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도장공 배윤전(十六世 道藏公 裵潤全)
公의 휘(諱)는 윤전(潤全), 字는 덕언(德彦)이요 號는 도장(道藏)이며, 금역당공(琴易堂公) 휘 용길(諱 龍吉) 셋째 아들로 선조 37년(1604)에 태어났다. 공이 시례지가(詩禮之家)에 태어났으나, 겨우 6세 때에 부친인 금역당공(琴易堂公)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글을 배움에 뛰어나게 총명하고 영특하니, 맏형인 숙전공(淑全公)이 가르치기를 매우 밝게 하였고, 공도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공부를 하니 文章이 세상에 알려졌다. 좋은 계절을 만나면 시(詩)를 지어 회포(懷抱) 읊었는데, 아주 맑고 온아한 정취가 있었다고 전한다.
일찍이 류졸재(柳拙齋)·김표은(金瓢隱)·김야암(金野菴) 등과 같이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왕래한 서찰과 시(詩)를 주고 받은 것이 많았다.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모여서 경전(經傳)을 강론(講論하고 역사를 비평(批評)하였다. 백발(白髮)이 성성한 네 분이 함께 모여 앉아 계시면, 위엄있는 모습이 상산사호(商山四皓)가 모인 것과 같아서, 당시 사람들은 ‘계원사로(溪院四老)’라고 일컬었다.
公이 천문지리(天文地理)와 복서담명(卜筮談命) 등에 통달(通達)하였늩데, 특히 담명과 복서는 그때 명공장덕(名公長德)이 모두 와서 물었다. 학사 김선생(鶴沙 金先生)도 公을 진실로 인정하여 서찰(書札)의 주고 받음이 자주 있었다. 승지(承旨) 남연(南瑌)이 말씀하시기를 ‘배모(裵某)의 담명복서는 맞지 않음이 없어서 마치 신령(神靈)의 감응(感應)이 있는 듯하니 진실로 경복(敬服)할 만하다.’고 평하였다.
하루는 점괘를 풀어보니, 집안의 종이 그날 밤에 도망가는 것으로 나왔다. 다른 종을 시켜서 달아날 길목을 지키다가 잡아 오라고 보냈다. 명(命)을 받은 종이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과연 도망하는 종이 있었다. 길목을 지키던 종이 말하기를, “네가 아무도 모르게 도망을 쳤지만, 벌써 아시고, 나를 보내셨다. 어디를 가더라도 다 아실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데려왔다. 그후로 집안의 노비들이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또 하루는 여러 벗들과 함께 선어대(仙漁臺) 소(沼)에서 천렵(川獵)으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공이 속히 회(膾)를 하라고 독촉하였다. 회를 거의 먹었을 무렵에 한 사람이 친복(親服)을 당해서 떠나게 되었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복하였다. 또 공의 아들이 나이 이미 장성(長成)했음에도 장가를 보내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공은 태연히 ‘장가를 보내면 곧 죽을 것이다. 그래도 더 사는 것이 다행일 듯해서이다.’라고 말하였다. 그후 아들의 나이가 29세에 됨에 어쩔 수 없이 장가를 보냈는데, 그해 가을에 아들은 객사(客死)하였다. 그래서 공의 손자인 섬(暹)이 유복자(遺腹子)이다.
이 당시에 어떤 재상(宰相)이, 조정에 천거를 할 것이니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벼슬을 하고 임금님의 총애를 받는 것도 명수(命數)가 있는 것이다. 잠시 윗사람을 속여서 벼슬을 한다면, 부귀영화를 탐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 정승은 ‘공의 확고한 뜻을 흔들 수 없다’ 하면서 탄복하였다. 저술한 글이 반드시 많았을 것인데, 지금 전하는 것은 만사(挽詞)와 詩 7편, 만록(漫錄) 1편이 전할 뿐이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 아니할 수 없다. 종현손(從玄孫) 집(䌖)이 유사(遺事)를 썼다.
