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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그를 보며
강병철(소설가)
그는 천부적 평교사 체질이다. 담임을 맡은 기간만 18년 7월이니 그가 교단에 있던 모든 세월이다. 만약 그가 젊은 날의 각오대로 평교사의 길을 걸었더라면 40년 넘도록 담임교사를 맡다가 깔깍발이 훈장으로 퇴임을 했을 것이다. 그가 달마다 학급신문을 발간했고 주마다 가정방문을 했고 날마다 상담에 임하더라고, 천안북중 옆자리에서 근무했던 시인 최은숙 선생님이 회고했다. 89년 전교조 구속교사 1호인 동시에 충남지부장의 모태였던 그가 학교 현장에서는 착하고 섬세한 담임님의 모습으로 변신하더란다. 촌지는 무조건 반송시켰고 아이들에게 쌀과 등록금과 책가방을 사주던 초임 시절의 연장이다.
덕분에 그는 환갑·진갑 잔치만 20여 차례 치렀다. 가족끼리의 소찬은 차치하고라도 태안에서 천안까지 찾아온 옛 제자들이 기수별로 소주잔을 내밀며 초로의 안부를 보여주는 것이다. 중장비 모는 제자는 근육질 안부를 건넸고 분식집 도마질하는 제자는 반죽 같은 인사를 건넸다. 마찬가지다. 기십 년 세월 후에도 웃는 제자 헹가래 쳐주고 우는 제자 껴안아주는 불콰한 잔치였다.
그와 나는 수십 년 이상 참교육 마크를 달고 살았지만.
단 둘이 허리띠 풀러놓고 탁배기 잔 걸친 기억이 없다. 그는 맏형 자리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고 나는 초로의 객석에서 박수를 치거나 몽기작몽기작 술잔을 채워주었을 뿐이다. 언제부터였나, 나는 객석의 장삼이사에 묻혀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사람 앞에 서기를 꺼렸고 특히 품격 있는 가슴들을 만나면 더 쭈삣거린다. 그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대의 중심에 서면 나는 객석에서 경청하다가 졸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기십 명가량의 회식 자리에서 정중하게 술잔을 채워주다가 그의 몸에서 쏟아지는 식물성 향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쓰뭉한 안부를 묻는 대신 체취 하나까지 오래도록 기억하는 체질이다. 나의 교단도 첫 체취부터 그렇게 감동이었으니.
우선 첫 부임지가 아름다웠다.
발령장 들고 교문에 들어서자 앞치마 두른 여고생들이 청소를 하다가 차임벨 소리 따라 계단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쨍그랑쨍그랑’ 웃음소리가 잦아진 자리로 2월의 햇살이 고즈넉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머리카락으로 신발도 삼으리라’ 각오를 다졌다.
85년 5공화국의 절정 즈음까지 멋모르고 행복하려 했다. 나는 여고의 총각선생이었고 문학청년인 동시에 언젠가 학교를 세우겠다는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다. 발자크와 루카치를 읽고 안데르센과 고리끼를 꿈꾸고 흥부네 가족이나 권정생처럼 살아가리라, 더러는 톨스토이나 바스콘셀로스 같은 글을 쓰리라, 어금니 갈기도 했다.
5공화국 신군부 정권 어둠의 시대.
착한 훈장을 꿈꾸던 우리들은 무크지 ‘민중교육 필화사건’으로 철퇴를 맞았고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요주 인물이 되었다. 서울의 김진경, 윤재철, 유상덕 선생님이 투옥되었고 고광헌, 심성보, 홍선웅, 이철국, 심임섭 등이 해직되었고 충청도에서는 송대헌, 조재도, 전인순, 황재학, 전무용, 류도혁 같은 학구파 젊은 스승들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제도 언론은 쫓겨나거나 철창에 갇힌 스승을 ‘뿔 달린 괴물’로 둔갑시켰지만 우리들 모두 아이들을 스승처럼 받드는 맑은 영혼이었을 뿐이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쓴 글은 80매짜리 단편소설 한 편이다 85년 8월 12일 ‘ㅈ’신문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면 ‘지방대 출신의 청년이 사립학교에 임용하려다가 금품을 요구하는데 회의를 품고 집에 돌아옴’이 해직사유의 전부다. 이게 허위사실 유포고 사회혼란을 야기시켰다며 담벼락 바깥으로 쫓아낸 사유다. 쫓겨났으니까 ‘나쁜 피’가 되었고 그러니까 근방에 나타나지 말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 필화 사건 이후 내 품성도 바뀌면서, 역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연하게 구분되던 시점이다.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이순덕 선생님이다.
