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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한 자기애에 도달하기 위한 극기
<네 전부가 내 사랑이다> 박수림 시집
사람이나 사물이나 이력을 알려면 과거로 눈을 돌리게 된다. 더욱이 최근작으로 다가오는 세 번째의 시집을 이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박수림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꽃잎 하나 터질 모양이다》와 두 번째 시집 《당신을 바라보는 거리》에 눈을 들이대 보았다. 첫 시집 속 <다보도>의 “아무도 머물러 주지 않는 밤/등대 불빛에 꿈틀대는/불임의 여자 너를 안는 건 비릿한 바다/흔들릴 수 없는 맺음이여.” 에서는 사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떨칠 수가 없다. 또한, <고드름>에서는 “오류가 잦아 금세 잊고 잊혀져가는/뜨거운 가슴을 상실한 메모리의 일부/내 삶은 날마다 수척해져 가고/뿌리 없는 그 자리에 나는/날마다 새로운 음모를 꾸민다.”며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첫 시집에서는 사람에 대한 강한 집착의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자신의 살아온 세월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성性을 지켜내기 위한 오기로 똘똘 뭉쳐진다. 그러한 것들 마저 세 번째 시집까지 건너오기 위한 징검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널 때마다 시인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많은 고뇌를 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어차피 우리의 삶에 빈 곳으로 버려진 공간은 절대 없다. 헛살아온 것처럼 느껴진 세월이 다 자신의 진정한 삶이라고 본다면 박수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충분한 이유를 갖고 세상에 들이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삶이 무릇 깊어지면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삶도 결국은 자연의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박수림 시인의 시가 요즘 그렇다. 그토록 자신을 짓누르던 등짐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내려놓아야 가볍고 헐거워져야 신명 나는 법이다. 최근의 시를 들여다보면 많은 말이 아니어도 행간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것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성숙의 고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나 견뎌내는 고통스런 과거는 아니다. 어차피 스스로 씌운 굴레였기에 그 굴레를 벗겨내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은 처절한 자기 반성과 후회에 이어 고통을 수반하는 심신의 수양을 요구한다. 그쯤 되면 단물이 다 빠져 맛을 알 수 없는 풍선 껌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씹으면 끝없이 단물이 혀를 자극한다. 박수림 시인의 시는 삼켜도 단물이 입안에서 맴도는 유년의 마술 같은 풍선 껌 같다. 부풀어져 풍선이 되는 시를 입안에다 넣고 팽팽하도록 바람을 불어넣어 보았다. 작은 입보다 몇 배는 부풀어 커지는 풍선 껌이지만,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터지고야 마는 풍선일 수밖에 없다. 터져야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세상이다. 세상을 향해 톡톡 터지는 소리가 시다. 최상위 문학이라는 시는 어쩌면 인식된 세계를 내면화한 그리움으로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주술적 행위일 수 있다. 그래서 박수림 시인의 시는 전통적인 시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이어오고 있다. 서정성이 강한 시를 통해 김소월의 진달래에서처럼 과거 속 떠나가는 정인情人에게 기다림의 비원悲怨을 퍼붓거나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다가왔던 것들을 오롯하게 다 놓아주되 아이러니하게도 내면으로는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다소곳이 온존溫存한다. 기다림의 미학은 매번 단절되지 않으면서 감상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의 본원인 서정에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림의 시에는 증오나 원망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복숭아 뼈 싹 틔울 것인지 간 밤 발 목 휘청이더니 힘줄 한 가닥 물 오르며 도톰히 몽울이 졌다 자목련 봉긋한 가슴 며칠 새 부풀어 오르더라니 봄 오는 길목이란 이렇듯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맞이할 수 없는 것임을 발목에 핀 연분홍 꽃잎이 길 가 한 켠 나무 벤취에 걸터 앉는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마른가지에 물을 주듯 천천히 메말랐던 가슴을 적신다 촉촉히 젖어드는,
