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사람 좋은 이발사 뒷집에 살았다 비좁고 낮은 이발소에 다리 내려앉은 남자, 하얀 면도 거품은 높은 문턱을 넘어 샘가에서 만들었다 발등 움켜쥔 두꺼비 손으로 흐느적 걸음을 옮겨 놓은 이발의자를 짚고 큰 상체 끌어당겨 냉큼 올라앉았다 담 너머 숨죽이며 보고 있던 나는 늘 조바심 났다/금 간 유리창, 그 선을 따라 알록달록 꽃들이 피어있었다 어느 늦봄, 이발사가 늦장가를 가는 날이었다 공중이 높던 남자도 잡을 게 있어 들뜬 걸음으로 샘가를 오갔다 절룩이던 이발소가 더는 낮아지지 않았다/그 집, 흙 담벼락 뾰족뾰족 튀어나온 병조각이 날 무뎌진 면도 칼날을 좌우로 문질러 주었다 담장 위로 남자의 미소는 두둥실 떠다니고 내 키도 쑥쑥 자랐다/넓어진 이발소 뜨락, 아이들 소리 떠다니는 동안 그 동굴에서 우화羽化한 그네들이 집게발로 웃음을 낚아챘다 꽃종이 창문도 달그락달그락 웃었다 시리게 높아서 낮아진 허공이 앉은뱅이 꽃그늘 위에 바짝 당겨 앉았다
「85B」(2023, 북랜드) 전문
시인은 85학번이다. 1985년의 굵직굵직한 국내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구속영장도 없이 약 60여 일 이상 자의적 구금, 불법적인 고문을 자행했으며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인 WIU 유학생과 관련자 15명을 간첩과 방조자로 발표한 사건으로, 2020년에 와서 재심이 이뤄지면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국제그룹 해체 사건. 전두환 정부는 1981년 12월에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 대해선 각종 특혜가 주어졌다. 이런 기업들은 대출원리금 상환을 유예받았고 이자 지급과 조세를 감면받았다. 뿐만 아니라 종잣돈으로 불리는 '시드머니'를 비롯한 금융과 세제상의 특혜까지 주어졌는데 이를 통해 재미를 본 것은 대부분 재벌 그룹이었다. 그녀의 시들 중 여자 속옷 사이즈인 ‘85B’에 빗대어 “85학번의 눈물/시크한 나의 혈액은 B, 문학개론 학점도 B”라며 그야말로 시크하게 쓴 「85B」는, 개인이 통과한 시대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최루탄 가스로 맵싸하다.
그렇더라도 서정랑의 시는 저러한 크고 요란한 세상의 표정보다 작고 소박한 대상들을 주목한다. 「앉은 꽃」은 수십 년이 흘러 이제는 마음이 무뎌졌을 수도 있는 화자가, 하지만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들려주는 기쁘고 즐거운 노래다. 몸 불편한 이발사에게는 잡을 것 없이 높기만 하던 공중이, 그의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진 시의 마지막은 꿈꾸듯 아름답다.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 나옵니다.”라고 소설가 김연수는 쓴다. 방금 우리는 이유 없이 다정한 시 한 편을 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