가며 수시로 기차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눈이 유독 많은 경북 울진과 닮은 동두천은 삼월까지도 눈을 볼 있다는 곳이다. 옹크리고 있는 또 다른 세상 속에 내팽개쳐지듯 버려진 아이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신의 과거가 딱 그랬다.
<東豆川 3> 중에서 “떠돌아와서 먼저 자리잡아도/뿌리 없긴 마찬가지인 사람들처럼 그곳에서도 우리들은/어차피 뜨내기였다 우리가 가르쳤던 고아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각오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東豆川 2> 중에서는 “월급 만 삼천 원을 받으면서 우리들은/선생이 되어 있었고/스물세 살 나는 늘/마차산 골짜기의 허둥대는 바람 소리와/쏘리 쏘리 그렇게 미안하다며 흘러가던 물소리와/하숙집 깊은 밤중만 위독해지던 시간들을/만났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 없던 여학생들을” 보며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이미 떠난 아이들도 있지만, 떠나갈 곳도 없는 아이들을 보며, 동두천 일대 미군 부대 기지촌 문제를 소재로 <東豆川> 연작을 발표한다.
이어 <베트남 1>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두고두고 포성에 뒤집히던 산천도 끝없이/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 부인/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속에서도 가랑이 벌려놓으면/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중략//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어도 비 되어 내리는지/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며 묻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세월을 보냈다. 동두천에서 그것을 보았고 그 아픔이 잠시나마 잊힌 듯했지만, 시인은 또 다시 베트남에 파병이 되어 잊혀진 과거를 또다시 목도하게 된다. 눈앞의 로이를 통해 도진 상처가 오롯하게 살아난 것이다. 살아있는 자만이 가슴에 간직한 “더러운 그리움” 같은 현실을 다시 보게 된다.
<동두천東豆川 1>에서 이미 사용된 “더러운 그리움”이란 시어를 < 동두천東豆川 4>에서 굳이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더러운 그리움”은 고도의 절제된 싯구다. 그것은 삶이 모질수록 그 고통 속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강하게 인식시킨다.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살아야겠다는 그 삶의 주체는 지금의 우리라는 인식으로 궤를 같이한다. 79년에 발간된 시집 《東豆川》을 발표하면서 사회성이 강한 시인 김명인을 문학계는 주시하게 된다. 청년 김명인은 누구도 거론하지 못한 미군 주둔의 폐해와 혼혈 아이들 문제까지 국가와 사회를 향해 책임을 강하게 환기 시킨다. 그동안 혼혈 아이들을 바라볼 때 사회적으로 외면해왔던 통념을 뛰어넘어 우리 아이라는 애틋함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것은 동두천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 아이들의 내면에 감춰진 심정에 다가가면서 시작된다. 남들이 보려 하지 않는 것을 시인은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런 계기는 먼 훗날까지 시인에게 삶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지긋한 세월에 묻혀가는 것이 사람이다. 그럴수록 가슴에 묻힐 수 없는 것이 떠나 보낼 수 없는 그리움이다. 그 대상은 시인과 함께했던 시대 속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
걸음을 못 걸으시는 어머닐 업으려다
허리 꺽일 뻔한 적이 있다
고향집으로 모셔 가다 화장실이 급해서였다
몇 달 만에 요양병원으로 면회 가서
구름처럼 가벼워진 어머닐 안아서 차로 옮기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살 죄다 어디로 갔을까
삐꺼덕거리던 관절마다 새털 돋아난 듯
두 팔로도 가뿐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산중턱 구름 식당에서 바람을 쐰다
멀리 요양병원 건물이 내려다보였다
제 살의 고향이 허공이라며
어제 못 보던 구름 내게 누구냐고 자꾸 묻는다
난 아직 날개 못 단 새끼라고
말씀드리면 머지않아 내 살도 새털처럼 가벼워져
푸른 하늘에 섞이는 걸까?