-<꽃발찌> 부문
시인의 눈은 삶이고 생을 관통하는 시간의 전부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보이는 것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자연의 변화를 감지해내는 감각은 여성이기에 앞서 산통을 아프게 겪어낸 모성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복숭아 가지의 비트는 소리까지 산모의 고통스런 기억으로 환유하고 있다. 몽울을 잉태한 가지마저 나무만의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기에 그렇다. “찰랑찰랑 발목에 핀 꽃발찌 걸음이 어색하다”는 말이 그래서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자신이 걸어온 역경의 긴 터널도 그랬듯 작금의 어색한 봄이 그렇다고 본 것이다. 몽울진 가지에서 핀 꽃발찌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 질 거라는 예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분적인 취사가 아닌 전부가 사랑이라고 인식한다. 매사에 긍정적인 인식은 당연한 봄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봄 오는 길목이란 이렇듯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맞이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조심스럽게 속내를 비친다. 봄은 사람처럼 가리거나 혼자 오지 않는다. 온 산을 불 질러오듯 번져오기 때문이다. 봄을 피우기 위한 대상은 자연에 한정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온 생으로 전화轉花한다. 그런 예는 <열꽃>을 통해 좀 더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꽃 샘 추위에도 지지 않던/갱년기 열꽃/살얼음 가득한 냉면 한사발로/단번에 떨어뜨렸다/열꽃 진 자리에/봄 동 겉절이가 붉게 물들어 있다/꽃샘바람 지나가는 자리에도/봄 꽃 피겠다”고 말해버린다. 꽃샘추위는 봄을 예비하고 있는 복숭아의 마른 가지를 고통스럽게 뒤흔들어 생사의 기로까지 몰고 갔을 것이다. 그런 벼랑 끝 상황에서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생을 전제로 극복해낸 세월이다. 어찌 보면 겨울 끝은 삭막한 갱년기 여성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척박한 겨울처럼 건조한 심상을 다독여주는 마지막 혼신일 열꽃은 그래서 쉽게 아무 때나 피워내선 안 될 절박함이 있다. 절박한 시적 상징은 매번 모양을 달리 하지만 변주의 궁극은 전일적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렇기에 상처처럼 피어나는 ‘몽울’과 ‘열꽃’은 사랑과 닮은꼴이다. 박수림 시인은 메마른 사회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일상적으로 목도한다. 그러나 매번 그것을 우리가 사는 사회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꽃샘바람 같은 폭력성이 혼재된 사회지만, 아직도 살만한 사람의 관계로 인식한다. 살만한 세상 속으로 저녁은 노을을 지우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차피 노을에 물들어가는 인생도 불타는 태양의 한 귀퉁이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집으로 가는 길도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나이가 있다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가득담은
풀어진 동공이 노을일때가 있다
골목 하나를 떠올리지 못하여
낯선 길로 접어 들때
북새처럼 흩어지는 삶의 귀퉁이들
이미 길의 끄트머리에서 내려놓은 슬픔이다
덤덤하게 삭히는 빛의 줄기
할 말을 끊고 멈추게 하는 쓸쓸함이다
사는 건 말이다
개인날의 기억보다
궂은날의 기억이 더 큰 것이다
사랑했던 날보다
이별했던 기억이 더 큰 것이다
기억해서 기쁜 날 보다
잊혀져서 슬픈 날이 더 많아
석양 모퉁이가 아리도록 붉은 것이다
그렇게 잊어가는 것이다
마지막 그 기억을 위하여
노을처럼 붉게 사는 것이다
-<노을은 붉다> 전문
집요한 것이 어둠이다. 어둠은 시시때때로 환한 낮을 탐한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불덩이 같은 태양이 어둠에 먹혀들지도 않는다. 그래서인가 행의 문장이 예사롭지가 않다. 행과 행이 천 길이다. 시인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싶어 손가락으로 헤아려본다. 너무 무심했다. 그럴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굳이 나이 탓으로 되물을 필요가 없다. “집으로 가는 길도/기억에서 지워져가는 나이가 있다/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가득담은/풀어진 동공이 노을일때가 있다/골목 하나를 떠올리지 못하여/낯선 길로 접어 들 때/북새처럼 흩어지는 삶의 귀퉁이들/이미 길의 끄트머리에서 내려놓은 슬픔이다/덤덤하게 삭히는 빛의 줄기/할 말을 끊고 멈추게 하는 쓸쓸함이”라며 단언한다. 