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답인, 정신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얼마나 강하게 질문을 해야 하는가.
"모든 실재는 진실에서 보자면 정신적인 것의 낮은 차원과 높은 차원이고, 하나이면서 동일한 근본 존재의 양면인지라 낮은 차원의 인식에 있어 무지한 사람은 고차적인 것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게 머무르게 된다(신지학, 2020, 27)."
위 문장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에서이다. 만약 자신의 삶 바깥에 자신을 전치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가 질문이다. 바로 말하면 현 상태는 높은 차원과 낮은 차원의 양면성이 있어서 그 양면성을 봐야 하는데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의 삶에 매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매몰되는 이유는 영혼의 속성에 있다. 요컨대 인간의 영혼은 현재의 삶에 그대로 매몰되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영혼은 속성 상 세 가지로 분류된다. 감각혼, 오성혼, 의식혼이다. 각 영혼은 들어오는 정보를 가지고 활동을 하고 그 결과를 정신에 전달한다. 감각혼은 몸과 에테르체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오성혼은 들어온 이 정보를 가지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의식혼은 정신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영혼이 영혼 활동 그 자체이기 떄문에 우리가 영혼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영혼은 행동 그자체이다. 그래서 나는 영혼의 활동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행동에 매몰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재 내가 기쁘다면, 나는 기쁨 그자체이다. 그러나 내가 기쁨 그 자체라면, 내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기쁨 그 자체여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쁨이 나가고, 다시 다른 감정이 나를 채운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은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다만 나의 감각과 에테르체가 기쁨을 전해주면, 나의 영혼이 기쁨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영혼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먼저 할일은 기쁠 때 가만히 기쁨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기쁨이 조금씩 사라지는데,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를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영혼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하나다. <......> 영혼이 이 사실을 고백하고 싶어하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영혼이 외부세계의 체험을 뒤로 하고 스스로를 고찰하는 시간이 올바른 조명 아래 등장한다(인간 자아인식으로 가는 하나의 길, 2018, 15)." 내가 만약 기뻐하는 존재를 타인처럼 바라본다면, 기뻐하는 존재를 바라보는 존재,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 '나'가 상속에 있다는 것과, 영혼은 그 현상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되풀이하면 현실에서 인간의 '나'는 상 속에 있고, 영혼은 그 현실에 매몰되어 있다. 두 가지를 해결하는 방법이 현실에 매몰된 영혼을 통하여 '나'를 만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에서 질문을 하면 상속에 있는 자아에게 질문을 하지만 상을 벗은 자아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자아가 영혼에게 명령해서 답을 구하도록 한다. 물론 질문이 간절하면 할수록 그 속도와 강도는 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영혼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이 사실(정도 어디쯤) 사이에 위치한다고 생각된다. 누구는 강력하게 자신에게 질문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상을 성취하도록 할 것이고, 다른 누구는 그냥 영혼에 휘둘려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현실에서 자아가 드러난 정도가 영혼의 활동에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음악가들의 연주나 노래를 들어보면 자아의 정도, 자아가 상을 벗은 정도가 드러난다. 영혼 활동으로 '나'에 저장된 능력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래를 하면 영혼활동이 노래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나'는 원래 우주에 연결되어 그 에너지에 의해서 삶이 영위된다. 우주 에너지는 일정한 진동으로 삼라만상에 전달되는데, 그 진동이 -동양에서 말하는- 기이다. 슈타이너는 이를 에테르체라고 하였다. 상속의 '나'가 우주 에너지에 연결될수록 우주 진동(에너지)이 영혼 활동으로 드러난다. 에테르체는 인간의 생명 에너지로 인간이 감지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반면 아스트랄체는 물질체로 인간의 감성과 리듬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내가 어떤 노래를 부른다면, 드러나는 노래의 감성이 아스트랄체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드러나지 않는 에테르체를 자극하는 존재가 아스트랄체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에테르체를 자극하여서 나를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연주하면 음악의 감성(아스트랄체)으로 들어가서, 에테르체를 자극하면, 이는 우주진동으로 이어져 있는 그 '나'가 영혼 활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도입하는 것이 기교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유행하는 트롯 기교, '꺽는다', '바이브레이션', '밑으로 눌러준다' 등등이다. 하지만 영혼활동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가장 본질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교를 잘 표현해도, 노래를 통해서 드러나는 영혼 활동만큼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는 어려울 듯 하다. 현실에서 자아가 드러난 정도, 상을 벗어난 정도가 영혼 활동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영혼 활동에 매몰되지 말고 영혼 활동을 통해서 자아가 온전하게 상을 벗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현실에서 내가 하는 활동에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의 답을 얻고자 영혼활동을 통해서, 즉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론적으로는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에테르체를 자극하고 우주 에너지를 받는 자아가 그 진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진동이 다른 사람의 에테르체를 진동하고 결과 다른 사람이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현실에 매몰되어서 무지하면 고차적인 인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다. 현실에서 정신을, 정신자아를 인간이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정신이 아주 미미한 느낌이기 때문인데, 현실에서 느꼈다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고 말기 때문에 여간 집중하지 않고는, 또 여러 번 감지해야 그나마 아주 조금 파악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파악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현 자신의 수준에서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있는 정도(직업)는 요행으로 영혼이 발달하는 시기에 조금이나마 온전하게 영혼이 발달한 때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찾아서 자신에게 물어보는 일이다. 그냥 살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 정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유튜브에서 많은 사람을 접해보면, 어떤 일에서라도 성과를 내었다면 반드시 어려운 문제를 파악했고 그 답을 구해서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 답이 자신의 내부, 자아가 영혼활동을 통해서 들려준 것이다. 즉 현실에서 영혼이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자아가 답을 들려준 것이다. 그냥 열심히 일하는 것, 영혼이 현실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영혼으로 하여금 열심히 활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기도 쉽지 않고 따라서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깨쳐야 한다. 특히 공교육에서 영혼, 정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영혼이 잠을 자거나 상처를 입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여행 유튜버인 '곽튜브'의 학교폭력이야기를 들었다. 중학교때 심하게 학교폭력을 당해서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는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그전 일을 몰라서 너무 행복했는데, 어느 날 중학교때 이야기를 누군가 듣고 다시 학교폭력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곽튜브는 자퇴를 하겠다고 했고, 부모님이 반대를 하셨다. 결국 곽튜브가 가출을 하고, 그러자 부모님이 승낙을 해서 학교를 자퇴를 할 수있었다. 여기에서 곽튜브는 자신이 부당하게 당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서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자신이 부당하게 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예컨대 '자아'가 드러나기 전, 초등 학교 저학년 시기라면 자아가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신을 버리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곽튜브는 그러한 경험이 자신의 자아를 성찰할 수 있게 하였고, 결과 자신의 자아가 '의지'를 내지 않았나 한다. 자아가 현실을 파악하는 것과 자아가 의지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학교폭력이 부당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정신은 이토록 강하게 질문을 해야 그나마 답을 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현실에서 그와 같은 강한 질문을 한다면 누구라도 자아가 상을 벗을 것이고, 자아가 상을 벗으면 누구라도 우주 에너지에 동참하여서 삶을 행복하게 살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