털리는 것이 아니라면 살은 아예 없었던 것
이승에서 꿔 입은 옷 같은 것
더는 분간할 일 없어진 능선 저쪽으로
어둠을 타고 넘어갈 작정인가, 한 구름이
문득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살>
‘살’이란 무엇일까? 살가움의 따스한 의미망에 포함된 감촉을 상상하게 된다. <살이라는 잔고>에서 처럼 “갓난아기를 안을 때의 눅눅한 살가움”은 시인의 유년기 어머니에 대한 살가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시를 통한 끝없는 그리움의 표랑漂浪은 기어이 어머니의 <살>에 닿고 있다.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 대신 삶의 주체가 되어주던 어머니였다. 어느 날 “몇 달 만에 요양병원으로 면회 가서/구름처럼 가벼워진 어머닐 안아서 차로 옮기다가/문득 궁금해졌다, 그 살 죄다 어디로 갔을까”라며 뒤늦은 자책에 빠진다. 오랫동안 가슴에 새김 된 어머니의 모습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살’은 시인에게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을까. 신체 구조에서 지지력을 담보해주는 필수요소에 한정한 것은 더욱 아니다. 어머니의 ‘살’은 사랑의 원천이다. 강인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그 사랑으로 각인되어 그리워하던 것도 어머니의 ‘살’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가슴으로 안아 감싸주던 살가움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영원할 것 같은 모성의 근원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사랑하거나 그리운 사람끼리는 등을 덧대지 않고 가슴끼리 부대껴야 한다. 늦었지만, 깨닫게 된 그 모든 것이 시간처럼 무심히 흘러가 버려 시인의 가슴에는 깊은 회한만 켜켜이 쌓여버렸다. <오징어 뼈>에서 “폐광되자 광산은 빚만 남겨서/어머니 밥집 닫으시고 다시 허구한 날/막내 업고 장터 떠도시었다”는 가슴 시린 그 어머니다. 김명인 시인의 시의 출발은 어머니의 곁을 떠나 있으면서 갖게 되는 그리움이었다. 모천母川에서 물 냄새를 맡고 떠나 끝없이 바다를 표랑 하다 꿈속에서도 못 잊을 모천母川을 찾아 되돌아가는 연어다. 김명인 시의 궁극은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어머니를 찾아가는 긴 시간의 회귀의 노정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드러낼 수 없는 내면의 간절함이다. 사람에 대한 끝없는 애정은 사람이 아니어도 체험을 통해 인식해내는 삶의 세계다. 그 목마름을 해소하기에는 우물만 한 곳이 없다.
예전의 우물은 마을의 중심이어서
동네마다 공론이 샘솟듯 우물 하나쯤은 갖춰놓았다
누구든지 말은 풀고 소문은 긷고
수다 지나쳐 이끼가 끼면
손없는 날을 받아 두레로 청소를 했었지
우물 밖 동네란 지지리도 가난했지만
제 양껏 기갈 채워도 찡그리지 않는 물낯이 있어
하늘을 축이며 구름도 어루만지며
세월과 함께 느리게 혹은 빠르게 늙어갔지
이제 누구도 그 전설에서 물 긷지 않아
허공 혼자 펼쳤다 거두는 저만의 얼룩
-<우물 밖 동네>에서
찾아갔던 우물은 이미 시인의 과거 속에서 길어 올렸던 우물로 존재하지 않았다. “사라진 동네에 우물이 하나, 지금은/흔적조차 지워져버린/저 오랜 가난 깨우지 마라/사무친 전설들 뼛속 깊이 저며올 때까지”라며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우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사라진 우물은 찾아간 그곳에 실재했다는 사실적인 전언을 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김명인의 시는 어려운 기교나 관념으로 이루어진 시는 아니다. 그러면서 시의 본원인 서정에 가장 사실적으로 근접해 있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도 쉽게 지워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시의 정처에 맴돌게 하고 있다. 그런 이유는 서정적인 자아의 기쁨보다는 내면화된 슬픔이나 아픔이 세계 속에서 부단히 고통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속에 응축된 감정의 암시나 묵인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있다. 우물도 그런 범주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예전의 우물은 요즘의 수돗물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정갈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라버리거나 더러워져 버리는 신성한 곳이 우물이다. 조왕신에게 올리는 새벽 깨끗한 물 한 그릇이 정한수다. 요즘 그런 신성한 우물이 시인 앞에 현존할 리가 만무하다. 이제는 단지 시인이 체험하여 인식하고 있는 세계 속에만 존재하는 상상 속 우물이다.
