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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14
7. 제식훈련약사(諸式訓練略史)
윤 흥 길
하오의 운동장 안에서 우리 말고 또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역시 좋아서 하는 노릇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들 수강생 일동은 구령에 맞추어 마지못해 수족을 놀리고 있었다.
낡은 헝겊쪼가리처럼 풀기 없이 늘어진 넓은 잎들을 주체스럽게 매단 채 플라타너스의 긴 행렬이 운동장가에서 마냥 힘겨워하고 있었다. 축구장 골문 근처를 휘덮은 바랭이잎과 수작하는 실바람 한 점 느낄 수 없는 날씨였다. 오직 누리에 무성한 것은 햇볕, 그리고 또 햇볕일 뿐……
"오(伍)와 열(列)! 오와 열!"
특히 그것은 우리를 담당한 체육과 주임 강 교수가 쓰고 있는 하얀 운동모의 비닐 챙 위에서 한껏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구령에 장단을 넣기 위해 그가 고개를 꺼떡거릴 적마다 파란색의 그 비닐 챙은 위로부터 쏟아지는 무더기 햇볕을 덥석 받아 곧바로 우리들 시야 속에 홱 뿌리고 또 홱 뿌리는 그 노릇을 쉬임없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운동모 자체가 너무 깊숙이 눌러 씌워진 탓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들 쪽에서 강명록 교수의 유명한 세모꼴 눈매를 역력히 볼 수 없는 진정한 이유는 그 비닐 챙이 이루는 짙은 그늘에 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강 교수는 자기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계속 유리한 위치를 고수해가며 어느 누구의 태만이나 실수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나, 하나! 왼발, 왼발! 오와 열, 오와 열!"
그늘의 맨 가장자리가 만드는 날카로운 선 때문에 우리 강 교수의 코는 중동이 싹둑 잘린 듯했고, 그래서 두루뭉수리 그 콧잔등 부위가 제 근본을 멋대로 벗어나 저 혼자 허공에 날름 떠 있는 듯했고, 또 거기만 특별히 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내처 옥외 강습의 강행이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 구석에 얼쩍지근한 땀기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어느덧 장년의 나이인 그에 비길 때 우리들 수강생 일동은 빛나는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너나없는 물렁이였다. 모두들 땀독에 빠져 있었다. 소금을 뒤집어쓴 듯이 눈알이 쓰리고 먼지투성이 위아래 트레이닝은 자꾸만 등덜미와 허벅지에 감겨들었다.
"걸음 바꿔이 갓!"
사실 행진 중에 걸음(보조)을 바꾼다는 건 그다지 어려운 동작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더위를 먹을 대로 먹어버린 우리의 지각(知覺)은 일단 받아들인 명령을 다리에까지 전달하는 일에 몹시 게으르고 불성실했다. 보나마나 결과는 엉망이었다. 일제동작이 되질 못하고 저마다 뒤죽박죽이어서 그것 때문에 또 한 번 고참 교수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간격을 넓혀 간다든가, 분대별로 방향을 바꿔 일단 흩어졌다가 원위치로 차례차례 되돌아와 다시 대오를 정비하는 등, 어느 정도 기계적 정확성 아니면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동작일 경우에는 가뜩이나 그러했다. 그래서 강명록 교수는 영 가망 없이 자주 틀리는 몇 사람을 따로 불러내어 실내 체육관 앞 백화나무를 구보로 돌아오는 선착순을 시키곤 했다.
"제군들은 썩었다!"
적당한 사이를 두고 연방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가지고 어떻게 이세들의 앞날을 올바로 인도할 것인가. 본인은 그저 한심스럴 뿐이다!"
그것은 실로 부당한 대우였다. 그와 같은 파격의 책벌을 우리가 달게 견뎌야 할 이유라곤 전혀 없었다. 거기는 논산이 아니었고, 우리는 소집 영장을 받고 온 신병이 아니었다. 지금의 처지가 아무리 피교육자 신분이라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사회인이었다. 다만,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1정(1급 정교사) 강습을 받으러 온 도내 중 고교 체육 교사들이기 때문에 1정을 따느냐 못 따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인데, 강 교수는 그와 같은 약점을 십분 활용하여 우리에게 시종 몰풍사납게 굴고 있었다. 우리는 입때껏 똑 부러진 항변 한마디 못 건넨 채 질질 끌려만 나온 참이었다. 거개의 수강생들이 과거의 사제지간이란 끈으로 강 교수와 질기게 맺어져 있어서 항변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강 교수의 고집불통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낫 둘, 하낫 둘, 간격 좁혀이 갓! 오와 열, 오와 열! 소대원간 간격 십 센치! 기준분대 너무 빠르잖나!"
교수의 주문에 응해서 우리는 제꺼덕 몸을 놀렸다. 동령에 맞추어 기준분대는 반걸음만 전진하고, 나머지 분대는 반우향우하여 옆 사람과의 어깨 사이가 더도 덜도 아닌 십 센티가 되도록 곁눈질을 해가며 용의주도하게 간격을 좁힌 다음, 기준분대와 마침내 평행이 이루어지는 순간 슬그머니 반걸음 전진해나갔다. 소대 전체가 한 덩어리로 오밀조밀 뭉쳐지자 정식 간격에서는 맡을 수 없던, 분명히 자기 것 아닌 남의 땀 냄새가 사방에서 역하게 풍겨져 왔다.
성의껏 하느라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교수의 입에서는 대고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치 간격이 십 센티를 벗어나거나 오와 열이 행여 삐딱하게 되는 날이면 당장 자기 봉급이 절반으로 깎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무정하게 구는 것이었다.
