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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졸업정원제
그 졸업정원제는 81년에 도입되었다가 잠시 후 흐지부지 사라진 제도다.
신군부 집권 직후 폭증하는 재수생 문제를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대입 정원을 대폭 늘린 다음 ‘선 입학 후 탈락’을 조건으로 30%를 더 뽑은 것이다. 막힌 물꼬가 와장창 터진 것 같지만 그게 결국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다. 그때부터 81학번 새내기 동기생들은 유리 항아리를 안고 바위산 오르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겉으로는 모르쇠 책도 읽고 캠퍼스 로망도 누리고 싶은 시간이 흐르는데.
발달심리 방교수가 첫 운을 뗀 건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소문으로만 수상하게 떠돌던 졸업정원제 문제가 강단의 정식 화두로 던져졌다. 젖은 눈시울을 들킬세라 칠판 쪽으로 등을 돌리며.
“제군들 중 30%를 합법적으로 잘라내라니 아무래도 우리 과에서 열 명 가량의 희생자가 나올 것 같은데 …… 다른 과는 애들이 자퇴도 하고 군대도 가고 편입도 하면서 인원수가 조정되는데 우리 학생들만 1년 반이 지나도록 두 명밖에 변동이 없으니 …….”
울타리 식구가 경쟁상대로 확인되면서 불안감이 가속되었으니, 이제 모이기만 하면 누가 탈락자가 될 것인지 수런수런 점검하기도 했다. 도서관에 파묻혀 이름자 하나씩 지우며 자신의 순위를 자리매김해도 막막하기만 했고.
첫 화두를 뗀 사람은 복학생 길선배다. 그는 예비역으로 남녀 동기생들 모두 형이라고 높여 불렀고 그만큼 카리스마도 있었다. 그와 착한 남자 ‘과대표 박’이 회의를 주재한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도 우리의 생이별을 일방적으로 앉아서 받을 수만은 없다. 최소한의 의사 표시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일단 모두 동조를 하였다. 그러나 이 암흑의 시대에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을 달 것인가. 과대표 박도 두리번거리며.
“석아, 뒷문 좀 잠그라……자칫 다칠 수 있으니 노래 가사는 부드러운 걸로 부르자. 다만 최소한의 몸짓이라도 보여주는 의미랄까.”
‘붙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하는 수근거림도 있었지만 기실 계엄령 해제 직후의 시국에서 더 이상 방법은 없었다.
동기생 50명 중 44명이 모였다. 한 명은 입대를 위해 휴학을 했고 학점 고득점자 두 명이 빠졌고 신체검사나 예식장 방문, 병원 진찰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노래는 ‘어머니 은혜’ ‘스승의 노래’ ‘아침이슬’로 정했으니 이게 졸정제 거부 데모인지 스승의 날과 어버이날의 합종 행사인지 구분이 안 가는 수준이다. 어쨌든 아크로폴리스에 모여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고’를 부를 때는 눈시울이 시큰했으니 그게 집단의 감화이다. 아무래도 아침이슬 문장이 가장 비장하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로’
그 문장에서는 비장감으로 울컥 주먹이 쥐어지기도 했다. 그래봤자 정말 아무 일도 벌이지 못했는데.
“너희들 우르르 모여 있다간 큰일 난다. 빨리 들어가.”
교수님들이 대열 앞에서 우왕좌왕 만류를 하고 뒤쪽에서는 가죽잠바 사내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마냥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하고 수첩에 뭔가를 적거나 무전기 교신에 골몰하는 형사도 있었다. 우리들은 알고 있다. 문교수가 느티나무를 잡고 그냥 뒷모습만 보이거나 방교수가 출석부로 길선배의 등허리를 친 것 모두 ‘행동하지 못하는 양심’에 대한 자책이리라. 그런데 교수님 말씀대로 집회를 중지하면 ‘잘릴 목’ 문제를 해결할 타법이 있긴 할 걸까? 우리 과 50명이 동시에 졸업하고 함께 교단에 설 방법이 과연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맹탕으로 주는 대로 받으란 말씀이었을까?
부르르르르르릉.
자동차가 마후라 뺀 오토바이 소리로 허공을 찌른다. 승용차 두 대가 먼저 들어오고 뒤따라 경찰 버스가 들어왔다. 캠퍼스에 경찰버스가 진입해서 학과생 전체를 연행해가도 아무도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랬다. 전선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광주시민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보았고 도청사수대 울울청년들이 그 나라 군인의 총에 맞아 죽는 것도 경험했다.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김종필은 부정축재 운운으로 정치판에서 퇴출되었다. 그 후 군복의 사내들이 아홉 시 뉴스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좌지우지했으니.
