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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마태복음 4장 1-11절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굶으신 다음에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십니다. 첫 번째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시험입니다. 물질,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만일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지켜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삶에서 기적, 매직, 파워에 대한 유혹입니다. 세 번째는 지극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세상 모든 것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만 같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30-40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할 때는 이 세 가지의 유혹과 시험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큰 유혹인지 그리고 이런 유혹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누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50넘어 중반에 이르다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희 신학교 때 동양사상을 가르치셨던 김흥호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다 소화하셔서 굴비 엮듯이 쭉 꿰어 동서양의 사상가들의 사상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십니다. 이분이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제자이세요. 그래서 선생님처럼 일일일식 하시는 분으로 무척이나 유명하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지나가시면 저분 하루 한끼만 드시며 사시는 분이야 하면서 엄청난 도인 보듯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50넘어서 보니까 많이 먹으면 다 살로 가요. 30-40대처럼 소화해서 다 에너지로 쓰지를 못해요. 그러다 보니 많이 먹으면 부대껴요.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움직임도 적잖아요. 적게 먹어도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더군요. 제가 하루 두 끼를 먹는데 두 끼도 양이 많이 줄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하루 한 끼만 먹고 사는 게 젊었을때는 그렇게 높은 경지로 보였는데 그 연세가 드시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매우 쉬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본문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이런 종류의 유혹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혹이라는 것은 말할나위 없구요. 예수님이 젊었으니 이 유혹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보니 돈이야 많으면 좋겠지만 돈이 많다고 마냥 행복한게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압니다. 그래서 젊었을때처럼 돈 된다고 다 달라들지 않아요. 적당히 있을만큼 있으면 쉴려고 하고 놀려고 하지 목숨걸고 돈을 벌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운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도 못해요. 지난 주에 어떤 분 일을 소개시켜드렸는데 일주일에 5일 일하고 점심장사만 하는 식당이예요. 그러니까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몸이 힘들어서 그냥 적당히 살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쉬면서 일하고 싶은데 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천박해 질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막소비하지도 않고 중요한데는 쓸 줄도 알고 맹목적으로 재산 불리기만을 위해 혈안이 되고 그러지를 않더라구요.
권력도 그렇습니다. 젊었을때는 되지도 않는 머리가지고 1등 해보려고 밤도 새워보고 머리 싸메고 공부도 해봤지만 그렇게 해서 위로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보면 마치 호수위의 백조같아요. 호수에 떠있는 백조를 보면 무척이나 우아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보면 빠지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발버둥을 칩니다. 겉보기에는 좋아보이고 화려해보이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있는 스트레스 없는 스트레스 다 받으며 살아갑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모셨던 목사님도 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에 100년이 넘는 교회에서 오시라고 오시라고 그렇게 했더도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으셨어요. 내가 이 나이에 거기 가서 뭔고생하라고 거길 가냐고 쳐다도 않보셨어요. 물론 권력을 찾아 점프를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경험으로 압니다. 적당한 게 낫지 지나치게 올라가면 나중에는 너무 외롭고 고독하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이 마귀의 시험도 예수님이 그래도 젊으셨을 때니까 이런 류의 시험이 나오지 아마도 더 연세가 드셨으면 이런 류의 유혹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이 들면 겪어온 세월의 경험 때문에 저렇게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다들 저 정도의 말씀은 살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유혹이 나이 들어가면서 힘드신 거 같습니까? 어떤 유혹이 힘들게 하세요? 요즘 저는 그래요. 제가 말이 많은 것 같아요. 예기하다보면 설명하고 있고 제안하고 있고 자꾸 가르치고 있더라구요. 물론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해주려고 하고 좀 더 제가 경험한 것을 다 알려주려고 하다보니 말이 많아져요. 지난 주 오광식 집사님께서 읽어주신 기도문 요약하면 나이들수록 나서지 말고 자꾸 참견하려고 하지 말고 자꾸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뒤에서 응원하고 서포트 해주고 격려해주고 품어주라는 건데 말이 많아져요. 매우 큰 유혹 중의 하나입니다. 기다림의 영성, 경청의 영성, 질문하고 듣는 이타적 영성훈련을 해야 할 때요. 이럴 때 어떤 정신력(성경의 말씀)으로 무장해야할까요? 물질을 탐할 때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요 하면서 물질을 다루는 영성의 중요성이 중요하지요. 매직 파워의 유혹이 다가올 때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그랬는데 우리는 종교생활을 통해 뭔가 확 달라질 거라는 뭔가의 기운이 우리를 다 바꿔놓을 것이라는 종교적 유혹이 빠지지요. 스템바이스템 왕도가 없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매일 매일 내가 하느님 앞에 서는게 진정한 신앙생활의 영성이죠. 권력에 대한 유혹이 일면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고 경배하라는 말씀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면 말이 많아지면 어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까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말을 삼가고 어리석은 사람도 입술을 다물고 있으면 슬기로워 보인다.” 잠언 17장 침묵이 금!
