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용부의 사정.
207년 조조가 오환을 격퇴한 후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선비족이다. 이시기 요서와 요동지방에도 선비족이 대거 이주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단부, 우문부, 그리고 모용부이다. 모용외의 증조 막호발(莫護跋)도 이때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요서에 들어와 살다가 사마의의 공손연 정벌 때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으로 임명되고 극성 북쪽에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이때까지도 모용부는 위나라에 귀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삼국지 정시(正始) 5년의 기록을 보면 ‘선비가 내부하여 요동속국을 설치하고 창려현을 세워 이곳에 살게 했다(鮮卑內附, 置遼東屬國, 立昌黎縣以居之)’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창려 지방에 거주하던 선비족이 바로 모용부이기 때문이다. 정시5년은 244년인데 모용외의 조부 목연(木延)이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시(245년) 공이 있어 좌현왕(左賢王)이 되었다는 기록(전연록: 祖木延, 左賢王, 從毋丘儉征高麗有功, 加號大都督)이 있으므로 정시5년에 위나라에 내부하여 창려에 근거를 마련한 것은 목연(木延)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는 진서 열전 토욕혼조에 그들의 시조가 창려에서 떠나왔다고 한 점(吾祖始自昌黎光宅於此), 위서 열전 모용외전에서 모용외의 본적이 창려라고 한 점(其本出於昌黎), 그리고 북사의 토욕혼조에서 모용외와 토욕혼의 부친 섭귀(涉歸)가 요동선비 도하인이라고 한 점(本遼東鮮卑徒河涉歸子也)으로 볼 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목연이 귀부하여 근거지를 막호발이 정착했던 극성의 북쪽으로부터 창려 도하로 옮긴 후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모용외는 이곳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는데, 모용외의 조부 목연이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시 출전하였다는 점이다. 이 출전에서 목연이 현도태수 왕기와 함께 부여를 방문하였을 가능성은 없을까? 고구려와의 전쟁 기간 동안(245년-246년)에 목연이 부여의 마여, 우가와 친분을 쌓았고, 부여에 정변이 발생한 이후 이들을 추종하던 세력 즉, 여울가가 도움을 요구하자 자신들의 처음 근거지였던 극성의 북쪽, 즉 북표의 라마동에 거주하도록 배려하였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결정은 자신의 주변에 우호적인 세력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목연에게도 당연히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외의 부친 섭귀는 유성을 보전한 공으로 선비의 가장 고위직인 선우(單于)로 승진했지만 근거지를 요동의 북쪽으로 옮겨야만 했다. 자신의 근거지를 옮긴다는 것은 섭귀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점차 제하의 풍속을 그리워하게 되었다(於是漸慕諸夏之風矣)’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타의에 의해 고향을 잃은 여울가와 섭귀는 목연의 시기보다 좀 더 가까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281년 11월 섭귀는 자신의 고향 창려를 공격하였다. 비록 사서에는 진(晋)이 우문부와의 원한을 해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 이유로 기술되어 있지만, 본거지 창려를 빼앗기고 요동의 북쪽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린 것에 대한 반발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 공격은 대단하였던 모양으로 해를 지나 3월까지 계속되었으니 아마도 섭귀는 이 4개월 동안 창려를 장악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282년 3월 안북장군 엄순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고(安北將軍嚴詢敗慕容涉歸於昌黎), 이 전투에서 모용부는 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 이어 283년 섭귀가 죽고, 숙부 모용내가 집권하여 모용외를 살해하려하자 모용외는 여울가로 피신하였다.
만약 여울가가 앞의 가정처럼 모용외의 조부 목연에게 빚을 졌고, 부친 섭귀와 돈독한 관계였다면 자신들과 동일한 상황에 처해 피신한 모용외를 정치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인들이....모용외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後國人殺耐, 迎廆立之)’는 기록을 볼 때 모용부내에 모용외의 피난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아울러 모용내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모용내는 여울가를 공격하거나, 압박하여 모용외를 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 시점에는 창려에서의 참패로 세력이 약해졌을 모용부가 함부로 공격할 수 없을 정도로 여울가의 세력이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용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서형 토욕혼과의 마찰(이 사건이 283년 또는 285년의 일인지 불분명하다)이 발생하였고, 토욕혼은 섭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의 부족 1700가를 끌고 서쪽으로 떠나 버린 것이다. 모용부는 두 거대 세력으로 나뉘었고, 그 중 한 세력이 이탈함으로써 모용외의 세력은 더욱 약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용외는 즉위한 그 해(285년) 요서군의 비여(肥如)를 침공하여 패배하였고, 또 다시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이 전쟁에서 만여 명의 포로를 잡아오는 승전을 거두어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고 더불어 안정된 지위를 인정받았겠지만 이는 잘못된 전쟁이었다. 282년의 패전에서 1만 명의 군사를 잃고, 283년 모용내와의 왕권쟁탈이 있었고, 285년 토욕혼의 이탈까지 겪은 모용외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차분히 조직을 정비하고 세력을 만회했어야 옳았다.
그러면 왜 모용외는 비여에서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부여를 침공했던 것일까? 과연 당시 모용외의 세력만으로 부여의 국성까지 함락하는 승전이 가능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토욕혼의 이탈로 줄어든 세력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 모용외를 지원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비여에서의 패전으로 지도력에 손상을 입었을 모용외는 전쟁을 통해 모용부의 재정을 확충함으로써 안정된 지위를 인정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믿을만한 어떤 세력이 모용외에게 지원을 약속하면서 전쟁의 대상으로 부여를 지목하고 부여의 허실마저 알려주었을 경우 모용외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용외의 주위에서 부여를 미워하던 세력, 이 세력이 바로 여울가라고 저자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