그의 음성에는 언제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입술이나 턱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큰 목청을 낼 줄 알았다. 반평생을 연병장 아니면 운동장에서 보낸 사나이답게 그는 별로 힘도 안 들이고 군중을 휘어잡는 재간을 터득하여 비상금처럼 휴대하고 다녔다. 더군다나 악조건의 기후마저 그의 위엄을 배가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적마다 두껍게 생고무를 댄 농구화 밑창을 통해서 후끈거리는 지열이 고스란히 발바닥에 느껴졌다. 앞사람, 그리고 옆 사람들의 발부리에서 이는 먼지가 뽀얗게 오르는 속을 겨우 뚫어 넘고 나면 어느새 또 그 다음 먼지구름이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동장의 모래는 사금가루라도 달팍 쏟아 부은 듯 저마다 하나씩들 쬐꼬만 태양이 되어 무수히 반짝이면서 까끌까끌 유난히도 시선에 밟혔다.
우리의 마지막 불평마저 그놈의 더위가 앗아가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당최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불평들인 데다가 또 그런다고 사정 봐줘가며 놓아먹일 강 교수도 당최 아니었다. 우리에겐 다만 복종이 있을 뿐이었다. 오직 구령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시늉이나마 해보일 따름이었다. 하기야 우락부락한 체격에 성깔마저 한가락씩들 지닌 친구들이면서 좋게 얘기해서 소위 그 체육인간의 의리란 것, 엄격한 선후배 관념이란 것 때문에도 설령 강 교수가 우리 은사가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했다. 먹혀들지 않을 불평보다는 차라리 요지부동의 그 위엄 앞에 몸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편이 어떤 의미에선 아주 마음 편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위를 견디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적막에 가깝던 교정 분위기의 모서리 한쪽이 갑자기 허물어지면서 한 떼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운동장을 성큼 가로질러 왔다. 그리고 곧이어 소리의 임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방학중이라서 거의 빈집이나 매한가지이던 모교의 교정이 비로소 활기를 띠었다. 멀리 언덕 중간에 자리잡은 문리대 동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생들 패거리였다. 그치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수강생 신분인데, 매강좌마다 시간을 앞당겨 미리감치 끝내고 나오는 바람에 우리의 피곤은 한층 실감이 더했다. 어제의 그 일만 해도 사실 그치들 때문에 일어난 셈이었다. 상대가 이문택이란 놈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감히 오후 강좌를 내리 까먹을 생각 같은 건 엄두도 못 냈을 터이었다.
드디어 오후 강좌가 막 끝나려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강명록 교수는 우리에게 '편히 쉬어'를 명한 다음 출석부를 꺼내들고 점호를 시작했다. 호명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열중에 섞여 있는 내 친구들을 눈으로 더듬었다. 별일 있을 게 뭐냐고 큰소릴 쳤으면서도 그들은 누구나 다 속으로 편찮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안종복!"
안종복이는 나하고 동기동창이자 어제 오후에 행동을 같이한 친구였다. 안종복을 바라보는 강 교수의 눈에서 아침에 전해들은 얘기가 단순한 공갈만이 아님을 얼핏 읽을 수 있었다.
"서창원!"
서창원이 역시 똑같은 입장이었다. 더러는 귀에 익은 이름, 또 더러는 전혀 귀에 선 이름들이 주욱 꼬리를 물다가 종내에는 내 차례가 되었다.
"윤성철!"
나는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그것은 생판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목쉰 대답이었다. 모든 소리들이 한결같이 염천에 녹아 엿가락 같은 길고 끈끈한 형상으로 운동장 바닥을 꼬물꼬물 헤엄치는 모양이 눈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게 싫었다. 제식훈련도 싫고 출석 점호도 싫고 호봉이 오르는 1정 자격도 다 싫었다. 어떤 한 분위기 속에 휘말려 그 분위기와 똑같은 형상으로 마냥 엿가락처럼 늘어져 가는 나 자신의 모습에 치를 떨면서 나는 호명이 끝나는 순간만을 조급하게 고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명(姓名)의 고리에서 또 다른 성명의 고리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슬이었고, 그것이 내 몸뚱어리를 열두 바퀴 반이나 감고 돌다가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탁 풀려나갔다.
"윤성철, 서창원, 안종복, 이상 세 사람은 해산하는 즉시 내 방으로 올 것!"
출석부를 소리나게 덮으면서 강 교수가 말했다. 내 수업 중에 내가 같은 종류의 은혜 아닌 은혜를 베풀었을 때 내 학생들이 늘 그러했듯이 체육과 수강생 일동은 해산의 구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우 기성을 올리면서 한나절 동안 꽁꽁 뭉치고 다져져 웬만한 파괴력 가지고는 쉽게 망가뜨리지 못할 것 같던 4열 횡대의 틈을 간단히 쪼개면서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피교육자 신분으로 돌아오면 누구나 나이 네댓 살씩은 젊어지는 법인 모양이었다.
호출 당한 우리만이 횅댕그렁한 운동장 복판에 버려져 있었다.
"즉시 오라는데 뭘 꾸물대는 거야, 이놈들아!"
우리들 등뒤에서 누군가 호통을 쳤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문택이 거기에 서 있었다.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면서도 녀석은 무슨 살판이나 난 듯이 혼자 좋고 혼자 재미있었다.
"저거 잡아가는 귀신 없나……"
서창원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체육과가 속해 있는 사대 교수실은 운동장에서 한참거리였다. 불청객인 이문택이를 꽁무니에 덤으로 달고 우리는 별수 없이 강교수 방으로 향했다.
