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인가>
지금까지의 철학은 또한, 실체 파악의 방법에 따라 구분해 볼 수도 있다. 직관·직각주의는 직관에 의해 본질 내지 실체(substance)를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고, 신비주의는 신비 체험에 의해 실체 파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경험주의는 경험이나 실증에 의해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고, 합리주의는 이성에 의해서만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칼 포퍼의 과학철학은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약점을 보완해 발전시킨 실체 파악 방법론이다. 칼 포퍼에 의하면, 과거의 경험은 과학적 법칙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어떤 칠면조에게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전 9시에 식사가 배달되었다고 해서 “(특정) 칠면조 식사시간은 9시”라는 과학법칙이 성립할 수는 없다. 요리사가 부활절까지 칠면조를 안심시키기 위해 벌인 기만적인 행동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동쪽에서 해가 떴다는 경험 자체만으로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뜬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과학적 실체 방법론은 아니다. 미래는 검증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은 가설을 검증할 수 없는 한 귀납적 비약에 불과하다. 합리적 추론에 의해 얻어진 결론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가 어떤 유형의 환자의 병에 대해 욕구의 좌절 때문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이는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과학이 아니다. 환자가 치료되지 않는다면 이론이 잘못되어 그런 것인지 환자가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 치료사들은 절대로 자기 자신은 검증하지 않는다.)
포퍼에 의하면 틀릴 여지없는, 반증 불가능한 명제도 과학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혁명에 의해 붕괴된다“는 마르크스의 법칙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오직 농업 후진국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법칙은, 역사적 반증에 의해 틀렸지만, 여전히 과학 이론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반증이 ‘보조가설’에 의해 판단이 유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망하지 않은 이유는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책동에 의해 노동자들이 속아서 혁명이 좌절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보조가설’에 의해 마르크스주의는 미래 예측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포퍼에 의하면, 보조가설의 남발은 반증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과학이 아니다. 믿음이다.
과학철학에는 포퍼의 검증 이론과 반증 이론 외에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 프로그램 방법론, 반-방법론 등이 있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과학적 경험이 천천히 축적되면 어느 순간 인식의 틀 자체가 완전히 바뀐다는 주장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기존의 법칙은 뒤집히고 그 법칙을 옹호하는 보조가설 또한 더 이상 등장할 여지가 없게 될 수 있다. (수강자 주 : 푸코의 주장과 매우 유사)
<관념이라는 주술>
마르크스는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실체를 형이상학적으로 인식하는) 관념론과 (실체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유물론의 대립”이라고 주장하였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처럼 관념론에 속하지 않는 철학도 있기는 하지만, 불가지론을 통해 결과적으로 관념론을 옹호하는 기계론이라면 관념론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관념론보다 더 문제가 있는 철학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허경이 보기에 마르크스의 문제 제기는 철학의 근본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을 마르크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또는 모든 사람은 철학에 대해 저마다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문제는 문제제기가 아니라 문제의식이다.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라는 마르크스의 문제제기야말로 (실체를 외면하면서 기존 질서를 옹호한다고 생각되는) 관념론자들을 비판하거나 다수의 동의를 얻어 관념론자들을 제압하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즉,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철학적 문제제기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제기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dike(정의)는 자연 질서를 의미하였고 arete(덕)는 개인의 탁월함을 의미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구두공이나 대장장이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능력을 잘 발휘해서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ergon(본분)을 강조하였고, 플라톤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본분(ergon)을 잘 수행하는 국가를 이상국가, 즉 이데아로 보았다. 이상적인 국가는 피타고라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발견(?)해 낸 우주의 kosmos(질서)와 harmonia(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에서도 마르크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비슷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에는 하늘의 별자리를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좌우가 바뀐 문양의 흔적이 있다. 우리 조상들이 하늘의 질서를 땅에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의지는 마르크스나 플라톤이 자신이 생각하는 땅의 법칙이 하늘의 질서(본질, 실체)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이데아(이상, idea)와 로직(말, logik)의 합성어다. 플라톤 같은 관념론자의 이상국가론이든 아니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든, 그 이상이나 생각을 말로 풀어내어 다수의 동의를 거친 것이 이념이다. 특정 이념(관념)을 가지면, 세상은 정말로 그렇게 돌아간다. 그 반대가 아니다. 허경은 관념론자다.
(추신)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이 주 8시간이다. 프랑스 대입 시험문제에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수업을 들은 사람이라면,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 사는 인간들의 정치적 판단을 통해 부정적으로 평가된 행위”라는 식으로 쓰면 높은 점수를 맞지 않을까?
프랑스 대입 철학 시험에서 나찌를 옹호하는 답을 쓰고도 고득점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그건 비인간적인 답으로서 탈락하기 딱 좋은 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