配는 의인청주정씨(宜人淸州鄭氏)니 면(俛)의 따님이다. 묘소는 안동군 예안면 주진동(舟津洞) 삼산(三山) 앞 묘좌(卯坐)이다. 상석(床石)이 놓여있다.
● 시례지가(詩禮之家) : 가정 교육에서 시(詩)와 예(禮)를 가르치는 것으로 사대부(士大夫)의 가문을 말함.
● 류졸재(柳拙齋) : 유직(柳㮨):1602(선조 35)∼1662(현종 3). 본관은 全州. 자는 廷堅. 호는 百拙庵 혹은 拙齋. 父 友潛. 居 安東. 1630년 式年試 3등으로 진사에 합격함. 1635년 황해도 유생들이 成渾과 李珥를 문묘에 배향하려는 논의를 일으키자 영남 선비의 영수로 추대되어 1,000명의 선비들과 예궐하여 그 부당함을 주장하고 저지시킴. 저서로는 《百拙庵集》이 있다. 李惟樟이 행장을 짓고, 丁範祖가 묘갈명을 찬함.
● 김표은(金瓢隱) : 김시온(金是榲). 본관은 義城. 자는 以承. 호는 瓢隱. 父 澈. 居 安東. 병자호란이 끝난 뒤 출사를 단념하고 은거함. 이후로 독서에 전념하여 제자백가 및 경학에 통달함. 崇禎處士로 불림. 1735년 司憲府執義에 증직되고, 道淵書院‧擎節祠에 제향됨. 저서로는 《瓢隱集》이 있다. 許穆이 묘갈명을 찬함.
● 김야암(金野菴) : 김휴(金烋). 본관은 義城. 자는 謙可. 호는 敬窩. 父 是楨. 居 安東. 金玏의 외손. 盧景任·張顯光의 문인. 李爾瞻 일당 鄭造가 慶尙監司가 되어 陶山書院을 참배하고 그곳에 성명을 기록해두자, 분개하여 그 이름을 도려냄. 정조가 앙심을 품어 화가 미칠 것 같았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화를 면함. 저서로는 《海東文獻錄》‧《敬窩集》 등이 전함. 金聖鐸가 행장을 지음.
● 상산사호(商山四皓) : 진(秦)나라 말기에 폭정(暴政)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던 네 명의 노인을 말하는데, 후세에 나이도 많고 덕도 높은 은사(隱士)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복서(卜筮) : 길흉(吉凶)을 알기 위(爲)하여 점(占)을 침. 또는 그 점(占).
● 담명(談命) : 운명을 점침
● 명공장덕(名公長德) : 덕행과 명망(名望)이 높은 사람
● 남연(南瑌):1598(선조 31)∼1664(현종 5). 본관은 英陽. 자는 鍊夫. 호는 无妄齋. 父 隆達. 祖父 庭元. 居 安東. 鄭元黙의 외손. 1624년 式年試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泗川郡守로 부임하여 흩어진 병사를 모아 싸움터로 달려가다가 항복 소식을 듣고 귀향함. 그 후 都承旨에 증직됨. 저서로는 《泗川日錄》‧《柵門記事》‧《新安世稿》 등이 전함. 李惟樟이 묘갈명을 찬함.
● 선어대(仙漁臺) :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길이 109.40km)이 절벽을 휘돌아 흐르는 곳에 형성된 넓고 깊은 소(沼)와 주변의 언덕을 가리킨다. 안동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곳.
● 천렵(川獵) : 냇물에서 놀이로 하는 고기잡이.
● 만록(漫錄) : 정한 주제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쓴 글.
● 종현손(從玄孫) : 형제의 현손(玄孫). 현손은 孫子의 孫子를 말함.
족보를 보니, 슬하에 3남 4녀인데, 아들은 興璧, 興喆, 興玉이고, 따님은 류상? 李亞 金碩佐 琴聖奎에게 출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