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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괴로움만 더했다. 백형기는 어느 날 자기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찰나의 즐거움을 외면하고 참되게 살아 보려는 노력이 차츰 허물어져 갔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삶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되고 방법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술을 마시면 넘어갔고 닭서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도우미 역할을 했다. 친구들은 월중 행사처럼 한 달에 한 번씩 군부대 가까이 있는 별동네로 원정하는 일이 있었다. 저녁이면 어두컴컴한 그 마을 골목에는 집집마다 별 등이 하나씩 내걸렸다. 가까이 지나는 사람도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누구나 자기 신분을 감출 수 있었다. 한 친구가 포주와 의논을 하고 일곱 명의 친구들은 모두 방을 하나씩 배정받았다. 형기도 마지막 일곱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붉은빛 알전구 아래 속살이 비치는 슬립을 입은 아가씨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백형기에게 아가씨는 “어서 옷을 벗으세요”라고 장난처럼 말을 걸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할 말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형기는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십리나 되는 밤길을 줄행랑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용기를 내지 못한 자기모습이 부끄러웠으나 호기심은 더욱 끓어올랐다. 형기는 며칠 동안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한 주간이 지나고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는 별동네 얘기가 나왔고, 그날 홀로 도망친 형기를 놀려댔다. 그는 부끄러움을 술로 이겨내려고 주는 대로 잔을 받아마셨다. 밤늦게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겨우 아래채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큰방에서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형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순옥에게 말했다.
“오늘도 늦은 거 보이 술 묵고 들어온 모양이다. 니가 가서 잠자리 좀 봐주어라.”
순옥은 지난봄부터 심부름하는 아이로 먼 친척 집에서 데려다 놓았다. 예쁘고 착한 순옥은 형기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녀는 자기가 올 때와는 달리 몇 달 새 교회와도 멀어지고 자주 술만 마시고 다니는 오빠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날도 할머니와 함께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으나 할머니가 깨워서 심부름하게 된 것이다. 순옥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형기를 부축하며 윗옷을 받아 걸고 이부자리를 폈다. 형기는 취한 눈으로 순옥을 훑어보며 지난 주간에 있었던 별동네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늘 사랑스럽게 보이던 순옥이 오늘 밤은 마치 속살이 비치는 잠옷을 입고 ‘어서 옷을 벗으세요’ 라고 말하던 아가씨처럼 보였다. 형기는 순옥을 쓰러뜨리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순옥은 거부하는 몸짓이었으나 소리치지는 않고 눈물만 흘렸다.
며칠 후, 순옥은 어머니가 몸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병간호를 위해 자기 집으로 가고 나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감을 더했다. 백형기는 매일 집안에 들어박혀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기도 싫었고 모든 일을 털어버리고 교회로 돌아갈 용기도 없었다. 만사가 귀찮아졌다.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까닭 없이 괴로워하는 손자의 모습이 안타까워 한 번씩 절에 가서 늦게까지 기도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다음 주일 오후에는 이현복 전도사가 심방을 왔다. 교회에 열심하던 백형기가 최근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기야, 교회 전도사님 오셨다.”
할머니는 방문을 열고 전도사를 안내했다.
“전도사님, 어서 오세요. 바쁘실 텐데······.”
형기는 펴놓았던 자리를 개키며 이 전도사를 맞아들였다.
“백 선생님, 몸이 몹시 안 좋으신가 봐요?”
이 전도사는 초췌한 형기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괜찮습니다.······ 산다는 것이 참 어렵네요!”
“대학 등록 문제는 어떻게 결론이 났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아 입대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맘대로 안 되네요.”
“최선을 다하고도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내 기도가 부족한 것이겠지요.”
“인간이 생각하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9절에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더 좋은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전도사님 참 이상하지요. 제가 교회에 열심하는 것 때문에 어머님과 멀어지고 아버지의 관심에서도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는 제가 절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아버님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대학입학 등록도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제가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 때문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 미움은 신앙인이 이겨내야 할 시련입니다.” 이 전도사는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에 대한 성경 말씀으로 위로했다.
