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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시산맥 신인상 / 한영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외 4편 / 한영미
라면으로 첫 끼니를 때운다
바닥엔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쓰다만 이력서들
열정 하나로 통했던 시대는 갔다
모래 수렁을 떠도는 비문의 유령들,
오늘은 이 회사에서 내일은 저 회사에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래바람은 깊은 수렁을 덮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한다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은 처음 몇 번의 좌절이면 족했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가수와 진수가 구별되지 않는 교묘함에도
구덩이를 채운 숫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쌓여가는 빈 소주병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가 될 것이다
전화 한 통이면 빠져나올 수 있는 꿈이면 좋겠다
남은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시어 빠진 김치 쪼가리로
후르륵 위장을 채운다
내비게이션 토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낯선 얼굴들이 모래 수렁에서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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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온 고양이
이빨과 발톱 세우고 울고 싶을 땐 언제든
울 수 있는 길냥이가 되고 싶어요
울 수 없는 시간이 낭만인가요
안락을 위해 몸을 둥글게 말아 가장
보드라운 털을 내어 주어야 하는 일과
희롱하는 손끝에도 냐아옹!
그대 기쁘게 하는 콧소리,
그때마다 털이 바짝 일어서요
손끝을 와락 물어뜯고 싶어져요
좋은 옷, 머리에 달아준 분홍 꽃리본
날마다 입김 불어 건넨 사랑한다는 말,
연애를 위해 시를 쓸까요 시를 위해
연애를 할까요
너는 나라는 말의 함정에 한 번쯤
빠져본 기억 있다면 누구든 알 수 있어요
이제 그만 소설적 진실*을 밝히고 싶어요
밤거리를 걸어요 온 털끝 세우고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걸어요
상대가 놀라도록 두 눈 크게 떠요
어두울수록 빛나는 광채
집 나온 고양이에게 더 이상
집은 필요 없답니다
*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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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방다리
아현동 굴레방다리 하면 목줄이 떠오른다
둥근 모양이 세 개나 들어가는 아현동이란 지명이
입 벌린 사람들의 모습 같아서, 그들의 허기진 뱃속 같아서,
소가 벗어놓고 와우산으로 누웠다는 굴레가
골목 어디쯤에선가 나타나
기다렸단 듯이 목을 거칠게 잡아챌 것만 같은 동네
흑백 사진 속 배경으로 만나는 그곳에서
부모님의 목줄 덕으로 어렵게 대학까지 마쳤다
가난은 꿈도 사치라는 말을 배웠지만
철수된 고가 다리처럼 빠져나와 모두가 잘살고 있다
날마다 걷던 웨딩드레스 거리는 왜 그렇게도
퇴락한 슬픔이었는지,
조화롭지 못한 방석집과 한데 나열되어
흰빛이 눈처럼 순백색이 아닌 술집 여자들의 덧칠된 화장처럼
이물스러웠던 기억
밀폐된 어둔 공간을 찾아들던 검은 양복 입은 남자들의 술 취한 모습과
그들의 손을 잡아끌던 눈빛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 화려한 여자들과 마주칠 때면
그녀들이 입을 먼 미래의 웨딩드레스가 궁금해지곤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여전히 웨딩 타운으로 화려한 동네
이따금 생각나는 곳이지만 그와 동시에 목부터 죄어드는 곳,
모두가 치열했던 시절이 재개발된 모습으로 지워졌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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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관(木棺)
끝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지
책장을 넘기듯 무심코 지나가는 하루하루
난 나의 변화무쌍한 책을 읽느라
어느 날 갑자기 너의 책이
찢길 수도, 찢겨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치 못했어
오늘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다면
내일도 당연히 붉은 태양 아래 짙푸른 땅 밟으며
황금 같은 시계 종소리에 맞춰 눈을 뜨리라고 생각했어
날마다 안부를 묻는 건강한 목소리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도
인사도 생략한 채 보냈을까
꽃상여에 묻혀 떠나는 너 보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빈 하늘 바라보며 바다만 그렸어
어디든 하나로 이어져 있으리라고
이제는 나란 책을 펼치면 매 페이지에
부록처럼 달라붙어 있는 목관과
짧은 한 줄의 글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 니콜라스 푸생의 그림 작품에 쓰인 글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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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 일 대응설*
꽃을 꽃이라 부르지 말자
세상 만물 이름 정해지지 않은 건 없다지만
밟고 가는 사람들에 따라 산길은 모양이 달라지지
없던 길도 눈앞에 펼쳐지고
있던 길도 초야에 묻혀 사라지기도 하지
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듯이
네가 아는 나도 네 앞의 나일 뿐,
합목이 된 나무마다 비틀린 모양새를 보면
제각각 다르지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뜨겁게 타올라
엉켜 붙은 절정의 모습도 있지만
겨우 무늬만 하나인 채로 합목이라 불리는 것도 있지
상대의 손끝 아래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불감의 여자일 수도
가장 현란한 요부일 수도 있어
여기저기서 부르는 욕보다 못한 이름에 갇혀
그 값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
꽃을 꽃이라 가두지 말자
오늘도 내일도 그 이름 밖으로 모두가 흘러가지
길도 나무도 강물도 그리고 너도
* ‘모든 사물과 개념은 일대 일 대응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상소감] 불편한 시와 손잡고
시와 오래된 연인처럼 살아왔습니다. 벅차게 가슴 뛰던 날도 있었고, 눈빛만 마주 보아도, 손끝만 닿아도, 하나로 소통되던 날도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고 머물러 주어 고마웠다고, 다정한 인사 건네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좋았던 시간보다 힘겨웠던 시간들이 많았지만, 주저앉는 순간마다 다른 의미를 생성해 빈손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던 숱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이번 등단을 계기로 십여 년 전,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모해도 열정은 살아 있었던 그때 정신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불편한 시를 쓰겠습니다. 지혜와 성찰을 통해 나 자신만이 아닌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비바람과 햇살과 삶의 유의미한 부스러기를 줍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온몸으로 시를 쓰라던 김수영 시인의 말을 떠올립니다.