그런 시행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아무렇지 않은 듯 더는 읽어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은 세월에 묻혀 나이를 먹는다. 박수림 시인이 불득불득 지나온 세월이 지천명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지천명이라면 평범한 사람이 아닌 하늘과 교접하는 반신半神이다. 그런 시인의 집은 어디일까.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세월 동안 드나들던 집을 잊었을 리 만무하다. 그것은 그동안의 삶이 녹록치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루하루가 북새처럼 훑어지던 삶이 떨어져나가기 직전 귀퉁이를 부여잡은 심정을 표로하고 있다. 긴 여정 속 행복의 결여는 무엇이었을까. “사는 건 말이다/개인날의 기억보다/궂은날의 기억이 더 큰 것이다/사랑했던 날보다/이별했던 기억이 더 큰 것이다/기억해서 기쁜 날 보다/잊혀져서 슬픈 날이 더 많”았다며 비원을 담은 듯하지만, 끝내는 비원마저 거두며 담담히 노을 앞에 서 있다. 기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시인이다. 노을은 하루만의 노을이 아니다. 자신도 저렇듯 긴 세월을 붉게 물들이며 지금껏 저물어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못내 어둠으로 사라지는 노을도 대자연속에서 하나가 되듯 어차피 사람과 부대끼며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친 소리도 궁극은 화음을 이루기에 같다는 것이다.
삐걱이는 뼈마디 맞추는 소리
뚝뚝 부딪친다 기차의 마디도
반듯해지기 위하여
철로의 간격을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부드러운 앙상블이 되기 위하여
낯선 것들과 만나 톱니바퀴를 이룬다는 것
간격을 벗어나 이탈하고 싶어질 때
철로의 길 위에서 회음을 이루는
첫 기차를 생각한다
-< 첫 기차가 지나간다>부문
시인은 사물을 보고 시 쓰기를 마다치 않는다. 다양한 사람과 부대끼는 기차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기차의 속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는 모양이 같은 객차를 필요에 의해 다수 연결하여 운행한다. 그래서 기차는 우리가 사는 사회 구성원에서 한 개체일 수밖에 없는 시인을 닮았다. 서로가 다른 바퀴를 달고 각각의 레일을 굴러가는 것처럼 시인의 삶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에서 당연히 사회라는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매 순간마다 다른 소리가 날 것은 뻔하다. 그렇지만 함께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보듬으며 달려가야만 한다는 것에 스스로 절실해져 다가간다. “삐걱이는 뼈마디 맞추는 소리/뚝뚝 부딪”치는 소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마저 듣고 싶은 그리움에 몽매해 하고 있다. 긴 인생을 통해 이제는 그마저도 자신의 것임을 알아간다. 한때 일상처럼 달라붙었던 쓸쓸함, 외로움, 눈물 같은 희로애락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때가 있었음을 이제는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쉽게 떨쳐버릴 수 없어 옭매였던 시절이 그랬다. 그러나 갇힌 사고의 틀에서 사물을 바라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아 갈 수밖에 없는 절실함에 껍데기를 깨기 시작했다. 그토록 당도하고 싶었던 정점은 자기에 대한 진정한 사랑임을 알았다. “낯선 것들”과 “간격을 벗어나고 싶어질 때”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극복하여 “내 몸의 화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자신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좌절 속 긴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마저 긍정으로 수긍해간다. 그런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것도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솔한 마음은 <휘파람>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휘파람 나즉히 불며/허허벌판을 걸어 오는데요/달이 자꾸만 무리지어 따라 오는데요/부끄러움이 얼굴을 붉히고/두 손이 꼬물거리며 어찌 할 줄을 모르는데요/날마다 걷던 이 길조차도 오늘은 왠지 낯설기만 하구요/휘파람 나즉히 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데요/먼 훗날 한 소절씩 기억하고 싶은데요/저 달이 자꾸만 기웃거려요/소슬한 바람에 풀 잎 부딪치는 소리보다/더 고운 그대 휘파람소리/ 꼭 그리울 날 있겠지만요/오늘 가슴 끝까지 설레이는 건 아마도 사랑일” 거라고 참았던 그리움마저 못내 사랑이었음을 말해버린다. 홀로 부는 휘파람소리와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는 소리와 불협하지 않고 화음을 이뤄내는 것조차도 여간 조심스러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몸담아온 시적 세계가 곧 현실이고 운명처럼 주어진 절대 고독도 자기애의 발현을 위한 숙성의 긴 시간이기에 그렇다.
