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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인생
박태환
들머리
‘나의 시 인생’,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 마치 내가 이름 있는 시인, 아니 대시인이란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밝혀둔다. 나는 아직 내 입으로 내가 시인이라 말 한 적이 없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가 없었다면, 내 삶은 참 메말랐을 것이란 생각은 한다.
시란 내 인생에 어떤 것일까? 시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있었을까, 이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시는 나에게 보약과 같이 귀하디귀한 것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몸도 마음도 여러 번 다쳤다.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알게 모르게 달려드는 독기, 그것들을 내 마음에서 빼내는데 시(詩)만한 게 없었다. 몸과 마음에 탁한 기운이 쌓일 때마다 나는 시를 읽었다. 몸을 시원하게 하고 마음을 맑고 환하게 하는, 감동적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반복학습의 효과일까. 그 덕에 많은 시를 암송할 수 있었다.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시 읽기를 좋아한다.
1. 학창시절
초등학교를 집의 나이로 아홉 살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동요랑 동시를 만났다. ‘반달’이나 ‘엄마야 누나야’ 등을 노래 불렀다. 고학년이 되자 정몽주, 성삼문, 박팽년, 김종서, 이순신의 시조를 읽고 또 읽었다. 길재의 회고가, 주세붕의 오륜가, 정철의 훈민가, 윤선도의 오우가 등을 읊조리며 나름대로 효와 충, 인간관계, 세상살이에 대한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거의 다 외울 정도였다. 황진이의 시조에 빠진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대학 국문학사 시간을 통해 고대가요, 향가, 속요, 시조, 가사를 몇 번이나 거듭하여 훑어보았다. 현대시도 평론가 신동욱 교수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대학 4년 동안은 시 창작과는 인연이 멀었던 것 같다. 조지훈 선생님께서 내가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소설가였던 정한숙 교수로부터 소설 창작론, 소설 기술론을 배우면서 실제 소설 창작에 보탬이 되었지만, 시 강의에서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시론을 신동욱 교수로부터 배우긴 했지만 시 창작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훈 선생님께서 좀 더 오래 사셨더라면 나도 일찍이 등단한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68년 입학하였을 때, 선생님의 문장론 강의가 주당 2시간 있었지만, 그해 5월 17일에 작고하셨으니 가르침을 받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의 장례식 날, 나에게 주어진 영광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효상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쟁쟁한 시인과 교수님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것도 감동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장지인 경기도 마석역에서의 일, 산 밑에서 중턱 장지까지 내가 왼쪽 맨 앞에서 운구를 하였다. 고인과 동향인 경상도 사나이라는 명분으로 당신의 마지막 길을 내 손으로 직접 모신 일은 촌놈인 나에게는 참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그 감격스러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2. 교사시절
첫 부임 학교인 서울의 H고등학교에서는 고3 고전문학을 맡았다. 다음해 천안 C고등학교에서는 1,2학년 국어과목을, 세 번째 경산 G여자고등학교 8년 동안은 3학년 국어수업을 하였다. 학창시절 암송에 익숙했던 나는 특히 시나 수필 그리고 소설 수업 시간에는 신이 났다. 그래서 학생들은 나를 액면가 이상으로 인정해 주었다. 선생님 호가 뭐냐는 등 나를 따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수필 시랍시고 가끔이긴 하지만 쓰기를 했다. 그것들을 관련 시간에 읽어주기도 하였다. 구미로 직장을 옮겨 구미문협, 선주문학회 활동을 하고부터는 그런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되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3. 피가 되고 살이 된 시편들
1)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 때 위로가 된 시- 허영자의 「자수」등
2) 맑고 밝은 영혼, 본성 회복을 위하여-윤동주의 「서시」, 임문혁의 「단풍을 보다가」등
3) 나라 사랑의 마음, 애국심 고취의 시편-민족 3대 저항시인을 비롯한 박두진, 조지훈, 정인보, 유치환, 심훈, 이은상, 정완영 등의 시
4) 수기치인의 지도자 길을 위해- 조동화의 「나 하나 꽃 피어」, 자작시 「살아 있는 악기」등
5) 교사로서의 언어사용에 도움이 되었던 시-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워즈워드의 「무지개」 등
6) 꿈과 용기, 지혜를 주는 시-울만의 「청춘」, 커버거의「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등
」
4. 내게로 온 말, 말들
조지훈 선생님의 첫 강의 둘째 시간쯤으로 기억한다. 한 학생이 당신의 대표작「승무」의 창작 동기와 과정을 물었다. 답변 내용을 정확히 다 기억하진 못한다. 다만 「승무」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기만 한 시는 아니라는 것, 가을 달밤 절간 뒷마당에서의 추던 승무를 보고 착상하였다는 것. 처음엔 108행의 초고를 3년에 걸쳐 18행으로 퇴고, 완성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까지 선생님처럼 오랜 시간 살을 깎고, 피를 찍어 시를 써본 적은 없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들뿐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훌륭한 시인들의 좋은 시들을 많이 그리고 자주 읊조리며 어렵지만 그렇게 시적인 삶을 살도록 애썼다. 그 결과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 울렁거리고, 가슴 울컥할 때 즉흥적으로 내게로 온 말들을 옮겨 보았다. 시적 형상화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어야 하거늘 그렇지 못하다. 두 번 세 번 비틀어 나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제는 피를 찍어 쓰고 싶을 때도 있다. 암송 낭송만 하다 보니 암기력은 뛰어나나 상상력과 창의력, 창조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고 철저한 자기성찰에 힘써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싶다. 이런 상황이면서 강의 청탁을 쉽게 수락했다. 그렇지만 어쩌랴. 내 삶의 울타리에서 쉽게 온 말들이나마 몇 편 소개할 수밖에. 몇 작품을 내 나름의 뒷글(평)을 덧붙여 싣는다.