어제 또한 오늘 못잖이 지독하게 무더운 날씨였다. 아침나절에 벌써 녹초가 되어 훈련을 받는다기보다는 당장 운동장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과 힘겹게 겨루는 상태로 오전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전 일과가 끝날 무렵쯤 해서는 강의가 일찍 파한 서생패들에게 둘러싸여 완연한 구경물 신세가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 틈에 공교롭게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끼어 있는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오랜만에 고교 동창 이문택이와 어울려 학교 근처 술집과 식당을 겸한 싸구려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문택이가 노천에서 직사하게 고생하는 우리를 슬슬 구슬러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너들 도대체 무신 충성이라고 오뉴월 이 염천에 그 따위 강습을 꼬박꼬박 받고 있나. 거 왜 적당히, 라는 것 있잖어, 적당히. 눈치 봐가며 적당히 빠져 버려라, 적당히."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 교순가 교관인가 하는 친구 되게 깡깡거리더군. 도대체 뭣 때문에 오뉴월 이 염천에 새삼스럽게 제식 교련 따위를 들고 나오는 거야, 들고 나오길. 몰라서 가르치나? 다 잊어먹었을까 봐서 가르치나? 까짓것 말야, 국어선생인 이 이문택이도 훤히 꿰는 걸 가지고, 더더구나 군대까지 갔다 온 놈들을 붙잡고 말야,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격으로 저 혼자만 아는 것처럼 깡깡거려, 깡깡거리길."
"동작이 많이 개편됐대."
"개편 좋아허네. 까짓것 지가 개편되면 도대체 얼마나 개편됐다는 거야. 아까 보니까 전에 내가 배운 것하고 똑같던데."
"문외한 눈에는 똑같은 것 같아도 전문가들 보기엔 천양지차가 있어."
"이야, 울리지 마라, 울리지 마. 까짓것 앞으로 가라면 앞으로 가고 뒤로 돌라면 뒤로 돌고 밤송이로 까라면 까는 것으로 끝나는 거지, 그 알량난 학과에 도대체 무신 개편되고 마잘 건덕지가 있다고……"
국어과 강의실에만 들어앉아 1정 강습을 받고 있는 문택이로서는 우리 나라의 제식훈련(또는 제식 교련)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많이 수정되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또 이해해줄 용의가 전혀 안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이나 강 교수의 무리한 교육 방식 자체에 심한 거역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부터 체육을 전공했다는 사실에 항상 열등감을 표시해온 안종복이 갑자기 열을 올리며 경례 동작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변명 겸 두둔 비슷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잘 봐. 똑똑히 잘 봐두란 말야. 학교 다닐 때나 군대 시절에 우리가 배운 경례 동작은 이랬었지. 차렷 자세에서 하의 봉합선상에 붙어 있던 오른손을 곧장 올려 가지고 최소의 시간에 최단 거리로 인지와 중지 부분을 오른쪽 눈썹 우단 부분에 갖다 붙이면 그걸로 충분했단 말이야."
"그랬었지. 오른손을 오른쪽 불알에 갖다대면 그건 경례가 아닐 테니까."
"그랬는데 지금은 그게 아냐. 요즘 개편된 제식훈련에 따른다면……"
"요즘에는 오른손을 왼쪽 눈썹에 세운단 말인가?"
"얻어터지기 전에 잠자코 들어! 요즘은 최단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오른손이 이렇게 바깥쪽을 돌아서 올라붙는단 말야."
"오른손이 그렇게 장거리 여행을 해야 할 이유가 뭐야?"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야. 지금까지 우린 미국 아이들 걸 그대로 답습해서 사용해왔는데, 우리 실정에 안 맞기 때문에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절도 있게 개편해놓은 거야."
나중 말은 강 교수의 솜씨를 앵무새처럼 고대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처음 것은 교련 교범에 적힌 내용을 적당히 표절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만한 정도의 설명에 이문택은 색다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내 이죽거리고만 있던 문택이의 표정 가운데 느닷없이 진지한 구석이 떠오른 것이다.
"뭔가 심상찮은 것 같은데. 분명히 뭔가 심상찮어."
도수 높은 안경 저편에서 실제보다 비정상에 가깝게 불룩 솟아 보이는 눈알을 서너 번 신경질적으로 끔벅이고 나더니 이문택은 이윽고 제 얼굴에서 거추장스런 이물을 철거해버렸다. 안경을 벗음은 곧, 이제부터 단단히 흥분할 작정이니 그리 알라는 신호나 매일반이었다. 그는 땀에 젖어 이마 복판에 찰싹 늘어붙은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추어올린 다음 안경을 걸쳤을 때보다 훨씬 작아진 눈알을 한껏 부릅떠 좌중을 거만하게 둘러보는 것이었다.
"경례 말고 다른 동작들도 모두 그런 식으로 변했나? 말하자면 최소의 에너지 소비나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의 원칙 같은 게 무시되고 오로지 절도 위주의 방향으로?"
"뭐, 꼭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충은……"
"그래 너들은 절도 위주, 질서 위주의 그런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지?"
"어떻게 생각하긴, 임마. 싫어도 배우는 거고, 배운 담엔 돌아가서 애들한테 다시 풀어먹은 거지 별수 있어."
"이 먹통들아!"
주먹을 들어 꽝하고 식탁을 치는 발마에 우리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약골이 흥분했을 때의 모습은 아무래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웃으려다 말았다. 웃을 수만 없는 분위기를 이문택이 우리에게 강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먹통들아, 그건 빙산의 일각이야. 진짜로 중대한 변화는 그게 아냐. 다른 데 있어. 그런데 여지껏 그것도 눈치 못 채고 오른손이 어떻고 봉합선이 어떻다고 한가한 소리나 씨월거리고들 있다니, 역시 철봉대에나 매달리고 자란 놈들은 별수 없단 말야. 이봐! 여기 술 좀 가져와!"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점심에 곁들여 생각지도 않던 낮술까지 얻어 마시게 되었다. 애당초는 얼굴이 표나지 않을 만큼 냉막걸리 한두 잔 정도로 갈증이나 풀 생각이었는데, 술잔이 거듭될수록 턱없이 고조되는 이문택의 변설에 알게 모르게 말려들다보니 어느덧 오후 강좌가 시작된 줄도 까맣게 잊어먹었다.
