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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공무원문예대전 당선작
[대상] 모래의 문장 / 최수안
낙타
그 순한 정강이를 세울 때부터
부신 태양 아래 발바닥은 단단해지죠
모래 바람이 만든 결 고운 문장을 따라가는 일이라
등뼈보다 큰 사구들을 마다하지 않았죠
바람이 던진 베일이 사막을 훑고
몽롱한 동공 속 푸른 호수가 깊어지면
소금빛 머금은 속눈썹이 서서히 열려요
발자국 사이 느릿한 관절을 끌고
가시가 지은 묘비를 지나
현기증 이랑을 몸속에 새겨요
터번 쓴 선인장이 생채기를 부르는 오후
갈라진 혓바닥 틈으로 이국의 문장이 버석거리고
혈맥을 타고 흐르는 글자들이
침 없는 나침반을 쥐어주면
낙타, 혹 속에 뜨거운 매듭들이
풀고 엮고 손톱 긁어 모래경을 또 만들어내요
누천년을 모래에 파묻힌 얼굴
해부되지 않는 내가 그 속에
산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꿈틀거리며 돋아나는 뒤꿈치가
걷고 걷는 일이 길의 끝이라는 듯
모래 언덕 너머 저 끝도 없는 여백을 더듬어가요
은하가 찰방이며 떨군 받침들 이마에 받으며
[은상] 출석부를 넘기며 / 최정삼
그 수많은 날들이 네모 칸으로 들어선
씨줄과 날줄의 사이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어진
작대기들을 건너뛰며
죽어있음도 때로는 아름다운 법이라고
지울 수 없는 시간들을 스스로
다독이며, 앞날을 가늠하듯
출석부를 넘긴다.
옹색한 종이의 면마다에서
해가 뜨고 날이 저물 때, 세월은
더불어 갈 동무가 없어 외로운 길을
구획하고, 우리들의 삶이 박제처럼
표정 없는 기록으로 남아서, 얼마나
아쉬웁게 살았는가고 물을 때 그러나
소리는 아무데도 없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수수우수수 해먹은 오늘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희어서
가지런한 기억의 껍질들.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그리움
들을 페이지 책장 구석구석에 깊이 묻은 채로
이제는 내 갈 길을 가야겠다고
쓸쓸히 기록의 시간들을 돌아 나올 때
신호처럼 불이 나가고, 어둠 속에서
나는 출석부를 덮으며 정말로 방을 나섰다. 그때
별들이 하늘에서 빛나고, 내가난한 삶이
그 별빛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은상] 별들의 비행 / 이초롱
술병 속에서 떠오르는 말벌집이 있다
잠들어있던 벌들이 은빛 날개를 털고 일어서면
한 잔의 맑은 물이 출렁거리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울음소리가 제 몸에 깃드는 줄도 모른 채 눈물을
눌러 담는 벌떼들이 있다 라디오 잡음처럼
방 안을 진동하는 날갯짓
오래 틀어놓은 음악과 침묵이 두 귀를 접고 웅크리고 있어
유리병 속에서 벌 몇 마리가 사력을 다해 눈 뜬다
부드러운 흙을 털고 날아오르는 빈 몸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거품을 따라
숲을 떠돌던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별들이 두 눈에 박히는 순간,
벌들이 한 바퀴를 돌면 저녁이 깊어진다
물의 지느러미가 흔들리고
빛을 움켜쥔 다리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동안,
빈 벌통에서 바닐라 냄새가 풍겨 나오고
버둥거릴수록 차오르는 어둠이 눈앞에 당도한다
궤도를 그리며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흘러넘치는 지문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이름을 버린 몇 개의 영혼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새벽,
뚜껑을 열자 벌떼가 날아오른다 온몸에 박힌 심장들이 두근거린다
[은상] 무화과에게 쓰는 편지 / 이옥래
꽃 없이 피어 익어가는 것들에게 쓴다
나는 당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
가지 끝에서부터 초록세포 몇 바람에 부풀리던
꽃도 없이 말이야, 지나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매를 달고 서있던
당신, 나는 열매를 한바구니 담아 그저
떫고도 달콤한 생을 음미할 뿐이었지
물관을 타고 흐르는 골 깊은 말들은
붉은 가르마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을까
주름 켜켜이 희고 작은 과육들이
언제부터 지고 피고 영글기 시작했는지
이 촘촘히 박힌 기억들이 입 속에서 희미해지는 동안
펴 본적 없는 꽃잎들이 이미 구름보다
높은 곳을 날고 있는 걸 상상해
그래, 바깥을 모르는 거야말로
꽃 같이 아련한 웃음을 가져다 준 걸지도,
기억장치 무너져 달콤해져가는 무화과 하나
가끔 검은 태풍 사이로 낙과되고 싶었을 테지
이제 하늘 길 몇 갈래 매듭짓는 아침이 오고
나는 무화과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하다
잊어버리다 하지, 안으로만 폈구나 꽃은
흰 과육이었구나, 되뇌며
시간을 더듬어 내 안에서 말랑해지는 당신
욕심 없이 고고히 매달린 무화과를 올려다본다
어머니, 농익어가는 어머니
[은상] 지구에 사는 화성인 / 엄정은
나는
지구에 사는
화성인.
