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로 ‘지혜로운 자’를 의미하는 소피스테스는 영어로 소피스트라고 불리는데, 원래 탈레스를 포함한 그리스의 일곱 현인들을 가리키던 말이었고 특정 철학의 어떤 학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 그들에 대한 나쁜 평판이 만들어지면서 소피스테스에 관한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첫째, 실용적인 의미에서 탁월함(arete)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학습을 통해 탁월함을 습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절대적 지식이나 진리, 신에 대해 불신했다. 예컨대 인간은 신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다. 신을 인식하려면 일단 신이 실재해야 하고, 인간이 신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소피스테스에 의하면, 신이 실재하는지 불확실하고 설령 신이 있더라도 인간은 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소피스테스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다. 데모크리토스는 똑같은 물도 손의 상태에 따라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처럼 물질적 영역에서의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인 아르켈라오스라는 사람은, “만일 뜨거움과 차가움이 단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일 뿐이라면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도 마찬가지로 주관적이며 실재하지 않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소피스테스인 아낙사고라스와 프로타고라스도 이의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자연철학자들의 저술에 자주 붙은 “physis 또는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nature)라는 말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physis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On the non-existent)라는 책을 남겼다고 한다. 이 책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데, 플라톤의 <대화편>에 의하면 아낙사고라스는 그의 책에서 “(a)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b)설령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c)설령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웃에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즉 아낙사고라스는 (a)존재, (b)인식, (c)교육 내지 전달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예컨대 아낙사고라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상대방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도 나는 인식할 수 없다. 어제의 사랑이 오늘도 내일도 지속될 수 있음을 나 자신도 알 수 없고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느낌과 직관과 믿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을 믿는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떤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테네 식민지를 위한 법규를 만들기 위해 기원전 443년에 남이탈리아에 파견되었다. 프로타고라스 이전의 법은 신성한 계약, 또는 신탁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예컨대 스파르타의 법규는 아폴론 신에 의해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풍토에서 사는 민족들에게 강대국의 법과 규범을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테네에서 파견된 프로타고라스는 사회계약설로 알려진 법의 기원설을 최초로 공포했다. 그에 의하면 법은 스파르타나 아테네의 그것처럼 신성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공동체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인간들의 집합체다. 사회계약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 자신의 주장과 모순될 수 있다. 칼리클레스와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급진적인 소피스테스들은 사회계약설을 거부하고 강자의 자연권을 주장했다. 그들에 의하면 약자는 사회계약을 통해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만, 강자는 사회계약을 통해 얻는 게 없다. 즉 강자는 약자에게 이익을 양보할 이유가 없다. 강자가 사회계약을 통해 희생한 이익은 안정적이지 못하므로 강자의 기준과 이익에 맞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미국 등 강대국의 힘에 좌우되는 국제정치 질서, 대기업 등 강자의 이익에 맞춰 운영되는 거의 모든 국가의 내부 질서는 일부 급진적인 소피스테스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일리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간호법’을 둘러싼 의사와 간호사 간 대립도 비슷하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테스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공정한 법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본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아도 정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소크라테스를 통해 옳고 그름의 분별 기준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견해는, 소크라테스는 과연 공정했는가의 문제, 공정한 중립자가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여전히 숙제로 남기고 있다.
(추신) 철학은 답을 말하는 학문이 아니다. 질문을 발견하는 학문이다.
첫댓글 아직까지 '질문'을 발견하지 못한 저는 철학으로 가는 길이 멀기만 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