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나도 한마디 ]를 통하여 한 여인이 한국에서 걸어온 인생길에 대하여 적어 보려고 필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 그대로이며 오직 그의 이름만 가명으로 바꾸웠을 뿐이다. 금숙이는 한국에 온지 20년이 넘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금숙이가 걸어온 20년은 그렇게 평탄한 20년이 아니였다 그는 중국에서 남편이 대장암으로 7년남아 병속에서 신음하다 돌아갔다 7년이란 긴세월을 시병원 성병원 마지막에는 북경에까지 돌다보니 집에 있던 몆만원 통장에돈도 거달이 났고 집마저 팔아 뒤를 댔어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끝내 가버렸다. 긴병에 효자도 없고 효부도 없다하였지만 금숙이는 마지막까지도 병시중에 일체를 다하였다 한다. 병시발에 노갈이난 금숙이는 남편의 병으로 일어버린 경제적 손실과 슬하에 남긴 두자식을 생각하여 한국으로 오는 길을 택하였다한다 이제 8살 먹은 아들과 6살 나는딸오누이 형제를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께 맡겨놓고 한국에 온 그는 오던 이튼날부터 건설현장에서 남자들 사이에 끼여 막로동으로 3년을 하였다고 한다 3년의 막로동으로 골병이든 그는 더는 힘든 막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껴진 그는 직업소개소를 찾아 보모를 하겠으니 보모할 곳을 찾아 달라고 신청하였다고 한다 이틀이 지나 소식이 와서 비교적 잘사는 집보모로 들어 갔다한다. 보모라는 직업도 그리편안한 직업이 아니였다 한다 집에서는 사모님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밖으로는 사장님의 입에 맏는 음식물을 구입하여 사장님 입맛에 맞게 잘 하여야 하한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에 모두 맞우기는 매우 힘들었다 한다 때로는 조금만 그들의 비우에 맞지 않으면 잔소리를 한가하나 처다도 보지 않고 차가운 냉끼가 돈다. 조금한그집에 어린자식들도 <아줌마>하면서 이것 저것을 가져오라고 명령적 어조로 말한다고 한다 이럭저럭 그집에서 모든 자존심을 참아가며 반머슴으로 6년을 한달에 90만원 이라는 월급을 받으며 6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제는금숙이 나이도 60이 넘겼다고 한다 보모가 끝나자 금숙이는 간병원이 좋다하여 간병원을 하겠다고 직업소개소에 신청하였더니 한주일지나서 한신경외과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간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이 왔다 한다 금숙이는 소식을 듣고가보니 뇌졸증으로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75세인 할머니 였다한다 금숙이는 그 할머니간병을 맏게 된후 정성을 다하여 간병을 하였다 하루에 한번은 모욕을 시켰고 하루에 몆번식 보는 대소변도 그때 그때마다 기저귀를 바꾸어 깔아 드렸다고 한다 그 효성이 너무나도 지극하여 할머니 자식들은 그를 영원히 쓰겠다고 했단다 그러나 운명은 그렇치못했다 할머니는 금숙이가 마텨아서 3년을 앉으시고 저 0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할머니가 떠나간후 금숙이는 실업자 신세가 되였다고 한다 다시 그어떤 직업을 얻자 하여도 나이가 많다고 모두 거절당하였다 한다. 그동안 시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아이들 남매는 먼 외가편에 가서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금숙이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빠듯이 대여주고 외가 친척에도 조금식 생활비를 부조 하여 주고는 여직껏 번돈은 자기 통장에 넣어두고 아끼고 아겨가며 직업을 찾아 다녔다고했다 그런데 한곳에 가니 이전에 간병인으로 함게께 일하던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고한다 그는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나를 언니라 부르면서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다 그리고는 지금 자기는 금융회사에 다니는데 돈을 저축하면 일주에 20% 리윤을 준다고 하였다 금숙이는 그말을 믿어 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친구는 자기도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는데 돈3천만원을 저축한 것이 지금은10억이 넘어 부평에다 30평되는 아파트 두개나 구매하여 세를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집조까지 보였다. 그걸 본금숙이는 정말 믿어 졌으며 지금 직업도 없이 할일이 없으니 그 일이 좋을 것같아 그래도 의심이 들어 작으만이 백만원을 넣었다 한주가 지난후 예정 날자에 통장에 20만원이 들어왔다. 금숙이는 믿어졌다고 한다 그 다음 금숙이는 돈욕심이 들어 자기에 있는 돈을 몽땅 그계자에 넣어주고 한주가 십년처럼 길어보이며 그날을 기다렸다한다. 