인사
오다가 서로 마주친 눈인사/
눈부신 햇살/메마르단 세상, 그게 어딘데
달려와 얼싸안는, 화려한 확인/
수다야 외려 결 고운 한 폭 비단/따뜻한 목도리
“안녕! 좋은 하루, 주인공 되세요!”/
햇살같이 퍼져오는 등 뒤의 인사/
따슨 정 퍼 올리는 샘/가슴 적셔 솟구친다.
# 그때는 그랬다. 사립중고등학교 여교사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만두어야 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삼년을 함께 고3 담임을 하던 임선생님, 약혼을 하자 3월 새 학기는 중1 수업을 맡아 서로 다른 건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울타리 안이긴 하지만, 쉬 만날 수 없었다. 4월 첫 주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자전거를 타고 작은 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올 때였다, 10여 미터 뒤에서 ‘주임 선생님’ 하는 낯익은 목소리가 쪼르르 달려와 “안녕, 좋은 하루 되세요” 한다. 너무 반가웠다. 함께 교문을 들어와 헤어져 진학실로 와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느낌을 써내려갔다. 중학교 교무실에 가서 전해 주었더니, 액자에 넣어 나중에 신혼방에 걸겠다고 하였다. 내용인 즉 삶에 활력을 주는 정겨운 인사 3가지, 첫째 최고의 인사는 반가운 사람 알아보고 뒤에서 쫓아와 하는 인사요 둘째 차상의 인사로 서로 얼싸안고 하는 인사, 그다음으로는 오가며 하는 눈인사라고 읊어본 것이다.
살아 있는 악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 작아서, 힘은 없다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악기랍니다.
손으로 타지 않아도
입으로 불지 않아도
저절로 소리가 되고
스스로 그 소리 들을 수 있는
작다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악기랍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눈이 부셔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동안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반짝이는 별이 되어
둥둥 기쁨의 북, 어깨 들썩이게 합니다.
마음 닦아 벽 허물고
너와 나 울타리 걷어내노라면
웅장하고도 미묘한 교향악으로 울리는
우리들은 모두 살아 있는 악기랍니다.
# 예총 구미지회장 시절, 8개 단체의 대표라 늘 바쁜 편이었지만, 특히 5월이나 10월이면 행사장에 살다시피 했다. 예술회관 공연 때는 한 번도 무대 위에 올라 축사를 하지도 않았다. 주로 공연장의 관람석에만 한두 시간씩 앉아 관람하다 귀가하곤 했다. 그날도 공연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쩐지 의기소침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의기소침 우울한 마음 끝자락에서 이 시가 실타래 풀리듯 쉽게 풀려나왔다. 누구나 다 가치 있는 존재, 능력 있는 사람으로 더욱 심신을 수련한다면, 그리고 이웃과 원활한 소통을 하여 바람직한 ‘사이문화’를 이룩한다면, 교향악 울리는 행복사회가 온다는 희망을 가져보면서…(경북문학상 수상작)
커피를 마시고부터는
커피가 입에 익은 사람은
커피, 커피 하고
술이 몸에 밴 사람은
술, 술 한다.
남들이 커피, 커피 할 때
나는 막걸리, 막걸리 하다가
나이 좀 들어
어쩌다 커피를 마시고부터는
남들이 커피 하면
나도 커피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막걸리, 막걸리만
외지 않게 되었다.)
일 년에 열 잔 안팎으로 커피를 마시던 나, 그런 내가 교장 6년 동안 내 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거의 모두 커피를 찾는 바람에, 손님을 대접하며 함께 마시다가 나도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가 생겼다. 내 생각 무작정 고집하지 말고 남의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는…
금오산
높지도 낮지도 않아
누구 하나 깊이 생각해 주지 않아도
서운해 얼굴 바꾸는 일 없다.