85년 그해 늦가을 대전체육고 교사 신분으로 제 발로 찾아온 그미는 첫눈에도 씩씩한 여전사 스타일이었다. 5공화국 폭정에 주눅든 사람들 모두 오금을 서릴 때 그미가 앞장서서 복직 서명 작업을 추진했고 저물녘엔 소주잔도 나누었다. 헤어지기 직전에 주먹을 불끈 쥐며.
“선생님, 힘내세요.”
하기에,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하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1년 후 그미가 학교를 쫓겨났고, 다시 6개월 뒤에 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세상을 뜨기 직전 나는 최교진 선배 등과 함께 그미의 집을 방문했다. 아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방 안에 들어갔는데 이순덕 선생님은 보이지 않고 어떤 할머니 한 분만이 이부자리에 앉아 기침을 하고 계셨다. 그래서 장판만 만지며 우물쭈물하는데 ……바로 그 할머니가 아-, 이순덕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미가 던져준 ‘선생님 힘내세요’도 되돌려줄 수 없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견딜 만한 시련만 주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고 착한 사내 김지철.
그를 만난 건 86년 이후 대전시 은행동 풍년갈비 맞은편 빈들교회 지하에 차린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실일 것이다. 최교진, 송대헌이 주축이 된 그 사무실에 그 당시 현직교사이던 이우경, 임병조, 정양희, 배현준, 서미원 등이 방문하곤 했는데 간혹 그의 모습도 보였던 것 같다. 가장 연장자였던 그가 30대 후반쯤 되었으니 인생의 시계추로 정오쯤 되는 시점이다. 그들은 우리 해직교사에게 국밥과 치킨 봉투를 시켜주기도 했는데, 그는 밤 마실 가듯 슬며시 오가며, 달콤하진 않지만 편안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당시 민교협 간사이던 미발령교사 박명순은(나중에 내 아내가 됨) 그의 수줍은 표정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책을 들면 학자요, 지게를 지면 농부요, 칠판 앞에 서면 범생이 스승이란다. 언제부터였나, 그의 반경이 커지고, 그가 자리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건.
5공화국 해직교사였던 우리들의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집회장의 충만된 열기가 귀갓길 문고리 앞에 서면 찬바람이 쉥 몰아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해직교사가 아닌 현장의 누군가 한 명 정도가 나타나 조직을 여유롭게 이끌어주길 바랐다. 넉넉한 품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30대 중반 이후의 연배로 묵묵히 조직을 점검해주는 품격 있는 스승을 찾던 중, 나타난 사내가 바로 김지철이다.
그는 책과 그림과 아이들에 몰입된 스승이면서도 아직 시국과 정면대결의 캐리어가 없는 후덕하고 의식 있는 중견교사였단다. 동시에 철학과 문학, 음악까지 두루 드나드는 낭만파이기도 했다. 두 달치 월급을 털어 ‘별표 전축’을 구입해 브로딘, 글린카, 시벨리우스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순정파 사내였는데.
특히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그의 부친과 딸까지 화폭 채우기를 행복으로 삼았으니 그게 집안 내력이리라. 격렬비열도 근방의 젊은 교사 시절인 70년대 후반 그는 틈만 나면 스케치북과 이젤을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백사장과 해당화 언덕길, 수평선과 낙조를 옮기면 소녀들이 촐랑촐랑 따라다니며 손가락을 빨아대곤 했으니, 그때가 그의 인생 중 가장 여유로웠던 황금기였던 것 같다. 가끔은 파도와 낮달, 방파제와 모래알들을 식빵처럼 그려서 아이들의 공복을 채워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그물망을 건지는 할머니들의 손등에서 흐르는 핏방울을 보면서 ‘울컥’ 그림 작업을 끊는다. 불현듯 전태일이 떠오르면서 더 이상 한갓진 예술성에 취할 수가 없었던 것.
그는 아이들을 주(主)로 섬기는 편집증 훈장이다.
부인 양연옥 선생님이 근무하는 경북 안동과 충청도 태안반도까지는 버스를 다섯 번 갈아타는 13시간의 장정이었다. 동행 내내 그가 아내에게 해준 사연은 온통 일기장 속의 교실 이야기다. 좌우지간 밥 먹는 시간만 빼놓고 온종일 꾸러기들 이야기만 풀어놓아서 여자를 질리게 만들기도 했다. 웃음과 근심의 혼재인 교무수첩 같은 일기장에는.