나는
단지 몸만 불편할 뿐인데도
당신들은
나를
같은 지구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말은
장애우(障礙友)
현실은
이방인(異邦人).
나의 친구는
오로지
나의 어머니뿐.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를
탓한다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다며.
다가오라 말하면서
정작
다리(橋)는 만들지 않는
참
정 상 적 인
지구인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사는 땅을 밟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불편해서.
다리 하나를 놓으려면
나의 어머니가
무릎 정도는 꿇어줘야 하기에.
나는
지구에 살지만
아직도
지구에 사는 법이 서툰
화성인.
오늘밤
나의 고향
화성으로 가기 위해
난간에 오른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미
쉬어터진 목소리로
피맺힌 절망만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온몸으로 외쳐도
지구인들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을
소리 없는 비명.
그러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보았다.
내 다리를 붙잡고
지구인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을
피눈물을 쏟고 있는
나의 어머니를.
하지만......
죄송해요.
내가
허공에
몸을
던지자
어머니가
나를
꼬옥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아니야.
엄마가
다
미안해.
오늘밤
우리는
화성으로 갔다
아니
쫓겨났다.
[동상] 흙손 / 정수경
만져줘야 마무리되는 세계가 있었겠다
흙과 나무의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겠다
여백은 안타까움이었겠다
지친 어깨 다독여주던 손, 지금은 없고
무덤덤하게 외면되는
그런 손 말고
없거나 무딘 거기를 예리하게 세워
사과를 깎으면
껍질은 섬세한 길을 만들어낸다
후에
계단을 만들고 계단을 구겨 꽃을 피우고
지칠 때 손은 층층이꽃처럼 생겨난다
입술 너머
손끝이 거기에 닿을 때
발견된 적 없는 꽃으로 예리한 국경을 만들었겠다
구석에 걸린 그림처럼 만져줘야 살아나겠다
다소 뜨거워 넘어갈 수 없었겠다
결국 그런 추측의 세계가 있었겠다
껍질을 깎던 손이 마무리되는 세계가 있었겠다
[동상] 장마전보 / 김유리
그리고
투명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방울방울 맺혀
후득후득 떨어지는
비의 부호에는 쉼표가 가득하다
어느 어린 여름날
축축히 잠든 이마와
곰팡이 핀 벽지 너머로 들었던
쉼표, 쉼표들
그 때 너와 내가 썼던 시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나의 우편함에는
숫자들만 꽂힐 뿐
그 어떤 말들도 찾아오지 않는데
해독할 수 없는 장마의 편지들만이
빈 지붕을 두드린다
-여보세요, 내 슬픔이 아직 거기에 사나요
나는 아직 여기에
우산 없이 서 있다
여름이 보낸 수취인불명의 편지들을 흠뻑 안고
꼬리 잃은 나의 쉼표들과
헤엄치고 있다
[동상] 과매기 / 이영원