형기는 이 전도사의 말씀을 들으면서 10년 전 천막 교회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요셉 이야기’ 생각이 났다. 미움 받던 요셉이 노예로 팔렸을 때 그의 인생은 끝난 것 같았지만 그 길은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었다. 요셉은 유혹을 물리친 것 때문에 2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형기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기는 하지만 요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동무’로 자기를 고향에 남겨놓은 것이지 미워하시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너무 점잖은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철없이 떼를 썼다면 나를 혼자 남겨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이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자. 억울함을 견딘 요셉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형기는 그날 이 전도사에게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다음 주일은 부활절이었다.
다음날, 형기는 대구에 있는 상준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그는 대학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친척의 건설회사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친구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함께 어렵고 외롭게 살았다. 형기와는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처지를 잘 알기에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 편지는 석 달 동안에 중장비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고 며칠간 휴가를 얻었다면서 오는 일요일에 청하 보경사에 놀러가자는 내용이었다. 형기는 친구의 소식이 반가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고 전도사님과 굳게 약속한 부활주일에 놀러 오는가?’ 친구와 함께하면 전도사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죄송하고, 그렇다고 모처럼 찾아오는 친구의 제안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전도사님께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예배에 불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형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친구 만남을 두고 저울질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부활주일 아침이 되었다. 점심때쯤이면 상준이가 도착할 것이다. 형기는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교회에 가서 전도사님께 오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돌아와서 친구를 만나자.’ 형기는 서둘러 교회로 향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예배를 마치고 예쁘게 색칠한 부활절 달걀을 하나씩 들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침 이현복 전도사가 교회당 문 앞에서 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주며 오후 시간에도 교회에 나오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전도사님, 오늘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죄송합니다.······.”
백형기는 망설이다 이 전도사에게 다가가 말을 꺼냈다.
“아−, 백 선생님 어서 오세요.”
이 전도사는 형기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게 악수하며 그를 예배당 안으로 이끌었다.
“오늘 일이 좀 있어서······.”
출입문 입구에서 머뭇거리며 형기는 다시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셨으면 됐습니다.”
“형기 씨, 반갑습니다!”
여자 반사들이 형기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빠! 오셨어요. 우리 주일학교 좀 도와주세요.”
형기 친구의 여동생인 정미가 말했다.
“백 선생, 어서 와. 오늘 부활주일인데 올 줄 알았어.”
교회 사택에 사는 양인자 집사가 형기를 반갑게 맞았다. 형기는 예배당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도 오랜만에 대구에서 찾아오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백 선생님, 예배 마치고도 얼마든지 친구를 만날 수 있잖아요.”
이 전도사는 방석에다 형기를 앉혀놓고 예배 준비를 위해 사무실로 돌아갔다. 형기가 예배를 마치고 나왔을 때 상준이가 교회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준아! 내가 교회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형기는 반갑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할머니가 교회에 갔다고 일러주었어. 주일날엔 네가 교회에 가는 것을 내가 모를까.”
형기는 상준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대학입시를 비롯한 그동안의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은 얼마 동안 교회를 쉬었어. 오늘부터 작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날인데, 네 편지를 받고 망설였어.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하지 못해 미안해.”
“오늘이 부활절인데 교회에 빠져서 되겠나. 허허허.”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기술이 제일이라는 숙부님의 말씀을 따라 3개월 만에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고, 맨 먼저 네가 보고 싶었어. 두어 달 연수를 거치면 정식 기사로 대우받을 수 있을 거야.”
“잘 됐어! 오늘은 늦었으니 우리 집에서 지내고 내일 아침 일찍 포항으로 나가는 첫차를 타면 오전에 보경사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백형기는 오랜 방황 끝에 부활절을 맞아 다시금 믿음의 자리를 되찾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