이문택은 지겹도록 그놈의 제식훈련을 물고 죽살이를 쳐댔다. 그의 시정여일한 주장에 따를 것 같으면 요컨대 그것은 대기 중의 산소 함량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현상에 비견할 만한 변화였다. 그만한 얘기에도 뭔가 턱 심장에 와서 쨍그렁하고 부딪치는 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말하자면 그것은 해방 후 이 땅에 이식해놓은 프래그머티즘이나 합리주의 사고의 효용 가치를 전면 재평가하려는 의미이며 되도록 불필요한 형식이나 절차 따위를 매사에서 제거함으로써 우리들 인체에 가해지는 무리를 최소한으로 덜어주려는 인본사상에 가해지는 일대 수정 작업이며, 동시에 그것은 오늘과는 달리 우리 모두의 내일이 오래 분해 소제 않은 시계처럼 빡빡히 돌아가게 될 것임을 타전해주는 일종의 모르스 부호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이문택은 이렇게 선언해버렸다.
"돌대가리들이야 이렇게 손에다 쥐어줘도 모르겠지. 모르는 게 당연할 테지. 허지만 말야, 난 달라. 나는 다르단 말야. 체내의 모든 감각 기관이 온통 그쪽을 향해서 열려 있거든. 그 얘길 들었을 때 난 대뜸 그것이 보내는 무전을 해독해낼 수 있었어. 너들 인제 두고 봐라, 내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문택이는 층계를 한꺼번에 서너 단씩 성급히도 건너뛰고 있었다. 기회 있을 적마다 제 놈 입으로 형이하학 전공이라고 의식적으로 한 수 접어 깔아보는 우리들 체육선생 듣기에도 천장 모르게 비약적인 논리를 그는 끝없이 펼쳐내고 있었다.
점심 겸 낮술을 엔간히 끝낸 다음 우리는 곧장 시내로 진출하여 번화가의 다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오후 강좌를 내리 까먹은 걸 아무도 후회하지 않았다. 술김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기회만 닿는다면 얼마든지 더 까먹어도 좋다는 배짱들이었다. 이렇게 입으로는 연신 흰소리를 하면서도, 그러나 기실은 모두들 우울했다. 이문택의 성급함은 십분 인정하지만, 일단 그런 얘길 듣고 난 우리는 아무래도 예사스러운 심정일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충분히 우울해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문택의 예감이 장차 맞고 안 맞고는 둘째치고 우선 그런 얘길 서로 간에 입밖에 내고 귀에 담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젊은 우리는 벌써 겁탈을 당해버린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문택의 그 변설은 그만큼 우리에게 충격적이었다.
다방 안에 유행가가 흐르고 있었다. 샹송에 가까운 번역 가요풍의 노래였다. 굵고 낮고, 그리고 약간 쉰 듯한 음색의 자 목소리가 밋밋한 음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그래, 루비나 노래는 발가락으로 들어봐도 재치 이상의 뭔가가 분명히 있단 말야."
엉뚱하게도 이번에는 대중 가요였다. 언제 제식훈련 따위를 들먹거렸더냐는 듯이 천연덕스러운 태도였다. 이문택은 유행가에 관해서도 아는 체를 많이 해가며, 외국에 오래 나가 있다가 얼마 전에야 귀국했다는 가수를 이야기했다.
"그녀의 노래는 영혼의 저쪽의 그 저쪽을 손톱으로 북북 할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문택이를 제외한 우리는 그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사랑한다고오 말해주우
사랑한다고오 말해주우
그러자 루비나의 나지막한 슬픔이 내게로 서서히 전이(轉移)되어오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랑한다고오 말해주우
사랑한다고오 말해주우
그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앞으로 필요 이상의 장거리 여행을 거쳐 오른손을 오른 눈썹 우단(右端)에 갖다 붙이지 않으면 안 되게시리 된 우리의 처지를 어느새 슬퍼하고 있었다.
"자넨 무슨 용무지?"
고회전하는 선풍기 앞에서 강명록 교수는 대뜸 이렇게 따지는 투로 물었다. 우리 꽁무니에 묻어와 뒷전에 버티고 서 있는 이문택이가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모양인지 그는 더 이상 참지를 못했다.
"가르침을 받을까 해서 친구들을 따라왔습니다."
"자네는 우리 체육과 출신이 아니지?"
"아닙니다. 허지만 운동이라면 뭐든 조금씩은 다……"
"좋아, 자네 입으로 스포츠맨이 아니라니까 무례를 용서해주지."
그것으로 강 교수는 이문택과의 대화를 간단히 끝내버렸다. 더 이상 상대할 의사가 없다는 눈치였다. 그는 교수실에 와서 갈아입은 하얀 모시저고리 앞자락을 열어 알통으로 뭉친 그들먹한 가슴에 선풍기 바람을 잡어 넣었다. 사람인지라 강 교수 역시 덥긴 더운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소용없어. 좋게 얘기할 때 어서들 돌아가!"
강 교수는 우리를 향해 재삼 못을 박아 자신의 결의가 얼마나 굳은가를 강조했다. 그러거니 마려니, 우리는 숫제 멍청한 척하고 눌러 버티었다.
"개강 첫 시간에 내 분명히 말했었지, 한 시간이라도 결강하는 사람은 수료증 다 받은 줄 알라고. 내일부터는 너희들 강의 안 받아도 좋아. 재수강 외에는 어차피 수료 못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나올 필요 없어."
비닐 챙의 그늘에 가려 운동장에서는 눈여겨볼 수 없던 강 교수의 눈매가 전보다 더욱 세모꼴이 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교수님. 이번 기회에 혼 좀 단단히 내주십시오. 아 글쎄, 강의 시간에 대낮부터 술들을 퍼마시질 않나, 이것들 아주 형편 무인지경이더군요."