한주가 지난후에 자기통장을 보아도 일전도 들어 오지 않았다 그는 속이 달아 동분서주하며 그 친구를 찾았으나 그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분에차 허겁지겁 맥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턱앞에 돌층계를 헛디디여 쓰러저 그만오른손 손가락두개 뼈가 끈어져 지금 까지도 아무런 일도 못하는 불구자 신세가 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전한푼도 없는 빈털털이 신세가 되였는데 월세집 값을 내라고 매일 독축이 오니 나오는것은 눈물뿐이라한다 그후 법원에서 소식이 왔는데 그 사기꾼들을 잡아 넣었다하여 찾아 갔더니 그 사기당한 재료를 써가져 오라하여 그 사실을 반영하였어나 한달이 지났어 도 아직도 무소식이다. 돈이 없어 변호사도 못찾는 신세이니 행여나 하는행운을 바라는 수박에 없다고 하였다 몇일전에 봉천역 에서 그리멀지 않는곳에[ 강남요양병원]에 간병인으로 일하는 친구가 자기는 집에 급한 일이 있어 가게 되는데 자기 대신 이곳에 와서 일하여 달라고하여 새벽4시에 그곳 병원을 찾아 가서 일하였다고한다 .그런데 그병원에 가보니 2명간병인이 일곱환자를 간병하는데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에는 일곱환자를 모두모욕을 시키고 속벌까지 싰어야 했다 .한다 이렇게 하고보니 저녁 6시까지 눈코뜰 새도 없이 바쁘게 보내고 좀 앉아 쉬려고 하는데 간병인을 관리하는 협회 회장이라는 자가 한50세가 넘어 보이는 탈북자를 데리고 와서 금숙이를 나가라고 하며 그자리에 그 탈북자 여성을 안배하였다 .금숙이는 몇일이라도 일하여 우선 집월세라도 물려고 손가락 마디가 불러저 부어 올라서도 참아가며 새벽 4시부터 저녁 6시까지 참고 일하였지만 결과는 짤리우는 신세가 되고보니 눈물이 흘러앞을 가리웠다 한다. 이것은 우리교포 한사람이 걸어온 력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몆가지 문제를 찾아 볼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년령은70세을 넘겼다한다. 그는 20년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중국에서 온[교포]라는 딱지를 벗지 못했고 그 딱지로하여 여러가지 일들에서 인권과 권익을 유린 당하고 수모를 받았다고 생각되며 공짜를 바라는 그것으로 하여 큰손실 입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현재[한국의유산]의 추진위원들이다. 앞으로 이런 고달픈 인생을 살지 말고 굳게 뭉치여 잃어 버렸던 인권과 권익을 찾아 올것이며 전문 우리 교포들을 사기처 먹으려는 사기꾼들을 법망에 처 넣을 것이다.
이영조 위워림의 쓰신 글을 보노라니 어쩐지 저 자신의 신세와도 같은것처럼 느껴지면서 눈물이나네요 누구나 다 좀씩은 그런 슬픔 .고통 어려운 생활을 해 왔을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각성해야야합니다 또 다시 그런 치욕과 자존심짓밟는 그런 유치한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 가지않기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우리의 보금자리 " 한국유산" 으로 돌아갑시다~
첫댓글
이영조님께서 쓰신 고달픈 인생은 너무 쓰리고 아픈 인생이였습니다 . 그렇습니다 중국교포들이 금순언니와 같이 고생하신 분들이 어찌 그뿐이 겠어요 많고도 많지요 .그 "돈"때문에 인권과 권익에 대해선 어디다 하소연 할수도 없고 막무가내로 인격 자존심을 발바닥에 갈고 서러움과 아품 고달품을 밥먹듯 해야하는 신세가 중국교포들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나마 점점 교포들에 대한 정책이 많이 완화되였습니다.그러나 서정일 회장님처럼 우리교포들에게 인권과 권익을 명분과 실리로 책임지고 돈벌게 해보려고 밤잠을 설치면서 애쓰는분이 오직 서회장뿐 입니다 그러기에 중국교포분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뭉쳐야 성공합니다 .
'나도 한마디!'를 통해 그동안의 시간을 수집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분류 체계하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대하여 개선 및 반성 그리고 지키고 보호되어야 하는 권익이 증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갖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곧, 우리들의 '삶의 권익증대'라 할 것입니다.
이영조 위워림의 쓰신 글을 보노라니 어쩐지 저 자신의 신세와도 같은것처럼 느껴지면서 눈물이나네요 누구나 다 좀씩은 그런 슬픔 .고통 어려운 생활을 해 왔을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각성해야야합니다 또 다시 그런 치욕과 자존심짓밟는 그런 유치한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 가지않기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우리의 보금자리 " 한국유산" 으로 돌아갑시다~
화이 팅!
금숙언니의 실화를 읽고 마음이 넘 무겁네요 우리 한국의유산에서 이런 일들을 도울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