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사(昌舍) 손명래(孫命來)
樂民 장달수
“내가 어릴 적에 고 창사옹(昌舍翁)이 옛날 뛰어난 문장가 못지않게 글을 잘 지었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를 보지는 못했다. 오직 대책(對策) 몇 편만이 과거보는 이들의 전하는 말을 통해 접했으니, 이는 고기 한 점 먹어보고 가마솥 전체의 국맛을 추측하는 정도로 직접 확인하는 것만 못했다. 항상 아쉬워 하다가 어느 날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유명한 선비들을 좇아 놀며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근고(近古)의 문장가 중 일찍이 공의 문장을 장중하고 굉박하다 굳게 믿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산청출신의 선비 이우빈이 창사(昌舍) 문장을 이야기 한 글이다. 성균관 선비들이 한결같이 뛰어난 문장가라고 칭찬한 선비는 바로 창사 손명래(孫命來)다.
창사는 1664년 창녕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영특하여 말을 배울 시기에 이미 글을 지었다. 9세 때 스승을 따라 절에서 독서할 때 매달린 북을 보고 시를 짓기를 “가죽면은 달같이 둥글고 은빛 못은 별처럼 반짝이니 빈 마음에 벼락 치네 대낮에 천둥 치네”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여 크게 될 사람이라고 기대를 했다. 창사는 부친의 명으로 진주사는 종손인 수업(守業)의 양자로 들어가, 역시 진주에 사는 양영세(梁永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진주에 살았다. 호를 ‘창사’라 한 것도 고향인 창녕을 생각해 지은 것이다.
창사는 문과에 장원급제했는데, 특히 대책문(對策文)을 잘 지었다. 대책문은 조선시대 과거 과목의 하나로 어떤 시정문제(時政問題)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논하게 하였는데, 이때 문제를 써 놓은 글이 책(策)이다. 한편 임금이나 귀한 사람의 물음에 대답하는 책문(策文)을 말하기도 한다. 당시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창사의 대책문을 보고 교과서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이 서울에 자자해지자 고관들이 만나기를 바랐지만 창사는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이 “이미 과거를 보고 승진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하여 고관을 만나지 않느냐”라 했다. 창사가 말하기를 “하찮은 물건들도 하늘에서 타고난 명이 있는데 사람은 분수에 따라 살아야 한다. 만약 먼저 승진을 부당한 방법으로 구할 마음을 먹는다면 뜻을 빼앗긴다는 훈계에 부끄럽지 않겠는가”라 했다. 그 지조 바른 것이 이와 같다.
행장에 이런 일화도 전한다. 창사가 조정에 나가 대책문을 지을 때, 서울에서 한두 번 만났던 사람이 시권(試券)을 보여 달라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그 사람은 기억력이 뛰어나 40여행을 한자도 틀림없이 옮기고 먼저 시권을 제출해 뽑히게 되었으며, 창사는 뒤에 시권을 제출했으나 역시 선발되었다. 뒤에 조정에서는 시권을 면밀히 다시 살펴보고 같다는 것을 알고 진위를 가리고자 했다. 이 때 창사는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는 것이다. 임금에게 아뢰는 말을 어찌 감히 속이겠는가”하고 마침내 사실대로 대답하고, 그 사람은 유배되었다. 창사의 문장력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좌승지를 지낸 추산(秋山) 김유헌(金裕憲)은 “창사 문장의 뜻이 크고 원대하기로는 신청천과 필적할 만하고 전아함은 그 보다 뛰어났다”라 했다. 신청천은 조선 후기 문장가 신유한(申維翰)을 가리킨다. 창사를 문장에 능하고 걸작시(傑作詩)가 많기로 유명한 청천 신유한에 비교한 것이다.
창사는 문과 장원해 국자학유(國子學諭)에 제수되었다가 박사, 주부, 전적 등의 벼슬을 거쳐 전라도의 삼례도(參禮道) 겸찰방(兼察訪)으로 나갔다. 원래 찰방직은 종 6품의 외관직이었으나, 중종 때부터 찰방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져, 이들의 부정사실을 적발하기 위해 주로 성균관·교서관·승문원의 종7품 이하 참하관(參下官)을 겸찰방으로 임명하여 11개 주요 지역에 파견하였다. 당시 고을의 수령 중 세력 있는 자가 공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상부 기관에 공문을 전달하려 하자 창사가 전달하지 않고 공문을 되돌려 보내며 깊이 꾸짖었다. 그 사람이 몹시 화를 내며 관찰사인 이집에게 하소연하여 은밀히 해치려 했다. 관찰사가 꾸짖어 말하기를 “자기가 먼저 법도를 어겼으니 마땅히 무엇을 받아들이겠는가. 영남 사람은 강직하여 법을 지켜 굽히지 않는다. 만약 이로써 허물을 삼는다면 직접 장계를 올려 죄를 논하겠다”하고는 창사의 강직함을 칭찬했다.
임기를 채우고 빈 몸으로 돌아가자 백성들은 고마워했다. 교활한 아전들은 도리어 보복하고자 실정을 지적하여 장계를 올려 의금부에 잡혀갔으나 이집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풀려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책을 가까이 하며 독서에 열중하며 진주에서 유유자적 생을 보내다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난다. 후손 손원모씨(진주시 상봉서동)와 진주 진양호 가는 길목에 있는 창사 묘소를 찾았다. 손씨는 “옛날 이 어른의 묘소는 마을 사람들이 관리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덕이 많아 자기 조상 묘소처럼 관리해 준 것입니다”며 창사가 이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조성교(趙性敎)가 지은 묘갈명에 “임기를 채우고 돌아와서는 다시 세상에 뜻이 없었으니 옛 책을 궁구하고 후진을 가르쳐 성취한 바가 많았다. 한 아우가 있으니 침식을 같이 하기를 10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며 “밀암 이공의 문하에 종유하여 권설재, 정훈수 제공과 서로 친했다. 저술한 논책은 모두 법도에 맞고 문장은 굳건하여 고문에 가까웠다”라 했다. 창사 글을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제(御製) 신춘시(新春詩) 서문에는 천자를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를 서술하였고 비희록(悲喜錄) 1편은 효제에 근본을 두었다”라 하며 공의 충효는 타고난 것이라고 했다. 글 자체만 아니라 글에 담긴 생각 또한 그의 인품이 그대로 반영한 결과라 여긴다. 창사가 만년에 살았다는 진주 판문동을 둘러보고, 창사 흔적을 찾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창사 삶이 그의 문집에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