초겨울 서릿발을 눈썹에 붙인 채 등교하는 갯마을 아이들의 풍경이다. 오토바이를 훔친 아이, 치마를 내리며 쪼그려뛰기 하는 소녀, 정다산과 강증산의 혼재인 총기 서린 소년, 유리창 깨뜨리고 교실을 뛰쳐나간 악동 ……교실은 그렇게 에디슨과 몽실언니와 ‘성냥팔이 소녀’와 ‘무장한 흥부’가 뒤섞여있었다.
결손 장애가정에서 자란 우등생 콩쥐의 이야기도 아리고 쓰리다. 악동 남학생들이 엿장수라고 놀려도 묵묵히 책만 보던 사춘기 콩쥐는 방학 때마다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났었다. 아무리 땀 흘려도 부자가 될 수 없음은 진작부터 알았단다. 마침내 지방 사립대를 합격하고 진학을 포기하는 자리에서.
“합격증을 받고 남들처럼 한 번쯤 웃어보고 싶었어요. 선생님들은 걱정 마세요. 세상이 모두 학교잖아요.”
졸업 15년 뒤에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대 앞에서 만났을 때 그미는 중년의 아낙이 되어 눈물을 글썽였다. 아프게 놓았던 손목을 떠올리며 그는 또 울컥한다. 이 세상을 위해서 뭔가 움직여야 한다는 결의가 서는 것이다.
문제는 그 깨꽃 같은 일기장을 광주항쟁 직후 소각시켜버린 것이다. 평소 경제학이나 사회학 강사로 활동하던 그를 누군가가 계엄당국에 밀고한 것이다. 하필 부친의 회갑날 새벽 조사받는데.
“김선생, 아내가 임신한 걸로 아는데 오늘 한 번 매달아 족쳐볼까.”
실제로 지하실에 끌고 가 매달고 때리고 처박던 시절이니, 하늘이 무너지는 공포였다. 집 앞에서 서성이는 기관원들을 보며 아내 양연옥 선생은 집에 있던 금서 100여 권을 몰래 친척 집에 옮기고 일기장을 불태운다. 그때 소각된 풀꽃 사연들을 재생할 길이 없으니 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강산이 반 바퀴쯤 흐른 세월.
천안의 사회과학서점 ‘지평서원’ 맞은편 고바우 삼겹살집이다. 대학 후배 민경두와 김창태는 한번 잡은 소매를 끈덕지게 놓치지 않는다.
“딱 3개월만 맡아주세요.”
맑은 눈의 후배들이 충남교사협의회 회장 옹립을 권유하는 것이다. 후배들은 질기게 종용하고 착한 선배는 난감해하며 벌개진 술자리, 그렇게 삼겹살을 채우던 닷새째 되는 날 마침내 수락한다. 87년 9월 천안 시온소 교회에서 창립 예정된 충남교사협의회의 초대회장에 위촉될 참이다. 그는.
‘그동안 나는 실천 없이 머리만 채웠다. 이제 민주교육을 실천하는 후배들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결심을 굳힌 다음 아버지를 찾아간다.
어머니가 서울 백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으므로 평교사인 아버지 혼자 거주하셨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설거지까지 감당해서 더 바쁘기도 했다. 천안 사내인 그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서울 병원까지 가서 어머니를 수발하며 휠췌어에서 눈을 붙인 다음 새벽 여섯 시 차를 잡아 천안 그 학교에 출근해 7시50분 보충수업을 맞췄으니, 설거지 정도는 새새틈틈 작업의 연장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아들의 얼굴이 심각해 보인다. 겸상으로 마주앉은 부친이 갸우뚱하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나.”
먼저 조심스럽게 빗장을 연다.
“충남교사협의회 회장을 맡겠습니다. 대부분이 젊은 교사들이라 중견 교사가 필요한데 일단 선배인 제가 총대를 메기로 했습니다. 딱 3개월만 맡고 교단에 돌아와 다시 아이들만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아들 스승의 굳은 표정에 부친 스승의 얼굴은 만감이 교차하며 무거운 침묵만 지킨다.
‘내 아들이 따뜻한 구들장을 버리고 난세의 벼랑에 서는구나.’
지난 식민지 세월과 해방공간 6.25와 4.19 유신시대와 광주항쟁……난세가 아닌 적이 없었고 그때마다 모난 돌들이 정을 맞았다. 하필 4.19 교원노조였던 옛 벗들이 떠올랐을까. 딱 한 차례의 외침 이후 학교를 쫓겨난 그들은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막노동이나 책 외판원을 하다가 외롭게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아들의 결의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한 마디만 남긴다.
“네 뜻대로 해라. 그러나 너는 3개월 뒤에 돌아오지 못한다.”
부친의 예측대로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이순덕 선생님을 묻고 돌아오다가.