오직 이문택이란 놈만이 겁 없이 방자하게 굴었다. 대척은 안 해도 강 교수는 노골히 불쾌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었다. 운동장에서 혼자 따돌려보낼 걸 공연히 달고 왔지 싶었다. 나는 이문택의 옆구리를 찔벅거려 가지고 서둘러 밖으로 데리고 나와버렸다.
"사관학교 출신 너희 교수님께서 재수강을 선언하셨으니까 너희들 내년 이맘때 여기서 다시 상봉하겠구나."
교수회관 층계를 끌려 내려오면서 문택이가 일기죽거리는 소리였다. 바로 뒤쫓아 나오던 서창원이 따귀라도 갈길 기세인 걸 겨우 뜯어말렸다.
"재수강 말고도 방법이 있겠지.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말만이라도 안종복은 자신 있게 했다. 재수강이라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1정 자격 취득이 1년 후로 미뤄지는 데서 오는 갖가지 손해는 그만두고 어차피 맞을 매를 내년까지 묵혀가며 키운다는 건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포기하기엔 그간 불볕 속에서 공을 들인 며칠간의 수고가 눈물이 나도록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곤경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용천뱅이 떼쓰듯 물고 늘어지는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안종복이 힘주어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학점도 따고 졸업도 한 사례가 재학 중에 더러 있음을 저는 잘 안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종복이의 그 방법에 따르기로 방침을 굳혀버렸다.
자기 집 응접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쉬는 두 시간 남짓 동안에 강명록 교수는 모두 해서 담배를 일곱 가치 태우고 화장실에 두 차례 다녀오고 냉장고에서 꺼내온 얼음냉수를 자기 혼자서만 두 컵이나 마시고 석간 신문 한 장을 앞뒤로 골골샅샅 죄 훑어 읽고 밖에서 걸려온 전화를 세 번 받았다. 교수의 말투로 미루어 통화의 상대는 매번 동일인인 듯 짐작이 갔다. 응접실 바닥에 나란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버티는 우리 일행 가운데서 이문택이 혼자만이 태도가 당당했다. 그는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교수의 동작 하나하나를 체크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꿀릴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은연중 과시하고 있었다. 같이 가야만 한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근신할 것을 단단히 다짐받고 또 데리고 온 것인데, 와서는 별로 근신하는 기색이 안 보였다. 푹신한 소파에서 쉬는 두 시간 남짓 동안에 강 교수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아무리 그래봐야 나한테는 안 통한다는 걸 잘 알잖나. 괜히 시간 낭비 말고 집에 가서 편히들 쉬기나 해."
그리고 네 번째 전화를 받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면서 강 교수는 이렇게 막말을 쏟았다.
"예서 더 버티면서 농성을 하든지 데몰 하든지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강명록 교수가 밖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우리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다방에서 그와 동년배로 보이는 어떤 풍채 좋은 신사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잠시 담소를 했다. 고맙게도 그 신사는 바로 옆자리의 우리를 이내 의식해주었다. 신사는 강 교수와 우리를 번갈아 보고 나서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자들인가?"
"무슨 소리, 난 저런 제자들 둔 적 없어!"
여전히 우리들 쪽은 거들떠도 안 보면서 강 교수는 정나미 확 물러앉는 대꾸를 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잘못 본 게로군. 하지만 자네가 날 한사코 밖에서만 만나겠다고 고집부린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먼. 자네 설마 마누라 도둑맞을까봐서 날 집안에 끌어들이지 않은 건 아니겠지? 허허허허……"
실없는 농담 끝에 신사는 호걸풍의 너털웃음을 했다. 언행에서 풍기는 체취 같은 걸로 미루어 안정된 기업체를 가진 수완 좋은 사업가의 틀이었다. 그는 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철두철미 정장을 갖춘 차림이면서도 말씨나 행동거지 모두가 시원시원해서 조금도 갑갑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덥고 피곤해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낮 동안에 땀과 먼지로 몇 꺼풀 도배를 해버린 몸뚱어리에 더러운 속옷을 그대로 걸친 채였고, 세수조차 제대로 못 하고 나왔기 때문에 스스로 느끼는 불결감을 견디기가 여간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에어콘이 가동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드넓은 다방 안에 깝북 잠긴 초저녁 잔염(殘炎)을 쫓기엔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만났는데 형님 대접을 안 받을 수 있나. 자아, 그만 나가지."
신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우리들 쪽을 한번 힐끗 보고 나더니 강 교수도 따라 일어났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몸짓이 매우 굼떴다.
물론 우리는 애초의 결심대로 술집까지도 줄레줄레 따라들 들어갔다. 화장실까지도 뒤쫓아 다니는 판인데 더구나 명분이 번듯한 풀입을 사양할 리 만무했다. 생맥주집 홀에서 우리는 강 교수의 손님인 그 신사와 비로소 수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옆자리가 선참의 다른 주객들로 꽉 들어찼기 때문에 마땅한 앉을 자리를 발견 못 한 채 통로를 어정쩡히 막아 선 꼴들이 딱하게 보였음인지 그 신사가 큰 소리로 우리를 부른 것이다. 그의 입에서 합석하는 게 어떠냐는 제의가 떨어지기 무섭게 강 교수 쪽에서 끙짜를 놓고 마잘 겨를을 주지 않고 잽싸게 합석을 단행해버렸던 것이다.
처음에 실업가쯤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전연 딴판으로 그는 교육자였다. 최 교수는 마치 자기 학생들을 상대할 때처럼 다짜고짜 말을 턱 놓으며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노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재학중으로 보기엔 너무들 늙은 사람 같고…… 강 교수하고는 덮어놓고 그냥 사제지간 정도로 알면 무방하겠나?"
최 교수가 이렇게 묻자, 정작 사제지간인 우리는 말을 아끼는 참인데 뭣도 아니고 뭣도 아닌 문택이란 놈이 제꺼덕 대답을 가로채고 나섰다.
