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당한 서애 유성룡소인배들의 나라 조선에 피눈물을 흘리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1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임진왜란의 최대 공신을 뽑으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무신으로는 이순신 장군, 문신으로는 서애 류성룡을 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애는 당연히 1등 공신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2등 공신으로밖에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주화오국(主和誤國) 곧 왜란과 호란 당시 적국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 되었습니다.
《서애연구》 6권에 실린 논문 <임란 극복의 주역, 류성룡 축출 과정과 그 배경>에서 류을하 박사가 이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저도 덕분에 서애 선생이 억울하게 쫓겨나는 과정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벽하는 서애학회의 상임위원이기도 하지요.
▲ 서애학회에서 펴낸 《서애연구》 6권 표지
군역에서 빠진 양반도 병역의무를 지게 해
서애는 전시(戰時) 재상으로 오로지 나라를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면 기존 인습이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제도를 유연하게 변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전시개병제를 도입하여 군역에서 빠진 양반이나 천민도 모두 병역의무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민들도 공을 세우면 면천(免賤)뿐만 아니라 벼슬까지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물작미법으로 방납(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백성을 대신하여 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그 대가를 백성에게서 높게 받아 내던 일) 이권을 봉쇄하고, 부자 증세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기득권자인 양반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들은 나라야 어찌 되든 말든 자기 이익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자들에 대해 서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긴급한 변란을 만나면, 평상시와는 다른 행동거지를 취하여 정세를 변동시키고 시국을 구제할 계책을 마련하지 않고서, 반드시 말하기를 ‘옛날부터 내려오는 습관을 변경할 수가 없으며,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고서 병을 고치려 하고, 나막신을 신고서 큰 강을 건너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소인배들에게 서애 선생의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오나요. 이들은 있지도 않은 말까지 지어내어 서애를 헐뜯고 선조에게 서애를 쫓아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서애가 쓸데없는 토목공사를 해서 국비를 탕진하고, 뇌물을 수수하였으며 관직을 멋대로 남발하여 선심을 쓰고 심복들을 안팎에 포진시켰다고 무고합니다.
심지어는 명나라 경리 양호가 머무는 객관에 서애를 비방하는 날조된 글을 몰래 부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어 다시 전쟁(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자, 서애가 심유경과 짝짜꿍이 되어 화친을 주장하며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애가 송나라의 진희보다 더한 악인이라나요? 서애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지요.
소인배의 편을 들어 서애를 내친 선조
이에 대해 선조는 교활하게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다가 소인배들의 편을 들어줍니다. 선조 역시 자기 이익에 반하는 제도를 시행하려는 서애가 불편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방납 이권에는 왕실도 연결되어 있어서 서애의 세제 개혁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겁 많은 선조는 중전 박씨부터 피난 보내려는 것을 서애가 힘껏 제지하자 서애가 영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서애는 임진왜란 때도 압록강 건너 명나라로 도망가려는 선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습니까? 선조에게는 나라의 운명보다는 자신과 왕실의 안전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다시 파병되었을 때, 명나라는 아예 조선을 직할통치 할 마음도 먹고 있었습니다.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려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에 서애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를 반대하였는데, 선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자신의 왕위만 보존되면 명의 직할통치도 개의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조는 “우리나라의 형세로는 절대로 이 적(왜적)을 당할 수 없으니, 중국 사람이 와서 이 땅에 와서 둔병하고 둔전하는 것도 안 될 것 없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서애는 1598년 11월 19일 파직되고, 한 달도 안 된 12월 6일에는 삭탈관직까지 됩니다. 수구세력은 이렇게 서애를 쫓아내고 서둘러 서애가 시도한 개혁정책을 무로 돌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구체제로 복귀시킵니다. 서애가 팽당하여 멀리 고향 안동으로 내려갈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서애가 낙향하면서 단양을 지날 때 쓴 시 <단양행(丹陽行)>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고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립니다.
(위 줄임)
我今流離經此中(아금유리경차중)
百口相隨飢凍迫(백구상수기동박)
疲牛瘦馬鞭不動(피우수마편부동)
日暮饕風吹虐雪(일모도풍취학설)
狐狸往往嘷我後(호리왕왕호아후)
猛獸咆咻當我前(맹수포휴당아전)
㩳然神動不可留(송연신동불가류)
百里行盡無人煙(백리행진무인연)
僮僕號呼兒女泣(동복호호아녀읍)
丈夫到此難爲顔(장부도차난위안)
平生學道未得力(평생학도미득력)
外物寧作秋毫看(외물영작추호간)
臨風快歌丹陽行(임풍쾌가단양행)
自古人間行路難(자고인간행로난)
내가 지금 유랑하는 신세로 이곳을 지나가기에,
식솔들은 따라오며 허기와 추위에 직면했네.
지친 소와 야윈 말은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데,
날 저 물자 거센 눈바람 사납게 몰아치네.
여우와 살쾡이 이따금 등 뒤에서 울어대고,
맹수는 포효하며 내 앞을 막아서네.
두려워 정신이 아찔해서 지체할 수 없는데,
백리를 다 가도 인가의 연기는 보이지 않네.
시동들은 비명 지르고 아이들은 울어대니.
대장부도 이쯤 되자 체면 세우기 어렵네,
평생 도를 학습해도 아직 효과 없으니,
몸 밖 사물(外物)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나!
바람 안고 가며 빠른 박자로 단양행을 지어 읊으니,
예로부터 인간의 행로는 고난의 길이로세.
한겨울에 찬바람을 맞으며 단양을 지나가는 서애. 그때만 하여도 단양은 심산유곡이었고, 더욱이 전란을 치른 뒤라서 그나마 마을들도 텅텅 빈 마을이 많았습니다. 서애는 몸도 시리지만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식솔들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같은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 이익 채우기에만 급급한 소인배들의 나라 조선,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아세우고 서애를 쫓아낸 조선! 이런 조선은 차라리 이때 망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징비록》을 쓴 서애는 지금 우리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서애 선생이 쫓겨날 때 조선의 정치판을 보면서 오늘날 정치판을 돌아보니, 오늘날 정치판도 암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라는 북한이 핵무기로 위협하고 세계 경제는 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럴 때 여야가 위기를 극복하려고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인데 이게 뭡니까? 아무리 야당 당수가 싫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한 번쯤은 영수회담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작년 10월 말에 이태원에서 159명이라는 아까운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는데, 대통령 신년사에 이에 대해 한마디라도 애도의 뜻을 표해주면 안 되는 것입니까? 또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당대표를 세우기 위해 대놓고 유승민, 나경원을 몰아내는 여당의 눈꼴사나운 행태는 무엇입니까? 서애는 비록 조선이 자신을 쫓아냈지만, 그래도 조선, 그 나라는 사랑하였기에 조선이 다시는 환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징비록(懲毖錄)》을 썼습니다. 그런 서애가 저세상에서 지금 이 땅의 후손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