넓지도 골 깊지도 않아
누구 하나 오래 머물지 않아도
허전해 흔들리는 일 없다.
그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름진 벌 안고 휘도는 낙동강
그 낙동강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낮에는 부신 햇살 벌 나비 윙윙거리고
밤에는 영롱한 영혼의 꽃밭 머리에 이고
가다가 구름이불 그 허리 감싸드는 것만으로도
넉넉하여 걱정 하나 띄우는 일 없다.
욕심 내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고
두 팔 벌려 다 챙기려 하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복되어 눈부신 것들
천생산, 태조산, 비봉산, 다봉산 ……
손짓하여 오순도순 나누고
비바람 눈보라 험하고 서룬 것들
구태여 고개 돌리며 발 빼려 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같이 오는 대로 맞이하고
또 가는 대로 보낸다.
번쩍 번개 천둥으로 울고
그 번개 천둥 비바람으로 몰아쳐 와도
듬직한 어깨, 든든한 뿌리, 그 기상 가을 하늘 같다.
# 2002년 태풍 루사는 충남 서산을 비롯하여 전국을 강타했다. 이웃 김천도 그 피해가 막심했다. 이듬해 매미도 울릉도를 비롯하여 동해안 특히 경상남북도를 휩쓸었다, 그런데 두 번 다 우리 구미만은 별 탈이 없이 지나갔다. 나는 그것을 두 팔 활짝 벌리지 않고 우뚝하게 서있는 금오산 덕분이라 생각하며 이 시를 읊게 되었다. 외롭게 서있으면서도 자족하는 산, 혼자 다 가지려 하지 않고 함께 나누려는 배려의 산, ‘수양산 그늘이 팔십 리’라 했던가? 금오산 덕분에 그 아래 사는 우리는 자연적인 재앙이 없다. 전혀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을 누리고 살고 있다고 노래한 것이다. 가을하늘 같은 기상으로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놀이터1 1
놀이터 하나 생겼어요. 서른 해 넘도록 다니던 삶터 졸업하면 어떡하나, 허전하고 심심해서 어떡하나 걱정했다나요. 그런 아내가 마련하고, 내가 덧칠한, 한 달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는 놀이터 하나 생겼어요.
고라니 멧돼지 밤낮없이 번갈아 놀다가고, 물소리 바람소리 눈부시게 고운 산자락 묵정밭 밭뙈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용감하게 산자락 묵정밭을 화전했지요.
화전한 자리, 감나무를 앉히고, 살구나무 복숭아나무를 모시고, 호두나무 대추나무도 한두 그루 초대했지요. 시금치 배추 도라지는 고라니 때문에, 감자 고구마는 멧돼지 때문에 천수를 누릴 수 없는 놀이터, 호박 수박 몇 구덩이, 오이 가지 고추 토마토 모종 몇 포기를 소꿉으로, 재미 쏠쏠하지요.
오가는 사람 뜸한 놀이터, 갈 때마다 더욱 새롭고 풍성해지는 소꿉동무들, 덩달아 나도 신나고 넉넉해지는, 더우면 웃통 훌훌 벗고 새소리 공으로 들으며 햇볕이랑 바람이랑 함께 하는 소꿉질, 땀나게 놀다가 지치면 괭이 호미 쇠스랑 던져두고 벌렁 내 몸 땅에 누이면, 높던 하늘 다가오고 솔가지에 걸린 낮달, 아 끝없는 놀이터 하나 생겼어요.
#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아내의 아는 이 가운데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분이 있었나 보다. 그를 따리 다니다가 땅을 사놓고는 2년 동안이나 내게는 그 사실을 숨겼다. 정년퇴임 무렵에야 그 사실을 알고 함께 가봤다. 좋았다, 퇴임 후 놀이터로 삼기에.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시를 떠올리게 하는 아늑한 산자락 자드락밭, 허영자 시인의 <자수>를 읊조리며 밭(놀이터)을 일구었다.
집들이
전세로 십 년을/전전긍긍하다.
아내는 나만 바라보고/나는 일터만 우러러보다.
길을 갈 때는/집들만 눈에 들어오다.
그 사이 우리는 /새 생명을/넷이나 얻다.
독차지한 집은 아니지만/그래도 내 이름으로 등록된/그림 같은 집
몇 분을 모시고/잔치를 하다.
# 결혼하고 단칸방 전세로 시작한 신접살림, 아내와 손 맞잡고 알뜰살뜰 살았다. 한 때는 내 수입에서 월급보다 보충수업비가 더 많은 때도 있었다, 그게 한 3년 동안이었나? 귀여운 딸 셋을 2년 터울로, 그리고 막내인 아들은 4년 만에 큰 선물로 받았다. 그때 우리들의 집을 마련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노래 부를 수밖에!
도서관
여기에 들면 보인다, 길이/사람 사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길이 보인다.