혼자 사는 것
어둠 앞에서 더 붉게
더 격렬하게
열정을 토해내는
노을이 그렇듯
늦은 오후
어스름한 어둠이 깔릴 때
왼종일 발품을 팔던 태양의
파란만장한 마지막 유언이
저렇듯
지금 난 붉어지기 위하여
온 몸을 태우는 중이다
-<여정> 부분
“혼자 사는 것”을 홀로라는 의미로 다시 생각했다. 그런 이후로 이명처럼 귓전을 맴도는 그 말이 평범한 시행을 겨눈 것은 절대 아니다. <여정>이란 시를 읽어가며 사람은 스스로 고독해져 가는 연습을 통해 절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독은 고립에 다름 아니겠지만, 또 다른 내적 자유를 향한 시인만의 의미 공간을 획득함으로써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스로 “혼자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결코 남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들의 틈에서 함께하지 못하고 틈의 바깥으로 밀려 나온 듯한 가난마저 그렇다. 가난과 글쓰기는 동의어라고 해도 어색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스스로 남루에 빠져 들어 사회에서 도피나 은둔으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자기 회복의 수단을 찾기 위해 긴장을 놓지 않고 의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미 정형의 상처를 앓아본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내면에서 홀로 도진 사랑이었다. 시인은 그것을 결코 사랑이라고 말하지도 않지만, 구애와 구도의 자세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누구라도 혼자 사는 것과 어둠 앞에 서면 분명 고독이고 마음속 상처가 된다. 그 상처를 치유 불가처럼 “늦은 오후/어스름한 어둠이 깔릴 때/왼종일 발품을 팔던 태양의/파란만장한 마지막 유언이/저렇듯” 시인을 삶의 벼랑으로 내몰았지만 쓰러지지 않는 오기로 버텨내 일몰 속 어둠에 쉽게 묻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편견이나 우려를 일거에 무색하게 불식하고 만다. 그것은 오랜 상처를 치유해내는 시인만의 독특한 주술적인 창작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난 붉어지기 위하여/온몸을 태우는 중이다”라며 타의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시 어디를 봐도 상처에서 도진 멍울 같은 사랑의 문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 연유인지 모르나 삶의 고통을 통과한 언어는 아름답다. 그렇기에 모든 면에서 당당하다. 붉어지거나 온몸을 태우는 행위야말로 소멸이 아닌 변증법적 사랑의 직유다. 그렇기에 시인의 삶 속 풍경은 말랑말랑하지만, 속으로는 시처럼 더 단단해지고 있다. 시인의 삶이 “가난하게 사는 것/글 쓰며 사는 것/가끔/술 한 잔으로 가슴 적시며 사는 것”이라며 흐트러지는 듯해 보이지만, 어느새 <시와 나>에서 처럼 “그럴수록/더 들이대며/우리는 지금도 맞짱을 뜨”겠단 각오를 다진다. 당찬 여성성으로 덧칠된 천상 시인임에 분명하다. 신호 대기 중 나무에서 떨어진 감이 땅에 부딪히며 내는 둔탁한 소리는 비명에 가깝다. 비명으로 들리는 단말마를 생동감으로 되받아치는 저 거침없는 도발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
일터로 향하는 내 발 아래에서
기쁘게 썩어 가는 주검 바라보며
푸른 신호등 건너지 못하고
떫은 삶 우려내듯 살아보자고
퉁명하게 뱉어내는 소리
한 가을날 내 삶도 가을인양 물들어보자
푸른 신호등 앞에서 당당하게 건너보자
해질녘에 뱉어내는 내 삶의 거침없는 소리
-<퉁명한 소리> 부분
사물이 시인의 눈에 들어오면 심미안을 거쳐 내적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 모습은 사물뿐만이 아니고 사물이 내는 소리까지도 해당된다.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는 어찌 보면 죽음에 이른 절망의 소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은 죽음에 이른 소리를 어느새 “해질녘에 뱉어내는 내 삶의 거침없”는 생동의 문장으로 변화시켜내는 놀라운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낙과에 불과한 감이라는 개체를 시인은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것은 “횡단보도 앞/감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단단하지 못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감이/보도블럭에 내동댕이쳐 이즈러져 있다/물러 터져도 견디며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던 자신을 보게 된 결과다. 감나무에 매달린 많은 개체 속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감은 단순한 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린 감이 곧 시인 자신이었음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직감한 것이다. 낙과된 감을 통해 사는 것은 죽음이나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란 것을 재 확인한다. 