"네, 사제지간입니다. 그렇지만 약간 복잡한 사정이 낀 사제지간인 셈이죠."
낮부터 이문택과 감정이 나빠져 버린 서창원이 내 귀에다 대고, 저 새끼 이담에 죽으면 틀림없이 주둥이부터 썩을 거라고 악담할 정도로 아닌게아니라 문택이놈은 잠시의 근신을 깨고 나더니 차후의 대화를 혼자서 도맡을 심산이 분명했다.
"호오, 그래? 그 복잡하다는 사정이 뭔지 궁금하군."
"반대로 제가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최 교수님도 추수지도(追隨指導)의 학점 나부랭일 가지고 제자들한테 쩨쩨하게 구신 적이 있으십니까?"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그건, 그건…… 이 군이라고 했지? 이 군이 아직도 인간을 몰라서 그래. 나처럼 겉으론 서털구털해 보이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학점도 후할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 사실은 무지한 인색한이지. 마찬가지로, 강 교수 같은 사람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이 행동하지만, 만만에 말씀! 속새로는 마음이 여릴 대로 여려서 허물 하나만 벗고 나면 자기 살이라도 깎아 먹일 사람이란 말야. 애로사항이 있는 모양인데, 이따가 내 강 교수의 아킬레스건이 어딘지 일러줄 테니까 잘들 공략해봐."
이문택이 아무렇게나 뱉어낸 말의 여운이 우리를 한참이나 침묵시켰다. 강 교수는 방금 마시기 시작한 맥주 맛이 유례없이 쓰다는 듯이 오만상을 하고 있었다. 최 교수는 강 교수와 우리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는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아가며 연방 싱글벙글해하고 있었다. 술집은 초만원이었다. 젊은이도 많고 늙은이도 많고, 개중에는 시건방지게 계집애들의 모습까지 간간이 눈에 띄었다. 낮의 더위에 비례하여 그만큼 갈증을 풀러 오는 사람들도 더 많은 성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다봐야 우리 강 교수처럼 술을 멍청하고 살벌하게 마시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였다. 술로 웬수라도 갚을 작정인 듯 조금의 쉴 새도 없이 고래로 퍼마시는 것이었다. 잠깐 동안에 강 교수 앞에는 빈 조끼가 즐비해졌다. 주인공이 그 모양이니 우리 역시 잔을 비우는 속도가 자연 빨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여름 술은 독약처럼 몸에 퍼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잘도 못 하는 술을 벌컥벌컥 몇 잔 거푸 들이켜고 나서 나는 볼품없이 남들보다 앞질러 취해버렸다.
"그런데 자네들의 애로사항이란 도대체 뭐지?"
최교수가 이문택에게 넌지시 묻고 있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이 친구들이 강 교수님 밑에서 일정 강습을 받고 있는 중인데요, 어제 저를 만나 가지고 제가 유혹하는 바람에 오후 강좌를 사보타지했거든요. 그래서 그만 교수님의 노여움을 사가지고 이 시간 현재 협박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년에 재수강을 받기 전엔 수료증을 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문택이 우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문택이 역시 벌써 꽤 취해 있는 말씨였다. 녀석은 저 나름대로 지금 한창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어려워하는 강 교수를 상대로 겁도 없이 계속 용용거리는 데는 뭔가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분위기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뭔가 틀림없이 불상사가 생기지 싶었다.
"우리가 강좌를 빼먹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에 매우 유익한 토론을 했습니다. 단순히 놀고싶은 욕심으로 결강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갑자기 초조하게 굴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확실히 취해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취기가 평상시엔 없던 말을 반죽 좋게 시키고 있었다. 애당초 내가 하려는 얘기의 골자는 그게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교수 앞에서 무진장 아첨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강 교수가 지닌 저 탁월한 통솔력과 위엄에 관해서 자주 언급한 것 같다. 강 교수의 그 가부장적 위엄과 맨 처음 조우하는 순간에 느끼는 일말의 반발심이나 저항감,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을 딛고 군림하는 피치자(被治者)로서의 우리의 복속의지(服屬意志) 같은 것에 관해서 변설이 매우 장황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끝판에 가서 버릇없는 국어 선생놈한테 느닷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기억이 얼얼하다. 그때 나는, 개인이기를 포기해버린 채 가부장의 슬하에 뛰어드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그 얼마나 살갑고 평안한 것인가를 한참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네놈은 개다! 윤성철이는 개새끼다!"
문택이란 놈이 그 알량한 주먹을 들어 나를 또 치려 하면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홀 안의 손님들이 우리를 일제히 주목하게 된 것은 아마 이 소동으로 말미암음이었을 것이다. 최 교수를 위시해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사이에 들어 말리는 바람에 소동은 그런 정도에서 곧 가라앉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못 할 변화는, 소동 이후부터 이문택을 보는 강 교수의 눈에 어딘지 모르게 따뜻함이 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우리 강명록 교수는 천근같은 입을 열어 그러잖아도 이미 묵사발이 된 내 체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해버렸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 자리에서 흉금을 모두 털어놓는 게 좋겠군. 모두들 내가 너무 심하다고 그러지만, 따지고 보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심하게 굴도록 유도하는 건 자네들이야. 나와 자네들 사이는 일종의 줄당기기야. 줄당기기에서 번번이 지기 때문에 지내들은 자꾸만 매저키스트가 되어가고, 나는 또 반대로 번번이 이기기 때문에 결국 원치 않는 사디스트가 되고 마는 셈이지. 처음에야 물론 불평을 억눌러가며 질서와 단결이 생명인 집체 훈련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지만, 그러다가도 억누름을 서로 주고받는 그 과정에 맛을 들이다보면 차츰 목적하고 수단이 전도되어서 종당에는 가르치기 위해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억누르기 위해서 가르치는 형국이 된단 말야. 내 말 알아듣겠나?"
