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신흠
조선시대 학자인 신흠(申欽, 1566~1628)이 지은 시조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노래의 효용을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 측면에서 찾고 있다. 초장에서 노래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시름이 많고도 많았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노래는 곧 사람들의 시름을 풀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중장에서처럼 아무리 말해도 채 풀리지 않는 시름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노래를 지어 부르고 나서야 풀렸다고 할 수 있다. 초장과 중장에서 노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을 제시한 반면, 종장에서는 이를 자신의 문제와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생각하고 있다.
만약 노래를 불러 가슴속에 쌓인 시름을 풀어낼 수 있다면, 자신도 노래를 불러 풀어보겠다는 것이 종장의 요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흠이 마음속에 맺힌 시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름을 풀어줄 노래를 “나도 불러 보리라”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는 이미 노래가 사람들의 시름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음을 알고 있다. 사대부(士大夫) 작가인 신흠은 이 작품을 통해 노래의 가치를 적극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다 넓게 보면, 노래인 시조가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시름을 풀어내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노래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은 민중들에게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하루 종일 깊은 산속에서 지내야 했던 나무꾼은 때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적막감과 피곤함을 달랬으며, 소꼴을 먹이던 목동들도 피리를 불며 지루함을 잊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를 하는 와중에서도 노래는 노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처럼 노래는 사대부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생활의 활력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김용찬,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 한티재, 2019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