그런 우물가에도 생생한 삶이 깃들 수밖에 없다. “허공 혼자 펼쳤다 거두는 저만의 얼룩” 같은 가난이 끈질기게 개입하고 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우물 밖 동네란 지지리도 가난했지만/제 양껏 기갈 채워도 찡그리지 않는 물낯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물 속 물은 단순히 화학적으로 수소와 산소의 결합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물 속의 물은 항상 가득했고 그 가득한 우물은 가난과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강인한 지주였다. 우물은 힘들 때마다 시인을 다독여주었던 어머니였다. 우물에 가득한 물은 어머니의 몸을 감싸고 있던 ‘살’과 상통한다. 인체 구조를 감싼 ‘살’이 있어 어머니가 존재했듯 우물도 ‘물’이 있어야 우물이기에 그렇다. 살과 물은 자연적이면서 인간의 모성과 닮았다. 그 ‘살’ 같은 ‘우물’은 가난으로 상처받은 얼굴을 내밀고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뿐만이 아닌 배고플 때마다 우물 주변을 맴돌았던 사람들은 아직도 시인의 기억 속 우물에 모여 있었고, 우물 자체가 주변을 포용하고 있는 인식의 중심이었다. 한때 과거라는 기억 속에서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에는 잊을 수 없어 웅숭깊어진 그리움으로 그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떠올리고 있다. 그것은 날아가는 새들의 대오에서도 그리움을 찾아가는 표랑으로 전이된다.
<악착>에서 “쉬고 있는 공장 굴뚝 위로/웬 연기일까, 다시 보니/햇살과 구름 그늘 헤집는 긴 항렬/철새 떼 지어 날고 있다/어디선가 추위 몰려오는가, 탁발로/고단한 길들이/악착같이 구불거리며/이어졌다 끊어진다, 가난은/함께 끊고 함께 잇는 것/울음소리가 틔워놓는 동절의 하늘로/철새 떼 간다, 한입/이 빠진 식탁에 둘러앉으려” 한다는 시인의 전언이 슬픈 그리움처럼 과거로 떠올려진다. 김명인의 시는 작위적이지 않고 체험적 과거의 생생한 기억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현재의 시점으로 건너온다. 상처는 기억되고 질긴 기억은 시로써 반복되어 절절한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원망도 물에 비친 살가움과 혈의 강에 닿았다가도 이내 물결 출렁이는 송천동의 방죽 가에서 그리움으로 서성인다.
갓난 아기를 안을 때의 눅눅한 살가움
맨살에 닿던 뭉클한 화색을
나는 오래 잊어버렸다
한때 울창했던 숲에 대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리라, 버짐나무여
언제부터 황사 속에 서 있었느냐?
물살에 적셔야 건널 수 있었던
여울목들, 자갈돌 끓어오르는
저녁의 개울가에 젖은 옷가지를 벗어 넌다
거죽과 뼈로 지은 굴피 집
기울고 기운 살의 몰골이 물에 비친다
-<살이라는 잔고>에서
한 해가 저물도록 안부조차 닿지 않는 혈육이라면
혈흔 따윈 뭉개진 지 이미 오래
그래도 명절은 살아 저렇게 핏줄들 잇고 있으니
우리는 아직도 피톨들이 떠미는
혈의 강 건너는 중일까?