총망중,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방으로 튄 혈흔을 주워 밖으로 나선다
담벼락 아래 얼굴을 숨긴 사람들, 자욱한 연기
그보다 스무 발자국 쯤 양지바른 곳에 서서
보이지 않던 총구의 방향을 가늠해본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숙고하는 법의관처럼
선의인지 악의인지 아니면 무지인지
선혈이 튄 방향으로 방아쇠의 의지를 따져 묻는다
만일 사출구가 나침반처럼 떨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그의 혐의를 입증할 텐데
일소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경지일까
악력(惡力)기라고 부르며 쥐어짜던
악력(握力)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겨울 공기가 스며들 때
언젠가 다큐에서 보았던 컴컴한 우주가 온다
‘차가움이란 열의 부재일 따름이라
-273도인 절대온도 아래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친절한 해설을 분수처럼 뒤집어볼 때
이 生의 다정은 얼마나 거대할 수 있을까
젖어드는 미열에 눈을 감으면
가본 적 없는 구룡포 앞 바다
나를 민물로 끊임없이 헹궈주는 풍경
내일의 비린내를 없애려면
오늘의 핏물을 잘 씻어야한다는 속삭임
발을 동동 구르며
어제와 같은 평행봉 위에 오르면
저 먼 수평선
유구한 해풍을 온몸으로 맞는다
날이 차가우면 단단하게 얼어붙고
날이 풀리면 기름기를 뚝뚝 흘리기를
다시 날이 차가우면 더 단단하게 얼고
다시 날이 잦아들면 더 많이 흘리기를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다가
어느새 담백해질 체질
아마도 그러할 미래
감히 서둘지도 분주하지도 않기로 한다
폭력, 권력, 알력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중력은 조용히 속삭이기에
온 겨울 내 평행봉 위에 걸려있었다
길쭉한 봄의 그림자를 그리며
[동상] 보수동 헌책방 / 박지영
추억을 사러가고 싶어졌다.
책곰팡이 냄새
쾌쾌한 나무 냄새
물떡
찹쌀도너츠...
난해하기만한
고향 부산의 도로 가운데
어느새
짜증 가득한 표정의 여행객이 되어 앉아있다.
덥고 차는 막힌다.
다닐뻔한 직장도
버스창 너머로 보이고..
내가 탄 81번 버스는 정거장마다 추억을 지나간다
부산역.
중앙동.
국제시장.
버스 방송이 알린다.
다음 정류장은
보수동 헌책방골목
설레는 마음에
피식 웃으며
부저를 누른다.
[동상] 먹똥 향기 / 김영희
거실창문 열면 노란수선화 향기 날아오고
어머님이 차신 기저귀 열면
먹똥향기 코끝에 스며든다
엄니, 쌌어요?
아니! 안 쌌어
냄새가 난디?
당신이 주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향기!
내 가슴 깊숙이 애잔하게 퍼진다
어느 자식에게도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혼자 살겠다고 고집하시더니
떠나시기 전 꼭! 셋째며느리에게만 주고 싶었을까?
먼 여행길 보내드리기 전 꼭! 받고 싶었을까...
하루해가 까매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향기에 중독 될 때
미안해하는 눈빛으로 이 뿌리 보이며
초승달의 미소를 띤다
엄니, 웃는 모습이 예뻐서 수선화도 시샘을 한다
그리운 나의어머님!!!
당신이 주신 먹똥향기는
당신이 떠나신 후에도
커피 잔에 눈물방울 뚝뚝뚝......