“노래 부른 사람 일어서봐라.”
맨 앞줄의 석이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일어섰을 뿐이다. 수첩 첫 머리에 석이가 적혔고 길선배와 양이 언니, 은이, 과대표 박도 올라갔다. 반항은 엄무들 낼 수 없었으나 특별한 거사를 벌인 것도 아니므로 엄청 무서울 필요가 없었는데.
그때 왜 죽천 초등학교 애국조회 시간의 풍경이 떠올랐을까.
교장 선생님(운동장 조회 때마다 30분씩 마이크를 쥐어짜던)이 사열대에 오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여러분은 아직 어려서 모를 텐데 긴급조치란 아주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나만 다치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큰일나요.”
가슴이 철렁했던 열두 살 기억의 연장이다.
스승의 노래를 부른 젊은 죄인들이 소떼 몰리듯 오그르르 경찰서에 끌려갔다. 형사들은 백지 한 장씩 나눠주더니, 혀를 쯧쯧 차며.
“이제 국가가 안정되어 정의사회구현이 시작되는 마당에 무슨 혼란 행위냐? 각서 내용에 따라 정상을 참작해주니 알아서 기어.”
대학생들도 경찰서에 끌려가면 어린애처럼 무릎 꿇고 반성문 쓰는 줄 알았으므로 그저 바싹 탄 입술만 깨문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이웃들이 지옥을 만나고 와서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으가가가 발작했던 즈음이다. 발길로 채이고 곤봉으로 맞고 구르고 깨지고 내동댕이쳐졌단다. 앉으라면 앉고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뻗치라면 뻗치고 박으라면 박고 저 운동장 끝의 축구골대까지 선착순 시키면 시끈불끈 동료들을 이겨야 했단다.
“아침이슬도 불렀지.”
주근깨가 스무 개쯤 붙어있는 초로의 형사다. 안면 근육을 실룩댈 때마다 반질반질한 참깨 파편이 화들짝 흩어진다. 양희은의 ‘아침이슬’ 가사가 목을 조이는 사슬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그 묵묵부답은 당연히 반항이 아니었는데, 주근깨님이 볼펜으로 책상을 콕콕 찍더니.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에서 묘지가 무슨 뜻이냐? 태양이 동산이나 바다 위로도 떠오를 수 있는데 왜 묘지 위냐? 색깔도 왜 하필 붉게 타오르냐구?
“작사자가 쓴 걸 제가 어떻게 아나요? 아저씨나 저나 똑같죠.”
“싸가지 없는 년. 뭐 아저씨.”
짝.
스물한 살 여대생의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왔는데도 고요, 고요할 뿐이다.
사람은 과연 몇 살 때까지 싸대기를 내놓고 다니는 걸까. 마치 사고 쳐서 학생부에 끌려간 중학생들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힐끔거린다. 도청사수대 청년들은 죽음보다 무서운 고문도 당했다더라. 이 까짓것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 다지는데 ……자꾸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매 맞는 거야 솔직히 어린 날부터 이골이 났지만.
그 중 특별한 싸대기 기억은 세 번째다. 첫 싸대기는 5학년 담임님이 테이프를 끊었다. 웃을 때만 빼놓고는 늘상 찡그린 인상의 그 담임님은 대머리 이마가 툭 튀어나와서 별명이 바다 고기 ‘해마’였다. ‘큰가시고기목’ ‘실고깃과’에 속하는 그 바닷고기는 머리가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관처럼 생긴 돌기가 뚜렷하게 튀어나온 못 생긴 해물류다.
개나리꽃 노랗게 번지는 봄날의 점심시간.
그 담임님이 배드민턴을 치다가 다른 선생님보다 5분쯤 늦게 교무실에 들어가느라 허겁지겁 숨을 몰아치는 것이다. 그때 고무줄 넘던 희라가.
“해마니-임. 홧팅.”
손마이크로 소리치며 키득키득 도망친 건 순전히 장난일 뿐이다. 그리고 다시 후동 뒤편에서 고무줄을 당기느라고 금세 잊은 채 하하호호 몇 시간이 지났다. 그날 종례 시간에 등장한 해마님이.