베푼 것이 없어 무료나 마름하는 섣달그믐
천 갈래 외로움 천 강 띄워놓고
절연의 밤 어서 지나가길 기다린다
-< 천 갈래 외로움 천 강에 띄워놓고> 에서
어느새 그해 여름 지나고 막막한 가을도 가서
물결은 더욱 차갑게 출렁거리고 인적조차 끊어지면
송천동 아득한 방죽 따라 구름 몰려와
눈 내려 또 한 해 겨울 돌아오던 곳
-<머나먼 곳 스와니 1>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흩어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삼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얻으려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 온 관주(貫珠)꿰어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문장들>에서
<문장들>에서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라고 선언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문장은 인류사에서 가장 고품위의 진리에 버금가는 명제다. 그 참 명제에 도달할 수 없는 고뇌에 시인은 고뇌한다. 무슨 이유일까. 이어 담담히 “쓰지 않은 문장으로 충만했던 시절은 내게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살이에서 “충만했던 시절은 문장을 함부로 쓰지 않던 때였다”로 바꾸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명료해진다.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일 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획을 이뤄 일련의 시들이 기러기 떼처럼 문장을 이뤄 시인의 지난 생애를 건너오고 있다. 어떤 때는 무더운 여름날의 한 소금 바람처럼 기억마저 아련한 생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새처럼 날아오다 문득 물살을 건너는 여울 소리로 변주를 거듭한다. 좌표도 없이 날아오는 새가 아니다. 물길 없이 흘러가는 물살이 아니다. 시인은 부단한 길이 되도록 지나온 길에다 촘촘히 좌표를 그려 넣고 있다. 혼신의 삶에서 막막하도록 지나온 세월을 <살이라는 잔고>에서 “모르는 사이에 사십 년이 꼬박 흘러갔다!”며 아픈 시절의 긴 역경을 떠올린다.
세찬 물살에 몸을 적셔가며 건너야 했다는 과거는 죄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결코 순탄치 않은 것이 분명하다. “거죽과 뼈로 지은 굴피 집/기울고 기운 살의 몰골이 물에 비친”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경에 대한 회한은 원망이나 후회가 아닌 인간애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없이 전화轉化한다. <머나먼 곳 스와니 1>에서는 불우한 성장기에서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송천동 근처 방죽까지 물길을 따라 흘러가고 만다. 어찌 보면 시인의 서정을 관통하고 있는 세계의 출발점인 과거로 향해가는 끊임없는 귀소인지 모른다. 그런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를 통해 끝없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다와 사람 그리고 나무는 끊임없이 시인의 언저리를 맴도는 시의 정처이고 언표다.
철썩이며 부서지는 파도의 실패들
감았다 풀었다 되감는
이것을 놀이라 할까?
태곳적부터 펼쳐놓은 실마리니
파도는 써버릴 무료 무진장 남아 있다
넘볼 수 없는 해발의 아득한 넓이
푸르둥둥한 걸신들이 저녁을 끌고 온다
가장 낮은 현을 건드리는 고요
-<상처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으리>
입 하나 덜려고 동생들 학비 보태려고
식모살이며 가발 공장에 방직기 앞으로 달려갔던
그 때 누님들 어떻게 지내시나 무얼 하며 사실까?
---중략---
독거가 인당수처럼 입 벌린
저 구부정한 세월 속으로
절뚝거리며 건너가는 심청 누님은!
-<심청 누님>
아직 행려의 계절 끝나지 않았다
어디로도 실어 보내지 못한 신생의 그리움 품고 나무의
늙은 가지에 앉아
몸통뿐인 새가 울고 있다
-<여행자 나무>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 소릴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바다의 아코디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은 다양하다. 산촌이나 다를 것 없는 바다가 보이는 울진이 그렇다. 원시적 자연의 시초는 바다다. 그런 바다를 바라보며 성장한 시인의 눈 속에는 원시의 자연 속 바다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원시의 망막으로 바라본 울진의 바다가 그랬다. 그 바다를 <아귀>에서는 “파도가 모래톱을 반쯤 입혔다 벗겨놓는다/철썩이는 갈기로 엎어지지만/꺾이지 않는/차고 빛나는 걸신들의 영원/가장 왕성한 탐식으로/몽돌들은 제 살을 긁는 허기와 마주친다/아무래도 이 공복 채울 길 없다”며 ‘걸신’을 떠올리고 있다. 공복으로 연상되는 바다는 <상처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으리>에서 또 한 번의 ‘걸신’을 불러낸다. 이어 바다는 <심청 누님>에서처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누나를 받아들인다. 태초의 자연은 바다다. 사막도 바다였다. 바다도 사막이어서 그 바다에 원시적 상상력을 부여한 그리움이 자라나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사막을 거쳐 온 여행자들이/잠깐 쉬었다 가는 자리”라며 다독이길 마다치 않는다. 사막을 건너듯 고통을 체험한 모든 이들이 찾아드는 나무는 어머니의 ‘살’이 되어준다.