[동상] 채식주의자 / 엄영희
붉은 것을 좋아할수록 송곳니가 자라는 꿈을 꾸었다
피가 도는 봄날
할머니는 흐르는 물에 나물을 씻으며
애야 푸성귀는 눈이 없어 좋구나
나는 눈이 없어 조금은 덜 아프다는 말처럼 들렸다
폭풍우를 이겨내고 자란 몸의 푸른 멍
산나물은 묶은 머리를 풀고 물의 방향으로 맑아졌다
나는 무방비로 탈진했다
할머니는 풀물 든 뭉툭한 손으로 내 눈꺼풀을 열어 보셨다
명이 나물을 먹고 귀가 밝아지거나
방풍 나물을 먹고 바람을 이기는 꿈은 전설에서나 가능해요 할머니
모르겠어요 이제 와 봄까치풀처럼 개명을 꿈꾸어도 좋을지
애야 다 지나간다 엎드리면 등을 타고 다 지나간다
봄이 오면 할머니는 늘 푸른 밥상을 차리셨다
몸 푸른 것들을 더 푸르게 뿌리째 비비고 버무리는 동안 나도 물이 들었다
나는 내가 먹은 이름의 전부이니
나는 내가 아는 눈빛의 전부이니
나물죽 한 그릇이 등을 타고 통과한다
충혈된 것들을 흔들어 흘려보낸다
[동상] 늦여름의 레시피 / 박형식
양파껍질 같은 얇은 하늘을 창가에 가지런하게 걸어놓으면 한 동안 마른 햇빛 냄새를 맡을 수 있겠지 투명한 하늘은 건더기 없이 국물을 낼 수 있어 좋아 먹기 좋게 발려놓고 썰어놓으면 기름 범벅 밀가루 범벅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네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까르르
금방 만져 놓은 구름 반죽이 완성이 되면 프라이팬이 달궈지기 전 이상하게도 그늘 한 장 없는 대낮의 운동장을 냅다 달리고 싶어져 괜히 허벅지에 힘이 고이고 아이라인 같은 레일이 운동장에 능숙하게 그려지지 애초부터 심판은 필요 없어 무작정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큰 나무가 그려져 있어 그곳으로 그냥 달리면 돼 어느 새 기름을 잘 두른 프라이팬이 달궈지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운동장 한 곁에 틀어놓은 수도 속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내밀지 가물어 눌러 붙은 쌍가마 국수 면발처럼 풀리며 다시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다음부터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기름진 육즙이 씻겨 내려가면 야채는 겹겹이 밀가루 옷을 입고 쉽게 몸집을 부풀릴 수 있지 다시 양념을 뒤집어쓰고는 균형을 못 잡고 데구루루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 한 바퀴 어느새 담벼락이 노릇노릇 하게 익어갈 때면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던 뜀박질도 이내 시들해지지 시 부문 57 시 때마침 운동장 구석에서 귀에 익은 사이렌 소리 길게 두 번 짧게 한 번 다시 이유 없이 바빠지는 손놀림 주방 천정에 매달린 백열등이 밀가루처럼 환하게 켜지면 타닥타닥 조명 빛에 잘 익어 숨넘어가는 소리 아직 식지 않은 늦여름 햇살이 철봉을 녹아내릴 듯 두드리는 소리 소사 아저씨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가 지들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 모래를 등에 진 바람에 눈물이 먼저 반응하는 소리 문풍지 끝에 옮겨 붙은 곤로의 심지가 석유 냄새에 물소리처럼 번지는 소리 아이들이 엄마손에 이끌려 하나둘씩 멀어지는 소리
오래된 굴뚝은 검은 가루가 섞인 쉰 소리를 뿜어내고 불 조절에 실패한 약간의 방심은 모서리가 심하게 그을린 햇살을 한 접시 구워낸다 뒤늦게 게양대에서 내려지는 헝겊처럼 후줄근해진 어느 여름 오후 자 이제 수척해진 멸치는 뭍으로 나와야지 육수처럼 번지는 웃음소리
[동상] 푸른 봄들에게 보내는 편지 / 우상범
뽀오얀 배 쓸어주던 엄마의 손길 같은 봄볕
따사로운 손길에 이끌려 꼼지락거리는 아기 싹들
연둣빛 사이사이 소녀들의 웃음처럼 피어나는 꽃들
환한 웃음꽃 위로 춤추듯 팔랑거리는 나비들
그 풍경 속으로 소풍 도시락 매고 가는 사람들
그렇게 봄은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봄 봄 봄, 이름만 불러도
통 통 통, 튀어 오를 것만 같은데
늘 봄날로만 여겨지는 너희들의 봄은
사실 불안하리만큼 변덕스럽지 않았던가
꽃 피지도 못한 채 후두두 작달비에 떨어지는 겨우내 기다림
피자마자 몰아치는 돌풍에 꽃비 되어 흩날리는 비늘 같은 연약함
다 피어난 꽃 위로 때아닌 봄눈 내려 묻혀버린 서러운 아리따움
온 세상 덮어버리는 느닷없는 미세먼지에 숨 막히는 봄의 정령들
돌이켜보라