대충 이런 뜻의 얘길 강 교수는 했다.
그리고 자기 얘기를 더욱 실감나게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는 시골 할머니들이 곧잘 하는 옛날 얘기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옛날 어느 산골에 사는 아낙네가 건넌 마을 잔칫집에서 떡을 얻어 머리에 이고 밤늦게 고개를 넘다가 호랑이를 덜컥 만났다. 떡을 내놓으면 살려주마고 호랑이가 말을 했다. 아낙네가 내주는 떡을 맛있게 먹은 호랑이는 이번엔 아낙네의 오른팔을 요구했다. 그것만 떼어주면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조건이었다. 그 말을 믿고 아낙네가 자기 팔 하나를 뚝 떼어 던지자 그걸 덥석 받아먹고 난 호랑이는 또다시 왼팔마저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다음은 오른다리, 그리고 그 다음은 왼다리…… 이런 순서로 아낙네는 자기 몸 조각을 시나브로 하나씩 빼앗기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야기가 점입가경이군, 점입가경이야. 자아, 그런 의미에서 또 한 잔!"
최 교수는 까닭 없이 마냥 즐거워했고,
"이제까지의 소생의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녀석들로부터 제식훈련의 변천에 관한 얘길 듣고, 이거 예삿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강 교수님한테서 직접 자세한 얘길 듣고 싶어서 이렇게 따라온 겁니다. 어떻습니까, 교수님만 좋으시다면 소생은 기꺼이 경청해드리겠습니다만."
문택이란 놈은 이렇게 엉뚱한 소리로 강교수를 구슬리는 것이었고,
"그게 좋겠군요."
"선생님, 이 배워먹지 못한 놈한테 따귀 한 대 때리는 셈치고 그 얘기나 들려주시죠."
기를 못 펴고 있던 종복이와 창원이까지 덩달아 나서서 부추김을 하고,
"뭘, 술좌석에서 그런 얘길 다……"
쑥스럽다는 듯이 강 교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갑자기 점잖은 표정을 했다.
모두들 맑은 정신들이 아니었다. 서먹거리던 분위기가 껑충 한 바퀴 재주를 넘는가 싶더니 화제를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들 가고 있었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최 교수는 거의 안달하다시피 심한 재촉을 했다.
"무슨 얘긴데 그래? 오른팔을 내놓으라곤 안 그럴 테니까 염려 말고 얘기해봐. 어서!"
그놈의 술이 유죄였다. 평소에 그토록 엄격하기만 하던 강명록 교수였다. 그러던 그가 웬일로 두꺼운 갑옷을 훌훌 벗어 던지면서 정말 파격적인 분위기 속에 간단히 투신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 군은 역시 영리한 사람이야.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없어도 내 지론이 뭘 의미하는지를 거의 정확히 간파하고 있거든. 좋아, 내 이 군을 위해서 제식훈련변천사를 약식으로 강의해주지."
조끼 바닥에 잠긴 생맥주를 마저 비우고 나서 우리의 강 교수는 본격적으로 강의 폼을 잡았다.
"입론의 기초를 나는 어떤 한 단위 사회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가장 첨예하게 반영하는 것이 바로 그 사회가 실시하는 제식훈련이라는 전제 위에 둔다. 왜냐하면 제식훈련이란 것이 본래 개인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훌륭하게 하나의 소사회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상위개념의 사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다시 말해서 제식훈련 그 자체가 벌써 하나의 완벽한 집단 행위, 즉 사회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과거에 제국주의 일본 군대의 제식훈련을 경험했다. 그네들은 국민적 단결과 전투적 배양을 도모한다는 구실 아래 거의 인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무시하는 선으로까지 각개 동작이 기계적이고 정도 이상으로 행동 반경이 크고 넓은 형태의 제식훈련을 무모하게 강행해왔다. 일제와 똑같은 예로 나치 독일을 들 수 있다. 전쟁 영화 같은 걸 봐서 제군들도 잘 알겠지만 나치 군대는 경례 동작을 할 때 이렇게……"
그 순간, 말만 가지고는 턱없이 미흡하다 생각했음인지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실연까지 해 보였다.
"오른발을 들어 뻗장다리로 이렇게 한 바퀴 원을 그려서 왼발 뒤꿈치에 꽝하고 소리나게 갖다붙인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나치 아이들은 오른손을 번쩍 세워 히틀러에 바치는 충성을 매번의 경례 때마다 목이 터져라고 서약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미국 아이들은 똑같은 전쟁 상황하에서도 훈련의 제식이 흐르는 물같이 유연하고 또 자연스럽다. 그네들은 결코 인체에 무리를 강요하는 법이 없고, 따라서 동작 모두를 최단의 시간에 수행함으로써 최소의 에너지를 소비하여 최대의 성과를 올리는 경제적인 방법을 쓴다. 바로 이것이 자유 민주 체제와 획일 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인 것이다."
"그래서요?"
"그리고 제군들은 화보나 기록 영화 같은 걸 통해서 이북 아이들이 분열을 벌이는 광경을 더러 봤을 것이다. 행진이나 정지간의 제반 동작이 크고 거창하기로 북괴는 가히 세계적이다. 북괴 아이들은 행진할 때 무릎을 굽히지 않고 거의 수평으로 세워서 번쩍 차올림과 동시에 팔의 전후 행동 반경이 앞으로 구십 도……"
이때 강 교수가 주먹 쥔 팔을 전방으로 90 힘차게 내뻗는 바람에 오백 씨씨짜리 조끼 하나가 시멘트 바닥에 굴러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박살이 났다. 주위의 테이블에서 손님들이 일제히 일어서고 웨이터가 둘씩이나 달려오는 법석이 있었지만 그 북새도 아랑곳없이 강 교수는 강의를 단호히 계속했다.