김명인 시인의 시속에 관통하고 있는 물길 같은 시어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슴 속 그리움으로 수렴된다.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니/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며 못다 이룬 그리움의 내력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것은 오래된 침묵으로 고요해진 적막에 닿기 위한 것이다. <有餘無餘>에서는 “왜 꿈속에서도 자주 거처를 옮겼을까”라고 되묻는다. 과거 언젠가 살았던 집이나 식구들은 시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의 거처에서 맴돌고 있다. 때론 함께하다가도 흩어져버린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시인의 시를 끊임없이 밀고 가는 아득한 바다이고 시인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곳은 언제나 적막 속에 존재한다. “수심에 일렁거리는 건 헐벗은 해조/숨차서 솟구치던 천둥벌거숭이도 어느새/부레를 잃어버려서/잠긴 뒤로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데/그도 구름이 조율하던 바람 무늬였을까/아무리 뜯어도 이 탄금 펼쳐지지 않아서/제 곡조 얻지 못하는 현들의 저녁/날개를 옥죄는 검은 혀의 전족처럼/소스라쳐 깨어나는 한 때의 메아리처럼” 시인의 가슴을 울리는 탄금은 앞으로도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시인에게 ‘살’ 같은 바다는 수평의 고요에 다다랐기에 그렇다.
김명인 시인의 시 세계는 초기 사회성이 강했던 흐름과는 달리 자신과 인과된 인연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이후 김명인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유사하거나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시어들은 시의 정서를 강화시켜주고 있다. 그중 ‘바다’나 ‘적막’은 실존하였던 과거의 주변으로 지면을 넓혀가며 그 끝자락인 어머니의 ‘살’에 이르게 된다. 어쩌면 ‘살’은 김명인 시인이 다다르고 싶은 시의 마지막 정처인지 모른다. 그래서 시인의 가슴속 과거를 통한 배고픔과 역정으로 점철된 애증의 긴 시간은 우리에게 깊은 그리움의 서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첫댓글 대단하네. 평론도 주름잡게 생겼구만. 열심히 쭉 나아가게.
ㅎㅎ
역쉬 그런 방법으로 격려를 한다면
이시인이 맡은 학교에서는 훌륭한 학생들이 많이 나올것같은 느낌~~^^
김명인 시인의 최근의 시와 그 시를 평하는 이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이 아침이 숙연해진다. 글과 사유에 공들인 시간들이 위대해보인다. 나도 열심히 해야겠구나.....고맙다.
형은 자연속에서 주유하여 천하를 도모하시잖아요
형 글 읽으면서 순해지는 법을 저도 배우고 있습니다
@박철영 천하 도모라니? 자네의 포가 많이 세가 많이 세졌네 그려 ㅎㅎ
@안준철 문학적 모반을 말하는거죠
갇혀진 교실을 떠나 열린 자연속을 돌아 다니면서
자신의 지금껏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가는 시간을
난 본거죠
지금껏 가져왔던 의식에 대한 긍정이나
괴리를 재 정립하면서 그게 문학과 삶을 일체화하는 또다른 가치를 확립할것이니
충분히 모반이 맞겠지요
그러니 도모한다는 뜻과 통한거고
전 그래서 포가 세진게 아니고
정성적으로 들여다본거지요~~^^
@박철영 하하 농담으로 해본 말인데 자네 진짜 포가 세네그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