너희들의 봄이 봄날이었던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이 짧은 봄날로 너희들의 봄을 기억하는 것은
한순간을 영원으로 피었기 때문이니
봄날 같은 봄이 사라져간다 해도
기억하라
숱한 나날의 변덕스러운 불안이 아니라
단 하루의 피어난 봄날로 봄이 기억된다는 사실을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너희들의 봄을 힘껏 피어 올려야 하는 이유를
[동상] 곱슬머리 / 이순남
엄마의 엄지를 꼭 잡은 작은 손
손금으로 실개천이 흘렀습니다
그 아이의 이마에는
해당화 붉은 꽃잎 피어 있습니다
숨결 따라 흔들리는
노란 배냇머리털이
바닷가 갯풀같이 흔들렸습니다
옹아리속에서 들려오는 해조음
짭조름한 갯내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아버지의 고향이
실핏줄을 따라 왔습니다
해당화가 지천인
원산 명사십리
대대로 내려온 유전의 내력이
시간의 사행천을 따라 흘러 흘러
우리 아기에게도 왔습니다
[동상] 박사장의 몽블랑 만년필 / 조성대
만년필은 자신의 내부에서
묽게 응고된 잉크를,
되살리고 싶어 몹시 울먹인다
신천 하류를 이리저리 떠돌다
부패되어 가는 들고양이의
내장에 걸려 있다 곧
모두 부패되어 함께
어디론가 떠내려갈 것이다
대구 대원섬유 박사장은 지난주 화요일,
愛馬 뉴그랜저 V6 3000과 신천으로 뛰어들었다
전날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한 자괴감을
만년필은 그의 포켓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막진 못했다
외국바이어의 황금빛 계약서에
자랑스럽게 서명되던
자신의 옛모습을 추억할 뿐이다
박사장의 유품이 되지 못함이
無明이 되어 버림이
못내 서럽다
새벽, 박사장의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핀 나팔꽃 하나
때늦은 弔花로 바쳐지고
만년필은 부활을 꿈꾸며 묵묵히
신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동상] 개망초 / 전혜진
돌틈 사이에 봄이 온다
나라 망한 게 내 탓도 아닌데
나는 개망초
하나님이 나를 지으실 적에는 깜빡 졸으셨나
망초 망초 개망초
골목 골목
미소를 나르는 벚꽃
눈꽃 휘날리는 목련꽃
달큰한 내 퍼지는 라일락
오색영롱 형형색색 꽃 중에
나는
왜 나는
스팸조차 못 된 계란후라이 계란꽃
이럴거면 정말 풀때기로 태어나지
꽃도 아닌 풀도 아닌
망할 놈의 개망초
두둥실 날아오르는 민들레홀씨마저
어여쁜데
하늘보며 땅보며
에휴
나를 향한 계획이 있긴 할까
전지전능한 주께서는 왜
손틈 사이로 봄이 내린다
눈이 시리다
서러운 햇살이 온다
[동상] 이천일십칠년 군중 / 김향숙
살찐 달덩어리 움푹움푹 갉아먹은 아침이 낮을 데리고 왔어
몰래 떼어놓은 어둠 한 움큼 책상 위에 앉히고 정오의 태양을 구겨 넣어버렸지
책갈피 속에서 태양은 말라가고 그렇게 낮을 가두어 외면해버리기로 했어
주인 잃은 정오와 검은 바다를 유영했지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끝없는 좋아요의 향연에 나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어
망망대해 그물 속 좋아요가 너무 많아 나는 나의 좋아요를 찾을 수가 없더라
수십 번 던진 그물에 나를 소비한 나는 빈 그물 깊은 바다를 조심해야 했어
설익은 형용사를 삼키며 문장이 번식하는 바다가 퍽이나 낯설더군
나도 내 껍데기를 사랑스럽게 벗기기로 했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때로는 네가 나인 것처럼 벗기고 또 벗겼지
한 번씩 출처예의 없이 다른 사람의 껍데기로 나를 감싸기도 했어
비밀도 아닌 것을 비밀스럽게 말이야
내 껍데기를 계속 내 놓아야 하기에 좋아요는 필수조건으로 만들었지
심연의 깊이까지 알 필요도 없었어
가끔씩 찾아오는 솔직한 직선은 감내해야 할 부끄러운 신경증이었지
백만 개의 너울 위로 자발적인 좋아요와 강요받은 좋아요가 하나인 듯 흘러
다녔어
희극적이었어 말하자면 미세한 행간은 비극적이었던 게지
그마저 지독한 의무였기에 하루 수십 번의 형식적인 사랑이 필요했어
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러니까 시간이 준 덤의 외로운 발자국이었던 거야
바다가 쓸쓸해진 좋아요는 다른 영혼에 섬을 만들더라
나의 섬도 외로워지기 시작했지
나 또한 다른 섬을 기웃거려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돼버렸어
일천구백오십년 리스만이 이천일십칠년 군중을 명명했데
고독한군중1)이라고 했다던가?
