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료 matter, 원질 arche)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밀레토스) 학파는 세계의 본질을 질료(matter)라고 보았는데, 이 질료(matter)는 영어(matter), 또는 일본어(질료, 質料) 번역에 의한 표현에 불과하다. 즉, 질료(matter)는 단순한 물질(matter)로 해석하면 안 된다. 예컨대 탈레스는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보았는데, 여기서의 물은 단순히 수소와 산소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matter)이 아니라 원질(arche, 아르케)을 의미한다. 원질(arche)은, 그리스인들에 의하면 태초의 원리로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탈레스에 의하면 세상의 원질로서의 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며, 단지 감각만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그에 의하면, 불도 물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탈레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래도 세 가지 정도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첫 번째는 일식을 예측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의 별을 보며 걸어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는 일화이고, 셋째는 가뭄을 예측해 큰돈을 벌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이다. 첫 번째는 신화(mythos)의 시대에서 이성(logos)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자연법칙을 발견하여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두 번째는 당시 철학자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우화로 해석된다. 즉, 탈레스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일체의 감각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사물을 파악함으로써 적어도 제3자가 보기에는 현실감각이 매우 무딘 사람으로 보였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세 번째는 철학자가 현실감각은 무딜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세상 이치를 이용해 돈을 벌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탈레스 이외의 또 다른 이오니아 학파의 철학자로는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본질을 무한자(無限者), 또는 무(無)한정자(限定者)로 보았다. 무한자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한계가 없는 자로서 유한자의 반대가 되는 존재이다. 즉 아낙시만드로스는 사실상 범신론자로서 무한자는 우주나 자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 또는 숨으로 보았다. 그는 우주는 무한량의 공기나 숨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것이 전체에 스며들어가 생명을 준다고 보았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의 생각은 신학적 설명이 아니다. 감각을 배제하고, 즉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사유를 통해 파악한 논리적 결론들이다.
(형상, 또는 형성원리)
오늘날 이탈리아 동부 지역에서는 이오니아 학파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피타고라스로 대표되는 이들의 관심사는 "왜 세상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 방식으로 움직이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즉, 질료(matter)가 아니라 형상(form),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구성원리, 작동원리를 의미하는 형성원리(forming principle)가 그들의 주요 탐구대상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신앙공동체의 종교적 우두머리였다.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은 신비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의 교리는 말로 적으면 안 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윤회설을 믿었고 세상을 움직이는 운동의 원인은 수(number)라고 믿었다. 그리고 코스모스, 즉 질서(kosmos)가 가장 안정적인 상태라고 믿었다. 몸에 병이 생기는 것도 몸 안의 어떤 질서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답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나)
이오니아 학파가 생각한 세상의 본질, 즉 질료 내지 원질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전 강의에서 살펴봤듯이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론에는 허무주의, 회의주의, 경험주의, 합리주의 등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하며, 특정한 방법론 내에서도 여전히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물론, 명확한 결론이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결론이 도출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역시 확신할 수 없다. 중세에 마녀재판으로 죽은 사람이 약 20-3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이웃사람들과 재판관들이 정말로 마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 마녀로 지목된 사람도 자신이 진짜 마녀인 줄 알고 죽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중세 재판관들이 생각했던 마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피타고라스가 세상의 참된 원리라고 생각했던 질서(kosmos)가 과연 바람직하고 안정적인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중국 철학은 혼돈(chaos)이 질서(cosmos)보다 더 우월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중국 철학은 불완전한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 미술에서도 인상파 이후 조화와 질서보다는 혼돈과 불확실성을 더 우월하게 보기 시작했다. 의학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의 질병이 몸 내부에 어떤 안정된 질서가 깨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몸 내부의 긴장과 불규칙성이 깨지고 경직적인 균형 상태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