그래서 박수림의 시적 언어는 단순한 서정이나 미적 심상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강인한 내적 세계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러한 긍정으 에너지를 사회라는 구조에 선순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심리적 구속에서 오는 탈 경계를 지향하는 존재론적인 사랑으로 받아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자각이나 인식은 시적 언어를 통해 더 견고해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물이 전해오는 시적 세계와 맞선 대립보다는 다소곳한 수긍으로 다가간 연유다. 이후 긍정적인 인식으로 자신에게 지속적 긴장을 유발하고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나아간다. 그런 모습들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고사枯死>에서도 일반적 의미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죽음을 연상케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시인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옥죄던 외부적인 것에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둥민둥 허물 벗으며/엉망진창의 늪으로 드러누워/너, 무지하게 꼬이고 있었다//팔색조 같은 세월보다 더 못난이가 되어/아토피 온몸에 달고/긁적긁적 부비며 다시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죽음을 간파한 삶은 이미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기약 없는 기다림일지라도 여유를 부린다면 오버일까. 그것은 절망적인 삶을 건너온 긴 시간 속 과거의 든든한 징검다리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건드리고 싶은데
지금의 너도 그리워질 것 같아
나를 감추느라
멀리서 바라보고 있어
네 스스로 드러낼때까지
나 여기 있을께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앙상하고 휑한 모습의 너라도 괜찮아
머잖아 우리 서로 알아갈 때
네가 얼마나 온순하고 포근한지
안아보자
사랑을 틔워보자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네 곁에 다가가는 날
손꼽아 기다릴게
-<겨울 산>전문
시는 매번 명징한 의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한편의 시가 매번 철학적이거나 심오한 사유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세계 속에는 구조화된 사유가 미완성으로 끝이 나도 시의 감을 현저히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더욱이 시의 구조 속에 사람과 사람은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과 사물, 보이지 않는 사상思想과 보여지는 사상事象에서도 시인은 내적 자유의 미로를 만들어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그러한 세계에서 <겨울 산>은 좀 더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대상화되어 시적 세계를 이루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대상화된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상虛像 같은 감상으로 형성된 심상心想속에 존재하는 사람만을 문장으로 드러내는 것도 적절치 않다. 그래서 <겨울 산>은 시인이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이력 같은 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버리듯 하고 떠나갈 수 없는 삶의 방정식으로는 풀릴 수 없다는 것을 상상했는지 모른다. “네 곁에 다가가는 날/손꼽아 기다릴게” 라며 무한의 시간을 암시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도저히 풀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물론 모호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사유思惟속에서는 그 모호성을 상징성에 견주어 새롭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속에 은폐한 모호성은 시인이 살아가며 추구하는 사람 간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다. 그런 시적 대상이 무릇 사람이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섬>에서 시인은 밥상 위에 놓인 흔히 “해우”라고 하는 김 조각을 보며 시적 발상을 이루고 있다. 물상에 가까운 김 한 조각에서도 그리움을 찾아내는 시인은 타고난 여자 이전 진정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단단히 말라버려 더는 심해 속 기억을 할 수 없는 김 조각일 뿐이다. 그런 김 조각에서 그리움마저 잦아져 버린 섬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섬은 “마른 그리움”으로 인식된 시인의 자아임은 분명하다. 그 자아가 궁극으로 지향하는 곳은 사랑이 충일한 “둥근 밥상”으로 심상 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던 해원解寃인지도 모른다.