난, 돌아가야겠어 시퍼런 잎사귀 너울거리는 숲으로 말이야
정오의 태양이 친절한 동굴에서 잃어버린 나를 헤엄쳐야겠어
*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이 1950년에 출간한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에 등장하는 용어
[특선] 각설이 / 고승영
[특선] 창문 밖 풀꽃 / 김금숙
[특선] 미완성 유년 / 오재희
[특선] 이름들 / 류상헌
어떤 단어를 보면 어떤 이름이 생각난다
어떤 이름을 되뇌어 보다가 나지막이 한 번씩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다
불러도 대답 없을 이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이름이 다시 사물이 되고 만다
마음속 다락방을 들여다보면 풍경처럼
다리가 짧은 책상 위에 잡동사니들이 놓여있다
견출지에 써 붙여도 잘 떨어지는 이름도 있고
대충 손가락으로 써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도 있다
새벽 세시에 이름들이 내게 주는 무게를 생각하면
책상 다리가 툭하고 부러질 것 같고
눈을 뜨면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어나자마자 나지막이 불러보았던 몇 개의 이름들
[특선] 어머니의 다듬이질 / 김광용
[특선] 자동기술법 / 최지용
소설은 정말 어렵다
문예대전 마감이 코앞이다
아직도 쓰고 있다
수십 페이지를 다시 썼다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저장을 깜빡했다
몇 페이지가 날아갔다
클라이막스였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써
이때다 싶어 시 부문으로 갈아탄다
근데 시는 처음 써본다
그런데 자동기술법이란 게 있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적는 작법이라고 한다
그냥 막 써본다
이게 정말 시란 말인가
아무래도 크게 혼날 것 같다
시는 진정 어렵구나
건방진 녀석!
다시 소설로 갈아타야겠다
이런, 곧 마감이다
마누라! 미안해!
[특선] 개수대 / 노순미
[특선] 나에게 이름이 없을 때 / 조희애
[특선] 십 삼월의 바다 / 윤빛나
십 삼월, 달력 하나를 더 그려놓는다.
의사는 십 삼월의 바다를 처방했다.
노동의 붉은 철책 넘어, 십 삼월의 갯바위에 걸터앉은
당신은 십 삼월의 주주(株主).
한 마리 행복동 고등어를 건져
잠시 멈추어 서야할 십 삼월.
십 삼월의 부두 냄새
십 삼월의 아이들을 위해 빵을 굽는 빵집들.
안개의 풍경 안에
십 삼월에 실려 온 약속이 접안한다.
십 삼월의 오선지 위로 그려진 너의 방법이 있었음을.
십 삼월의 사람을 인정하는
어느 자유의 바다가 안경을 내리면
금방 들키고 말 아름다운 위선(僞善).
십 삼월의 뭉게구름 언덕
친절한 세상, 공짜 커피 한 잔에 취하여
빨간 십 삼월의 주소를 적어 보낸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은 십이월 전장(戰場)의 모퉁이
핑계가 보이는 거울 속에 큰 입을 벌리고
씹어 삼키던 안개의 성역에서
젖은 지느러미를 털어 말리는 십 삼월의 바다
십 삼월의 어미 소 한 마리 종나무 쟁기를 끌어
워낭소리 피워대던 채마 밭 이랑
할머니 늙은 빨래 소리 흘러가는 하늘.
갓 건져 올린 시름 한 솔박.
먼지 나는 이승, 계동(季冬)과 맹춘(孟春) 사잇길에
출렁이는 십 삼월, 훌쩍 도망쳐버린 가슴으로
옛 일들을 비겁하게 용서하던 날
저 창호지 문을 열고 뛰쳐나오면
십 삼월의 주인(主人).
파도는 여전히 상냥하고
위대한 기적의 좌표 위에 십 삼월의 바다.
기계 소리 들리지 않는 사람의 시간.
낡은 미닫이를 삐걱거리며십
삼월의 평화가 흘러가는 길.
노동의 총소리 들리지 않는 하늘과 땅에
의사는 십 삼월의 바다를 처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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