여러분들도 한번쯤 읽어보셨을 법한 영화로도 나온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작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란 책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배를 쫄쫄 굶은 예수님에게 나타나 3가지 시험을 했던 마귀는 예수님이 이에 넘어가지 않자 나중에 보자하고는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그렇게 공생애 기간을 마친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한 천사 소녀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 이정도면 됐어. 충분해, 수고했어"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아가 죽게 되고 그는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겁쟁이, 도망자, 배신자라는 자책에 시달리다 다시금 삶을 돌이키게 되고 결국은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는데, 그 소녀천사의 음성이 다시 나타난 마귀의 음성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소녀 천사의 음성부터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는 장면까지는 사실은 실제의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상에서 잠깐의 환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깨달게 됩니다. 그 십자가상에서 잠깐의 환상속에서 나타난 그 소녀천사,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충분하다고 애썼다고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이제는 충분히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그 음성이 예수 최후의 유혹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삶에 지쳐 있는 이에게 이만하면 됐다고 충분하다고 애썼다고 수고했다고 하는 위로의 음성은 힘이 되고 따뜻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위로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카잔차키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40대 중반 정도 넘어서부터인가 어느날 몸이 예전의 몸이 아니라는 경험을 한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몸이 한번 푹 무너지는데 그때부터는 뭔가의 조치, 즉 약을 먹든가 운동을 하든가 소식을 하든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예전의 몸상태를 유지하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확 몰려오더라구요. 그러면서 공원을 산책하기 시작했고 농사일도 정기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거꾸로 천천히 올라가는 걸 상상해 보십시오. 가만히 있으면 내려갑니다. 현상태라도 유지하려면 계속 걸어야 합니다. 마치 그런 걸 느낀 겁니다. 삶의 어느 순간 가만히 보니까 가만히 있는 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퇴보가 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몸상태보다 더 좋아지기는커녕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된 것입니다.
몸 뿐만이 아닙니다. 무척이나 슬픈 일이지만 몸이 퇴화하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내가 보고 판단하는 판단능력도 사실은 더 약해진 육체로 인하여 더 좁아지고 더 예민해지고 때때로 고집도 확신도 더 세지고 그러다보면 타자에 대한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위해 더 노력하지 않으면 사실은 지금까지의 몸과 마음과 신앙의 건강성조차도 더 유지하기가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소설가가 보여주는 예수 최후의 유혹은 신앙의 안주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과거를 팔아서 오늘을 살지 않는다 했지요. 지난날의 살아온 시간들이 아무리 찬란했어요. 과거는 과거일뿐입니다. 제 아무리 올해 울금 농사를 실하게 결실했어도 내년에 제가 농사일을 게을리하면 농사 망칩니다. 사람 농사도 그렇고 신앙농사도 그렇고 우리가 더 크고 넓은 품으로 나아가 못하면 상호간에 지켜줘야할 것들과 진실해져야하는 순간들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수없이 오래된 관계들도 한순간에 허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가 어려워지고 갈등이 생기고 힘들어질때는 영적인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책이든, 역사속의 인물이든, 성인이든 삶과 신앙에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 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생명을 끌어안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만이 아니라 나를 따뜻하게 품에 안고 계시듯이 타자도 똑같이 품에 끌어안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고독한 결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떠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홀로이 남아 기도합니다. 피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막살고 싶었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끄소서! 안주하지 않는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악마의 시험도 지나고 보니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어느 때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모든 삶의 순간들은 성령이 이끄시는 영혼의 시간일 것입니다. 이런 귀한 고백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