콩 한 말 팥 두어 되 머리에 이고
매서운 겨울바람 등에 진 채
이 십리 길 허허벌판길 걸어가실 때
우리 어머니 발에 신겨진 하얀 고무신
----<중략>----
돌아갈 수 없는 길을 한탄하시던
눈 위로 가느다란 그림자 휘청이며
털신 신고 마실 가시는 어머니
얼었던 발가락 관절로 굽어
서로 안쓰러운지 포개 안았다
-< 흰 고무신> 부문
요즘 흔치 않은 흰 고무신의 추억을 안고 사는 세대라면 우선 배를 곯다보니 먹는 것이 귀한 시절을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가난도 죄라는 말이 있듯 자신의 생래적 남루를 스스럼없이 고백하기까지 시인은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으”셨다는 시인의 어머니처럼 어쩌면 시인도 주변머리가 없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시적 표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겨울날 동상을 앓으셔야만 했던 고단함/부어오른 발등만큼/서러운 마음 감각 없는 발걸음에/쏟아내던 눈물 한양동이는 되었을거라”는 말로 속내를 주변머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누구나 성장기 부모에 대한 추억은 남다르다. 그렇지만 박수림 시인의 추억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왜 그럴까. 한 시절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끝내 지병에 이르게 된 생애의 고통이 되었기에 그렇다. 어머니의 “얼었던 발가락 관절로 굽어/서로 안쓰러운지 포개 안”겼다는 상상력을 사진처럼 보여준다. 그런 어머니와 흰 고무신의 상관성은 그래서 매우 회화적繪畵的이지만, 시인의 내면에서는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분명하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시인은 불우했던 시절을 불편해 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담담한 회상에 잠긴다. 묵상하듯 어머니를 회상하며 오히려 어머니와 달리 현실 앞에서 강한 삶의 주체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흰 고무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공감을 불러오는 시적 매개체로는 충분히 성공한 것이다. <어머니의 틀니>에서 시인은 “꿈길처럼 생시처럼 걸어가는 발자국은/꺾어질듯 휘청거려요/눈 깜짝 할 새 뒤돌아볼 건덕지도 없어서인지/씹어도 아무 맛이 없는 세월”을 대신 잘근잘근 씹어드리며 포개진 발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을 어머니가 “그나마 웃음 채울 텃밭으로 마실” 갈 거라며 고통 같은 슬픔을 희화해 그나마 아픔을 완화시킨다. 박수림 시인의 시는 항상 조용하고 조신하다. 그렇지만 숨어있는 과거의 지을 수 없는 그리움을 <월경>에서처럼 “혹독한 내 겨울은 얼마나 남았는가/해걸이를 하는 나목들/소담스런 첫눈을 보지 못한 까닭으로/눈꽃 한 송이 피워내지 않는/무배란의 계절//이 겨울의 늪에/메랄드빛 쩌렁한 하늘을 향하여/붉은 꽃잎”을 기어이 피워내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여준다. 의지가 지향하는 곳은 내면에서 뜨겁게 꿈틀대고 있는 지극한 사랑이란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사랑은 어느 곳에나 투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질근질근 밟을수록 넓어져가는
길목 어디에서나
봄 햇살에 불어나는
나뭇잎들의 푸른 그늘
어쩌면 그대가 나눠주는 사랑인줄
넉넉히 압니다
-< 봄 햇살에 길을 묻다>부분
앓다만 사춘기
숨겨놓은
마음하나 내려놓기가
이렇게 화끈거리는 일 인줄 몰랐다
지독한 신열로 끓어오르며
닫았던 가슴 열어주는 못된 주기
한여름 달빛 품은 자목련처럼
낯선 계절을 맞이한다는 것
-<갱년기> 부분