"앞으로 구십 도, 뒤로 사십오 도, 도합 일백삼십 도가 넘는 요란한 호(弧)를 그리면서 흔들어댄다. 우리가 느끼기엔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야단스럽고 꼴불견이고 힘들어 보이지만 북괴 아이들은 그것으로 즈이네들의 왕성한 사기, 철석같은 기강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요?"
"그럼 우리 한국의 제식훈련의 실태는 어떠한가.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는 왜정 때 일제 군국 체제의 제식훈련에 오래 젖어왔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이번엔 미국 아이들 걸 그대로 받아들여 병영이나 학교에서 두루 활용해 나왔는데, 그 후 급변하는 국제 정세나 제반 국내 여건에 대처하기엔 미흡하다는 판단 아래 미식 제식훈련을 한국 실정에 맞게 수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 경례 동작만 해도 전에는 이렇던(실제로 강 교수는 구식, 다시 말해서 미식 경례를 멋지게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것이 지금은 이렇게(그는 이번엔 신식, 다시 말해서 한국식 경례를 해 보였다) 바뀌었고, 차렷 자세나 행진 및 정지간에 있어서의 주먹도 전엔 달걀을 쥐듯 자연스럽게 쥐던 것이 오늘날은 엄지가 집게손가락 둘째 마디를 꽉 누르도록 힘차게 쥐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행진간의 양팔 동작도 앞으로 사십오 도, 뒤로 십오 도 흔들던 미식을 고쳐 진폭을 크게 넓혀놓았고, 또 팔을 흔들 때는 손등이 반드시 위를 향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무릎 각도도 매일반인데, 특히 행진간에 방향 전환을 할 때는 제일보를 무릎을 굽히지 않은 채 사십오 도 위로 올려 힘차게---이 말에 주의하기 바란다---힘차게 내딛어야만 한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제식의 변화가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 실정이 개인보다는 확실히……"
"이봐, 선생!"
별안간 감때사납게 울리는 웬 목소리가 일사천리로 달리던 강교수의 말허리를 중도에서 뚝 꺾어놓았다. 이때 우리는 홀 안쪽 테이블에서 이쪽을 향해 거의 뜀걸음으로 다가오는 건장한 체격의 청년을 볼 수 있었다.
"뭐가 어쩌구 어째?"
우리의 숨구멍을 틀어막듯 통로에 버티고서며 청년은 대뜸 시비를 걸어왔다‘
"술집에 왔으면 곱게 술이나 처마시고 갈 일이지, 뭐 나치 아이들이 어떻구 이북 아이들이 어떻다구?"
"당신 뭐야? 누군데 감히 뛰어들어서 학구적인 분위길 훼방놓는 거지?"
이문택이 안경을 벗어 남방 웃주머니에 찌르면서 오는 시비를 맞받았다.
"쪼무래긴 잠자쿠 있어! 다아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뛰어드는 거야! 선생, 실례지만 신분증 좀 봅시다!"
일껏 마신 그 술이 다 어디로 숨었는지 나는 어느새 맨숭맨숭한 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 강 교수를 턱으로 가리키며 최 교수가 내게 눈짓을 했다. 나는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기회를 살폈다.
최교수가 청년 앞으로 다가서며 예의 그 호걸풍의 너털웃음부터 터뜨렸다.
"자기 전공분야에 대해서 잠시 소견을 말한 것뿐인데 뭘 그걸 가지고……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합시다."
그러나 사태는 전연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작달막한 체구의 이문택이 불시에 몸을 솟구치더니 청년의 면상에 정통으로 박치기를 놓아버린 것이다. 문택이는 취중의 흥분으로 강 교수더러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청년의 뒷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안쪽 테이블에 앉았던 청년의 일행이 한꺼번에 우우 덮치는 걸 보는 순간 나는 강교수의 허리를 끼고 밖으로 뛰어나와 재빨리 지나가는 택시를잡았다.
이상하게도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차라리 일찌감치 집구석에 틀어박혀 발가락 사이에 한 번 더 무좀약을 바르고 앉았느니만 백번 못한 결과였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강교수는 내내 눈을 질끈 감고 앉아 있었다. 그 역시 취기가 이미 말끔히 가신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종 말이 없었다. 그는 방금 전 술자리에서 벌인 즉흥 강의에 대해서 심히 후회를 느끼는 눈치가 여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듬직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시리 제자 보는 데서 솔선해서 먼저 그렇게 벌벌 떨 수 있단 말인가.
"뒤에 남은 사람들 어떻게 될까요?"
내가 먼저 이렇게 말을 걸자 강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일 없을 거야. 최 교수가 그만한 일은 능히 처리할 위인이니까."
그러나 강 교수의 그 말투 속에는 반드시 별일 없을 것만 같지는 않은 낌새가 엿보였다. 아마 별일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었다.
한참 후에 강 교수는 또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네도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하겠지?"
"뭐 별로……"
나는 우선 이렇게 얼버무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과음 끝에 주사가 약간 지나쳤을 뿐이야. 내 말에 다른 뜻은 전연 없었어. 나 좀 내려주게. 걸으면서 머릴 좀 식히고 싶어."
더 이상 강 교수를 붙잡고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체없이 나는 차를 세우도록 했다. 강 교수가 내리자 기사 양반이 백미러 속으로 나를 유심히 쏘아보며 행선지를 댈 것을 재촉했다.
"어디루 모실까요, 손님?"
저만큼 앞으로 다가오는 네거리 하나가 얼핏 눈에 띄었다. 그 네거리에 다다르기 전에 행선지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저지르고 관여한 만큼의 몫은 내 어깨로 감당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한 끝에 기사 양반의 그 쏘아보는 눈에게 차를 뒤로 돌리도록 부탁했다.
"아까 탔던 자리로 되돌아갑시다." - 韓國文學, 19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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