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이 가깝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시작하였듯이 그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끝을 생각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끝이 없이 영원히 살거라 착각하고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오로지 하느님 만이 영원하심을 생각하고 그 하느님 앞에 나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온전하게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 큰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그 어느 것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결국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어떤 자리도, 세력도, 힘도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다고 잘난 척을 해도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고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 들어갈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사라질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세력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강합니까. 하지만 세상의 끝에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리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세력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아무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하늘의 세력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해와 달과 별처럼, 그리고 하늘의 세력들처럼 위세를 떨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마지막 날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은 창조주이신 하느님 한 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한 이들에게 세상의 모든 권한이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세력들에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기대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마지막 날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니엘 예언서에 따르면 그 끝에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와 영원한 치욕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현명한 이들은 곧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이 별처럼 영원히 빛나게 된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세상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사람들을 정의로 이끈 이들이라 하십니다.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이들이라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서로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것,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사제들이 바로 이런 삶을 지향하는 이들입니다. 사제들의 사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삶이야말로 우리를 죄에서 이끌어내는 삶입니다. 사제들이 바치는 제물은 죄를 씻기 위하여 그리하여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바치는 제물입니다. 제물이 죄를 씻고 정의로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그 제물은 참된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죄를 씻고 정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면 그런 제물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을 고발한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합니다. 요한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조용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세상의 권력은 어둠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비호합니다. 그렇게 떡고물을 먹으려 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진실이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분명하게 여우 같은 헤로데를 고발하시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수석사제와 원로들의 위선을 가차없이 비판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예언자들을 죽이는 그들이지만 마침내 다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이들이 그들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사제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사제들은 이 세상의 어둠과 불의를 고발하는 이들입니다. 사제가 사제의 역할을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살아계실 수 있습니다. 사제는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제물이 되어야 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참 제물이십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사제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하게 하느님 앞에 제물로 바치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제물을 바칠 수 있을 때라야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씻을 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죄를 씻고 마지막 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되게 제물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삶, 정의로운 삶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느님 앞에 데려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도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올바른 삶, 정의로운 삶을 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다운 제물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참다운 제물로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세력들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나설 준비를 하는 삶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의지했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참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욕망과 정욕도 결코 우리에게 참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이런 것들에만 의지한 삶은 결국 허무로 끝날 것입니다. 죄의 끝은 허무입니다. 죄와 그 유혹이 아무리 달콤하여도 결국 사라지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무너져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그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삶, 사랑을 실천한 삶은 영원합니다. 올바른 삶은 영원합니다. 이웃에게 베푼 선행은 영원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영원하신 하느님이 바로 그들의 선물이 되어 주십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삶을 청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영원한 생명, 영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이 죽음의 길은 하느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지나가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따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러므로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는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세상의 유혹과 탐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세상의 권력과 재물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비겁하게 살게 합니다. 이런 세상의 눈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치욕이요 패배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 속에서도 이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됩니다.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바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모시는 것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죽음의 길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이 단순히 예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사는 이들입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기 마련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영생이란 이런 세상과 육체적인 삶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축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지만 하느님의 자유와 해방과 구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찾고 구하는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성인들이, 순교자들이 그 길에 동참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쁨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넘어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찾는 지혜롭고 축복 가득한 삶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