박수림 시인은 <봄 햇살에서 길을 묻다>에서처럼 직설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은근하게 사물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말을 대신한다. <갱년기>에서는 자목련을 가리키며 말을 하지만 사실은 “한여름 달빛 품은” 사랑이었다며 스스럼이 없다. 박수림의 사랑의 시학은 한 사람에게만 향해 올인한 사랑으로 멈추지 않는다. 그런 과거의 한때가 있었다. 스스로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그어 갇혀 지내던 자학의 시간속 고통이었다면 작금의 시속에서는 어디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는 탈 경계의 사랑으로 인식된다. 사랑이라는 경계를 스스로 지워버리고 내면 속 자유를 통해 자신이 지금껏 알 수 없던 사랑의 힘을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들어 부쩍 환해진 시인의 삶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금번 시집 속 시의 세계는 각각의 시가 의미하는 그리움이 천의 얼굴로 다가와 하나의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런 수렴이 정지하는 지점은 작아져 사라져버리는 소실점이 아니라 더 많은 곳으로 확산되는 지향점이란 것이다. 그런데 지향점의 바탕은 견고하거나 완벽해야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의 층위를 넘나드는 허당이라는 비유어는 시인에게 적절한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니 부럽다. 그런 별명 같은 시호를 받았으니,
진지하게 살아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안다 확실히
바로 보고 바로 알고 바로 그려야만 하는 세상
그 길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제 색깔을 입히지 못하는 것
잔뿌리에 걸려 넘어져서도
돌멩이에 부딪혀 엎어지면서도
그 까닭을 모르고 아무 일 없는 양
생채기 하나 옹골지게 안은 채
일어서 버릇한 삶
격한 말 한마디에도 헤집는 자존심 긁힘에도
세상 다 살아버린 듯
웃으면서 털어버리고 잊어버리는 습관
나는 허당이다
만인이 알아주는 허당그래도 좋다
-<완전한건 없다> 부문
그래서 언어의 층위를 가리지 않는 시인의 시 세계가 당연히 지향적 이어야함을 시인은 잘 안다. 그렇다면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온 시인에게 허당이란 과연 부적절한 비유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허당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나는 완벽하다로 뒤집을 수 있다면 어거지일까. 어거지면 어쩌랴. 내가 아는 박수림 시인은 미안하게도 ‘허당’과 가깝다. 하지만 ‘허당’이란 시어가 결코 만만찮은 중의성 重義性을 함의하고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어차피 인생살이를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고 완벽하게 살아내려 하지만, 완벽이란 이 세상에 없다. 완벽과 동떨어진 허당이란 말은 어찌 보면 완벽하지 못한 빈 곳을 메워준다는 가정을 해보면 대립어가 아닌 보조어임을 간과한 것이다. 우린 누군가에 의해 내가 메우지 못한 허당을 메워줘야만 살아가는 세상이다. 허당 같은 삶과 시 속에 슬픔 같은 감상이 틈입할 겨를은 한치도 없다. 그래서 박수림 시인에게는 모든 대상이 이별이고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기다림으로 치환된다. 그런 이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여 사랑이라는 강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네 전부가 내 사랑이다>에서 “너를 거치지 않고서는 난/한발자국도 걸어 나갈 수 없다/너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난/아무것도 읽어나갈 수 없다/너에게 이르는 길 안 뒤로 난/낯선 길은 바라보지 않았다/너로 하여금 난/앓아야 살 수 있는 사랑을 얻었다/그건 두려움이다/ 설렘이다 아픔이다/그리움이다 그러므로/네 전부가 내 사랑이다”라고 조곤조곤 다가와 무릎을 맞대며 시의 민낯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어차피 삶은 강처럼 이어진다. 시인이 꿈꾸는 강은 시가 사랑으로 흘러가는 삶일 것이다. 우린 그런 소망을 절대로 외면해서도 안 되고 그저 지켜보면 된다. 우리들의 삶 속에 누군가가 또 허당같은 삶을 살아줘야만 하는데, 우리 곁으로 그런 사람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마지막 허당일지도 모를 시인을 사랑으로 지켜줘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그래야만 박수림 시인이 목적한 바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지칠새도 없이 초고속으로 달리는구만. 갈수록 좋네.
그러게 그 동안 게으르고 허송세월 했으니 이것도 부족한 것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