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이 아닌 인간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만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세상의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은 각 개인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오늘날은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보편적 진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진리가 똑같을 가능성은 없고,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 내 의견이 상대방 의견보다 더 옳다는 것은 일방적인 나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설령 내 의견에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 하더라도 상대방과 상대방을 지지하는 상대적 소수가 인정하지 않으면 내 의견은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객관적이고 명확히 판단해 줄 수 있는 초월적인 주체나 객관적인 판단 자격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저술한 『프로타고라스』편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는 “덕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고, 둘째로는 “여러 덕들은 사실상 하나인가“, 즉 정의(正義)와 절제와 경건 등 유사 덕목은 모두 덕과 같은 의미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것들인가에 관한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덕은 하나이나, 정의와 절제와 경건 등은 덕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라 주장한다.
프로타고라스가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아테네 민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나라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제우스―당시 사회에서 신의 게시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었다―가 모든 시민에게 시민적 덕을 골고루 분배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덕을 배울 수 있으므로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다. 둘째로 인간은, 인간이 멸종하지 않도록 걱정한 신(제우스)과 계약을 맺었으므로 신과의 계약을 반대하는 외부의 적은 물론 내부의 적을 응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뛰어난 옛날의 입법자들이 ‘발견’한 법을 지침으로 삼아 부정의한 행동을 징계해야 하는데, 인간은 교육을 통해 덕(정의와 부정의)을 습득할 수 있으므로 부정의에 대한 교정이 가능하다.
문헌비평가들의 주장대로 『프로타고라스』가 플라톤의 창작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가능하다. 첫째 플라톤은, 허경의 표현에 의하면, ‘적을 고르는 품격‘을 갖춘 철학자임은 분명하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반대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덕을 배울 수 있는 학습능력이 있으므로 모두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다”는 민주주의 근본적인 원리를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사람의 입을 통해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둘째, 플라톤을 통해 기록된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사회계약을 준수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 전체가 좋은 박자와 화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옛날의 입법자들이 올바른 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박자와 화음을 강조하는 것에는 폭력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고, 조화(harmony)가 진정으로 안정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이견이 있다. 또한, 진리가 확실히 정해져 있고 과거의 현인들이 그것을 ’발견‘했다면 (갈등과 혼돈이 일상적인) 민주주의는 필요가 없다.
(수업시간 내 토론들을 옮긴다면 재밌는 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하지 못해 유감이네요. 아무튼 덕의 단일성 등 『프로타고라스』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수업은 여기에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하나이지만 지혜, 용기, 분별, 정의, 경건 등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반대는 나쁨 하나밖에 없듯이 모든 것의 반대는 각각 하나밖에 없으며 지혜, 용기, 분별, 정의, 경건의 반대는 오직 어리석음이므로 결국 이들(지혜, 용기, 분별, 정의, 경건)은 모두 덕과 동일하다, 각각 독립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반론은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음과 나쁨의 다양성, 즉 좋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쁨을 의미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라면 소크라테스가 덕의 단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좋음과 나쁨의 절대적 대립구도는 성립하기 어렵다.
『프로타고라스』의 주인공은 프로타고라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기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무리 부분도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프로타고라스가 승복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모순을 지적한다. 앞부분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뛰어난 정치가들의 자식들이 변변치 못한 이유는, 잘 배우기 위해서는 교육 뿐 아니라 자연적 재능이 필요한데, 위대한 사람들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늘 그런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만일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어느 누구도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서 기꺼이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착시 현상,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측정기술의 부족(무지)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나쁜 행동의 원인인 ‘자제력 없음’은 불가능하며 단지 즐거움과 괴로움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탁월함을 칭찬하며 승복한다.
플라톤의 저술한 『프로타고라스』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의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서양에 영향을 미친 그리스 철학은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의해 발명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막연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프레임(frame)들을 만들어 냈다. 소크라테스의 프레임에 걸려 들면 그의 결론을 부인하기가 어려워진다.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 프로타고라스 같은 당시의 지혜로운 자들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프레임에 계속 말려들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진리를 그대로 믿거나 따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연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재정의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 즉 단순한 ‘철학’이 아닌 ‘철학함’은 오늘날의 서양철학의 핵심 덕목이 되었다.
둘째, 고대 그리스 (’철학함‘ 아닌) ’철학‘은 기억술과 윤회사상의 기반 위에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앎을 새로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몰랐던 것을 알 수 없으며, 모르는 것은 알 수도 배울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앎이란 오로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믿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은 윤회를 하며, 망각의 강(레테이아)의 강물을 마심으로써 앎을 잊어버릴 뿐이라는 피타고라스적 윤회 사상이 숨어 있다.
셋째, 앎을 중시하는 주지주의 전통은 계몽주의, 엘리트주의와 연결이 되어 있다. 서양 철학이 세계에서 가장 엘리트주의적인 이유도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주지주의적인 사고 체계, 주지주의적인 철학함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