자유하는 시의 정신과 삶이 한 몸이 되는 날까지 오늘을 에너지 삼아 걷고 또 걷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직접 전해주신 시산맥 대표님과 부족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먼저 감사 인사드립니다.
언제나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임정일 선생님과 허경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강산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함께해온 예술촌 선배들과 문우들 사랑합니다. 문향 가족, 소중한 곰시 동인 역시 동행이 든든했습니다. 직장 일과 시 작업으로 늘 바쁜 아내와 엄마를 한결같이 지지해 주는 내 소중한 가족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2019년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100여 명의 작품 예심은 2017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동우 시인과 박동민 시인, 2018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소현 시인이 맡았다. 각자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하였다. 그들은 정원선, 이우경, 최은진, 이은희, 이서원, 이영, 신나래, 이호근, 전목, 한영미, 박민서 등이었다. 그중 8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총 8분이 본선에 올라왔다. 다들 어느 만큼씩 매혹적인 詩篇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또 조금씩 흐린 부분이 있어 한동안 원고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럴 땐 가장 단순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이 본 새로운 것, 재미난 것, 아프고 간절한 것을 마치 그 장면 안에 있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그러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박민서, 한영미 두 분의 손을 새 시단식구로 잡을 수 있었다.
박민서 시인은 동굴에 찍힌 손 벽화를 보고 손의 언어를 붉은 비명으로 형상화해놓은 「벽 앞에서」가 강렬하고 선명했으며 다른 시편들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어조를 변용, 구사하고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도 가장 작지만 큰 무늬와 숨결을 짚어내는 힘을 지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굴레방다리」 등의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곡진한 귀와 눈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두 분 다 시인으로서 크고 귀한 자질들을 가졌으니 정진하여 시단에 우뚝 서길 빌어본다.(안차애)
박민서는 섬세한 신경망으로 세계를 감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화의 과정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호 조응한다. 「벽 앞에서」는 박제된 ‘벽화’에 눈물과 웃음이 깃든 인간의 신화를 피부에 닿을 듯 직조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펼쳤다 좁히는 언어의 묘기가 박민서의 특징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필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한 인생의 숨은 이력을 스케치한다. “물이 물을 닦는다” “물의 주름” “물의 페이지”(「물소리」)와 같은 신선한 언어적 발상이 대상의 본질과 삼투함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사물의 본질을 섬세한 관찰과 통찰로 감각화하는 박민서의 노력과 애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영미가 축조한 시세계의 근저에는 ‘Les Miserable’(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안전하고 견고한 세계 밖에 거주하는 자들의 숙명인 가난, 배제, 고통, 슬픔, 낙오의 정서를 그는 곳곳에 편재시켰다. 생계와 희망의 출구 없는 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방석집과 웨딩숍의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그린 「굴레방다리」는 모두 위태롭고 불안한 세계 끝에 매달린 존재의 슬픈 현상을 구현한다. 기교와 수사로 메시지를 가리는 기술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세계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려는 정공법적 태도가 그의 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치열한 의식과 긴장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바란다.(강경희)
이번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내구성이 탄탄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체험에 근거한 은밀한 자기고백으로부터 사회의 첨예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시적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자기고백의 언어들은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데, 박민서 시인의 작품들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의 의지와 그것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묘하게 배합된 수작이다. 그는 「벽 앞에서」의 첫 문장에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벽에 찍힌 손바닥들은 붉은 비명이다”라는 문장은, 붉은 손바닥의 색채감을 ‘비명’이라는 절박한 울음과 갈등으로 묘파한다. 그러므로 박민서 시인에게 시란,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어제의 미로」)의 대체할 수 없는 내밀함이다.
한편 한영미 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징한 세계의 상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굴레방다리」 등의 언어들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송곳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중 격자다. 그는 이를 이렇게 압축하고 대칭한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굴레방다리」). 그러나 적어도 시에서 형용되는 ‘고통’이란 자기극복의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삶을 형상하는 시들은 대부분 투박하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투박함이란 정제된 ‘투박함’이어야 한다. 이점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박성현)
- 심사위원 안차애 시인 강경희 평론가 박성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