“아까 별명 부른 새끼 누구야. 당장 나왓!”
하는 바람에 그제야 생각이 났을 정도다. 몇몇이 희라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희라는 바위처럼 끄떡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혈질의 해마님이.
“함께 웃은 놈도 일어나.”
반장 민이가 앞자리에서 어정쩡하게 허리를 세웠고 석이도 조금 늦게 망상망상 일어섰다.
짝짝.
그런데 선생님이 민이를 지나쳐서 석이한테만 다가오더니 싸대기를 날리는 것이다.
‘조금 늦게 일어서서 정직하지 못했던 대가인가 보다’
그렇게 넘겨야 했다. 싸대기 매질은 스승의 고유 권한이므로 당연히 항의할 수 없는 것이다. 범인 희라가 일어서지 않은 것은 개인의 가치관이며, 해마님이 앞줄 민이를 건너뛴 것도 반장에 대한 권위를 인정해주려는 배려일 것이다. 그날 하굣길, 석이는 수돗가에서 볼을 닦아내었고, 당연히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고2때였고 가정시간이었다.
40대 가정 티춰는 의사의 아내답게 화사한 포즈와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녀는 특별히 소리 지르거나 인상을 쓰지 않았는데도 여고생들 모두 ‘걸어다니는 원자탄’이라며 혀를 내들렀다. 다만 석이 혼자 가정 티춰의 옷맵시가 스치기만 해도 황홀해서 아, 하는 감탄사를 감출 즈음이다. 그런데 석이의 필기 모습을 지켜보던 가정 티춰가, 갸웃대며.
“넌 왜 왼손으로 쓰니?”
“…….”
요점 정리한 것을 따로 간추려 중간고사에 대비하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정 티춰가 다시 짜증스럽게.
“대답 안 햇?”
유리 파편 소리가 쨍그랑쨍그랑 교실을 가르는데도, 무심히.
“원래 그래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머리가 뛰어나지 않으므로 남들보다 빨리 기말고사 준비를 하기 위해 외우고 밑줄 치고 적어야 했다. 그런데.
짝.
싸대기를 맞았고 고삐 끌린 채 교무실에 끌려갔다. 반성문을 가져가자 가정 티춰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써왓.”
짧게 끊었을 뿐이다. 후미진 구석에 무릎 꿇은 채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헤집고 또 챙겨서 다섯 번까지 빽빽하게 채워야 했다. 그건 지난 일이고, 지금은.
‘아저씨가 아니면 뭐라고 부르나? 경찰관님? 형사님? 아니면 선생님?’
석이가 달아오른 뺨을 만지며 적절한 호칭을 찾아 갸웃대는 중이었다. 그렇게 고스란히 당하는 게 대학생인 줄 알았으나, 그 순간.
“계속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나요? 우리는 미래의 스승을 꿈꾸는 사범대 청년이요 지성인입니다. 아니, 지성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스승의 노래를 부른 게 닭장차에 실려 올 죄목입니까?”
소리 지르는 쪽을 쳐다본다. 동급생들로부터 여자 예비역 대우를 받는 25세 ‘양이 언니’다. 형사들의 눈빛에 번뜩 불이 켜졌고 교수들의 얼굴에도 당혹한 표정이 서렸다.
“울타리 안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이 잔혹 시스템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최소한의 목소리를 냈을 뿐입니다. 사범대 캠퍼스에서 스승의 은혜를 불렀다고 죄인처럼 조아리고도 우리들이 예비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니가 빨갱이냐? 아무데서나 말만 번드르르하고.”
“반말하지 마세요. 저희들은 성인입니다.”
주근깨 형사는 양이 언니 앞에까지 푸르락푸르락 다가갔으나 막상 손바닥이 올라가지는 않았으므로 거기서 정리되었다.
“몇 사람은 짐을 지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제민천 탁배기집 물푸레나무 흔들리는 밤이다. ‘어머니 은혜 선동가’ 길선배가 운을 떼자 모두 불안하게 소주잔만 만지작거린다.
“아무래도 하나가 짤리고 다섯 정도 무기정학을 때릴 것 같은데 나머지 짐도 누군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 퇴학은 내가 당할 테니 이후 다시 진술을 하게 되면 모두 나에게 밀어부쳐라. 어차피 이런 비굴한 모습의 대학 생활에 미련도 없다. 나머지 무기정학을 당하는 아이들은 내년에 다시 복학을 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퇴학당하면 어떻게 사시려고요?”