이곳에 들면 향기가 난다./방 안 가득 천 년 만 년
고상한 영혼들의 향기가 난다.
하늘의 빛만으론/물, 공기, 밥만으론
늘 배고픈 우리들의 영혼
사람이 만들고/사람을 만드는/향기롭고 눈부신 보석들
누구라도 와서 가지라고 한다.
캄캄한 밤, 사막의 모래바람을 뚫고/뭇 짐승들의 밀림을 지나
마침내 다다를 수 있는 /영혼의 자유 누리라고 한다.
# 도립 구미도서관에 드나든 지는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길문학회’ 그리고 ‘느티나무 독서회’와 인연을 맺으면서였다. 그러다 문헌정보 과장, 도서관장과도 자주 만났다. 언젠가 도서관 책자를 발간할 때, 관장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졸시 <도서관>이 빛을 보게 되었다. 경주 청송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학교도서관 벽에서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퇴 근 길
갈매빛 산자락 그리메 이울고 싱그런 함성 돌아간 텅 빈 뜨락에 한 마리 하얀 비둘기 어둠을 쪼아대고 있다. 땅거미 적막히 녹아드는 계단 올라 따르르 열려지는 너희들, 텅 빈 교실엔 텅 빈 교실로 참 너희들이 모두 있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잡히는 거 하나 없이 깊은 밤중으로 여기 섰을 때, 너희들은 한결같이 하나였었고, 난 둥둥 떠가는, 미풍에도 둥둥 떠가는 한 점 구름이었다.
세월은 강물로 흐르고 그 흐름 위로 어쩌다 마음 출렁거려 출렁거리어 주먹이 되었다간 청댓잎에 떨어지던 새벽 빗소리…….
마침내 내 거울 속엔 너희들도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을 일어서고 나 역시 이젠 감출만한 게 없다.
하학 후, 텅 빈 하학 후, 책걸상 나란한 교실에서 다시 시작는 강의, 눈감아도 뜬 눈으로 다가오는 걀숙이 기름이 동글이 그리고 내 소학교적 물난리 때 베우산, 베우산 받치고 집까지 바래다주시던 나 여기 있게 하신 은사님, 오늘 다시 사시어 내 머리 어루만져 미소하시다. 퇴근길 밝혀 인도하시다.
# 돌아보면 나만큼 운이 좋은 사람도 드물지 싶다. 지금 같으면 직장을 쉬 잡는 행운이 없었을 터. 그런 내가 때를 잘 만나 서울서 천안서 경산을 거쳐 이곳 고향땅 구미에서 사립 중등학교 교편을 잡을 수 있었으니, 그것도 재단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내가, 또 교감과 교장까지 두루 하였으니…. 두 남학생 학교를 거쳐 여학교에 부임했을 때의 기억과 일찍 교감이 되어 저녁 늦게까지 자주 교정에 남으면서 이 시가 싹트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정말 나를 잘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셨던,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을 기리는 가운데 이 시가 지어졌다.
마무리
공자께서 시경에 나오는 300여 편의 시에 대한 느낌을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그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廢止 曰 思無邪)’고 말씀하셨다. 시인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시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시를 읽다 보면 가슴 뭉클하고, 재미있고,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듣게 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고,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는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고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마음이 맑고 고요해진다.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면 세상을 보는 눈 또한 밝고 넓어지기 마련이다. 좋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삶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만큼 세상살이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나의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나아가 값진 나눔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다.
살면서 ‘아’하고 가슴 울컥하는 울림이 올 때, ‘그래 이거야, 그럴 수도 있지, 이럴 수도 있구나, 아 이럴 어쩌나’ 할 때 우리는 연필을 쥐고 시를 쓰게 된다. 이런 삶을 거듭하다 보면 마음 맑고 깨끗해진다. 마음이 맑고 깨끗할 때, 구슬과 같은 시가 찾아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 삶을 살면서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지금까지 쓰기보다 읽기를 더 많이 하였다. 이제는 쓰기와 짓기에 더 무게를 두고 내 시 인생의 마무리, 유종의 미를 거두려 한다. -끝-
✽ 이 글은 경북 중등문예 회원님들의 동계연수회 때, 문태준 시인(90분)과 함께 효성카토릭대학 강당에서 제가(50분) 특강 부탁을 받고 급히 만든 강의 내용입니다.
첫댓글 가만히 앉아서 눈으로 명강의를 듣습니다
눈 감으니 뒷산 어귀에도, 길 모퉁이에도, 선술집 간판에도 온통 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강의 듣고나면
아, 쓰고 싶어라ㅡ
몸살이 납니다
좋은 강의를 듣습니다.
한번더 성찰하게 됩니다.
인생이 묻어나는 한권의 책 잘 감상했습니다,
멋진 삶
멋진 글
엄지 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