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실 따라 하기 ―이수명(1965~ )
이 털실은 부드럽다. 이 폭설은 따뜻하다. 이 털실은 누가 던졌기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털 실로 뭐 할까 물고기는 물고기를 멈추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끌고 가고 끌려가고 이 털실은 돌아다닙 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갑니다. 이 선반 위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습니다. 이 폭설은 소원을 이 룬다. 폭설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털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털실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갑니다. 아무 형체도 짓지 않습니다. 이 털실은 집어 올릴 수 없습니다. 이 볕은 풀린다. 이 털실은 풀 린다. 끝없이 풀리기만 한다. 이 털실은 화해하지 않는다. 그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털실 뭉치를 달 고 다닌다.
이수명 시집 ㅡ『마치』(문학과지성사, 2014
이 털실 뭉치는 무엇일까. 이 털실 뭉치로는 목도리나 장갑을 짤 수 있을까. 다시 보니 이 털실 뭉치는 눈 뭉치 같다. 아니 이 털실 뭉치는 폭설 같다. 아니 폭설의 두 손이 뭉쳐놓은 눈덩이 같다.
어쨌든 굵은 가닥의 털실이 있고, 또 여기 털실 뭉치가 있다. 실패에 감듯 털실을 감으면 뭉치가 되기도 하고, 볕이 풀리듯 뭉치로부터 풀려나와 한 가닥 털실이 되기도 한다. 뭉치고 풀리는 이 둘 사이의 운동과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마치 누나가 입 던 스웨터를 여러 날에 걸쳐 풀어 내가 입을 옷을 여러 날에 걸쳐 짜던, 그 어느 겨울날 내 어머니의 손처럼. <문태준 시인>
- 출처 : 조선일보 입력 : 2015.02.11 03:00 [가슴으로 읽는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