“노가다를 뛰면서 아프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에 동참하겠다.”
아, ‘민중’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가슴을 후빈다. 그러자 ‘스승의 노래 죄인’인 양이 언니도 어금니 깨물며 주먹을 쥔다.
“앞으로는 절대로 지금처럼 살지는 않겠어. 이 어둠의 시대에 불의와 싸우는 횃불로 동참할 거야. 약자가 당당해지는 세상을 바로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미래의 희망이 없어.”
석이보다 한 살 적은 은이도 안경을 벗으며 눈시울을 닦아낸다.
“분하지만 많은 것을 배웠어요. 민주주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있다고 배웠는데 이렇게 불쌍하게 깨졌어요. 교수님들도 그냥 창백한 지식인일 뿐이더라구요.”
눈물 같은 소주를 들이키며 소주 같은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바람에 석이도 울고 남학생들 대여섯 명도 콧등을 훔쳤다. 팽팽하게 부푼 가슴이 누군가 바늘을 대기만 하면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린 새순들이 어느 새 굵은 줄기로 성장하는구나’
그 비장한 스크럼이 함께 한다면 외롭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가거였고 내일부터는 새로운 현재가 시작된다며 두 주먹 불끈 쥐었다. 그런데 당장 다음 날 아침 자취방에서 눈을 뜨니 석이 혼자 등교해야 할 공간이 없어져서 ……밀려오는 고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과수원집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단 한 마디도 말씀이 없었다. 딱 한 번 가정방문을 온 방교수와 문교수에게.
“뭔가 착오가 있을 거유. 우리 애가 국가를 전복할 사상이 들었다능 게 이해가 안 가네유. 교수님. 저렇게 어린 애가 덤빈다고 전복되는 나라가 가당키나 하간유?”
두 분 교수님의 쓸쓸한 뒷모습 배웅이 끝이다. 그뿐 아버지 어머니 모두 큰딸에게 단 한 마디의 원망이나 질책도 없이 사과를 솎고 못질을 하고 리어카를 끌었다. 같은 학번으로 국립대에 다니는 남동생 홍이도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와.
‘누나, 우리도 이제는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지를 똑똑히 직시해야 할 때야.’
등을 두들겨줘서 무기정학 징계가 오히려 자랑스럽기도 했다.
딱 한 가지, 아버지의 술자리가 예전보다 늘어나는 게 꺼림칙하긴 했다. 원래 성품이 쾌활했으나 술에 취하면 아무데서나 쓰러지기를 잘했는데 그 횟수가 잦아진 것이다. 그날도 아버지가 버드나무 주막에서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년생 홍이와 고3짜리 사내 동생 용이를 데리고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그렇게 두 아들의 팔짱에 의지한 채 논두렁길을 비틀비틀 걷던 아버지가.
‘간다 간다 울멍울멍 나는 간다’
사내 동생 둘과 동행하는 것도 든든했고 취객의 육자배기가 조금은 낭만적 풍경이다. 폭정의 시국, 억울한 사연들이 장차 인생의 자양분이 되리라 다짐하며, 슬퍼하지 않으려 옷깃을 여몄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목덜미를 덮는 찰나, 아버지가 훽 돌아서더니.
“석아- 넌 이제 어떻게 살아간다냐? 흐으흐으.”
그미를 후닥탁 끌어안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첫 품은 뜨거웠고 등허리 바람은 차가웠다. 달빛만 저 혼자 훤했다.
그때부터 캠퍼스에는 사회과학 탐독 붐이 일면서 ‘폭정을 달게 받지 말자’며 틈새를 헤치기 시작했다. 동기생들은 한때 징계 받은 친구들 앞에서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해서 시국이 어두운 만큼 막중한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강산이 세 바퀴쯤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30%로 학교를 떠난 벗들은 대학을 바꿔 재응시하거나 공무원이나 소방서 직원으로 전환해서 새 살림을 꾸렸고 동창회에서 부부동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013년, 예전의 운동권 교사들은 질곡의 세월을 거쳐 평교사로 남아있거나 명퇴를 했고 겉돌던 동기생 중에 몇몇은 관료가 되기도 했다. 미싱이 돌아가듯 자본주의도 팽글팽글 돌았다.
(이 글은 소설적 구성으로 실제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