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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촛불항쟁’을 통해서, 무능했던 정권은 결국 탄핵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는 과거 독재 정권시절에 자행되었던 온갖 부조리한 현상들이 계속 발생했기에, 그 무렵 한국의 사회를 진단한 저자의 책에는 ‘우리의 절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라는 부제를 붙여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저자는 자신을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키보드 워리어’라고 소개하면서,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8차례의 걍연 결과를 바탕으로 엮어냈다고 밝히고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시점에 읽은 이 책의 내용은 어쩌면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러나 몇몇 주제들은 여전히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갈등을 조장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기도 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노동과 역사, 정치와 언론, 종교와 교육, 그리고 국방과 미래 등 모두 8개 분야에 대해서 당시 한국 사회에 당면했던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읽으면서,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여 소화해서 소개하는 저자의 성실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먼저 ‘노동’ 문제를 ‘우리의 일자리는 어디로 사라지는가’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 있다. 2021년을 살아가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데, 특히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기술발전에 의해 점차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져가는 노동 분야의 현실은 앞으로도 긍정적인 전망을 점칠 수가 없는 영역이라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최근 대선 국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면서, 경제적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소득’이 그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갈등의 뿌리, 반복되는 역사의 모순들’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춘 ‘역사’ 분야에 대해서는,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갈등이 요인이 되고 있는 현대사 문제에 초점을 맞춰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극우의 논리를 대변하는 듯한 ‘신친일파’들의 논리는 이미 대중들에게 공감대를 얻기 힘들고, 앞으로도 그들이 우리 사회의 담론을 이끌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지금 이 시점에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영역이 바로 정치 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이 정파적 관점에 따라 논리와 비논리가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선이 아니라면 최악아 아닌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한국 사회의 정치도 마냥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분야가 바로 ‘언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미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들의 서식처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보도 태도를 보면 이러한 현상이 심회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냉정함 판단이다. 저자는 ‘조폭 언론의 날개 없는 추락’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현 단계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는데, 충분히 공감하며 읽었던 내용들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기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사실이 아닌 진실’을 추구하려는 일부 언론인들이 있어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도록 한다는 것이 하나의 위안거리로 삼을 수 있겠다.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안겨주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사회 갈등의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종교가 권력화되면서 때로는 정치와 결탁하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양심을 버리고 권력을 탐하다’라는 주제로 서술된 내용은 일부 종교인들에 국한되겠지만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이밖에도 교육이나 국방의 문제에 대해서 저자 나름의 식견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짧지만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출간 시점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그 당시와는 다른 환경에 놓여있으면서도,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내용들은 여전히 시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여겨졌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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