대전시 대흥동 성당 먹자골목 조방낙지에서 회합할 때 그가 옆에 앉았다. 동지를 보내고 오는 저물녘은 참담함의 극치였다. 식탁 위로 소주병이 점차 늘어나면서 ‘미운 사람은 계속 미워할 거야’ 꺼이꺼이 우는 벗을 달랜답시고, 나는 촛불을 보며.
“이 촛불이 우리들의 가슴처럼 타오르네요.”
썰렁 문장을 던졌는데, 옆자리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끄떡거려서 민망했던 것 같다. 그는 가끔 그렇게 착한 4H 회원의 이미지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병은 자꾸만 쌓여갔고 급기야 우는 벗, 책상을 두들기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벗으로 얼쿠러지기 시작했다. 드잡이판이 되었고 여기저기 뜯어 말리고 달래고 우는 엉망진창 판을, 그가 가운데로 등장하여 이차구차 판세를 정리한 다음.
“이 자리에서 강병철 선생님과 전인순 선생님께 가장 미안하다.”
하는 것이다. 전인순 선생과 나는 그쪽 교사들과 출신대학이 달랐기 때문인데 던져준 말인데 그 한 마디가 괜시리 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오래도록 고마웠다. 가로등 너머 담벼락에 비춰진 그의 그림자가 가장 커다랗게 보였던 날이다. 그리고 불과 1년 반 뒤에 그가 전교조 1호로 구속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아프고 드라마틱하다.
‘파면 철회 김지철 선생님 이우경 선생님’
나의 복직 직후 그는 투옥되었고, 현장의 우리들은 그렇게 책꽂이에 붙이고 단식 수업을 했다. 나도 김홍정 선생 박종건 선생과 함께 단식을 하며 서명을 받고 가두 작업을 나갔다. 열아홉 명의 교직원은 파면 철회 서명지를 내밀면 한결같이.
“파면은 함부로 시키는 게 아니지.”
어금니 깨물며 이름자를 동참시켜서, 하마 우리들이 열심히 정성만 모으면 누군든지 가슴을 열어줄 줄 알았다. 노태우 정부가 전교조 교사를 모두 자르겠다고 했을 때 ‘헛헛헛, 으름장두’ 하며 웃었던 건 본성의 성선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회를 막기 위해 교장님들이 새벽부터 길목을 지키는 슬픈 코미디 직후, 뭔가 목을 조이는 느낌이 수상하긴 했다.
전국적으로 1500여명이 해직되는 믿을 수 없는 사태가 터진 것이다.
충남에서도 김지철, 최교진, 이우경, 고재순 등이 철창에 끌려갔고 벗 전인순, 이인호, 현종갑, 황금성, 황선선, 양석진, 이영래, 정양희, 김성수, 김인규 등 50여 명이 단두대에 목을 넣었다. 3년 8개월 만에 복직한 나는 울멍울멍 가슴을 쓰다듬으며 술을 마시고 글을 썼지만.
출옥 후 그는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을 했고, 나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해직교사 시절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던 그들과 처지가 바뀐 것이다. 공주 백락다실 3층에서 만난 그의 표정은 훨씬 밝아졌고 확신에 차 있었다. 시대의 아픔을 교사의 기쁨으로 재해석하는 그는 그렇게 거듭난 몸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쫓겨나서 어떻게 살지요.”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먼발치에서 손바닥만 비비다가 문득 아픔을 먹고 불쑥 성장한 느티나무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커다랗게 팔을 내려 그늘을 만드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벗들은 다리를 뻗고 고구마를 깎거나 부은 발등 식히는 중이다. 그릇된 가르침은 인간을 부려먹는데 쓰이고 올바른 가르침은 사람을 섬기는데 쓰인다며 침 발라 책장 넘기고.
그렇게 시국을 논하며 가슴을 싸매는데 그가 바짓가랭이를 잡아당겼다. 술잔을 권하며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공동체刊>)에 실린 내 글에서 ‘아이들의 쨍그랑쨍그랑 거리는 웃음소리’란 문장을 재생시켜서 나를 뭉클하게 했다. 그랬다. 교정에서 울리는 질풍노도들의 웃음소리는 ‘쨍그랑 쨍그랑’이란 의성어였고 나는 한 동안 그 환청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가 눈발을 헤치고 다가오는 산타의 모습으로 등장하거나 그냥 골목길 좌판에서 옛날 애기 잘하는 할아버지로 나타나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객석에만 앉아있었다. 새롭게 만날 때마다 그의 달라진 몸피를 가늠하며 볼펜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따금 소주 한 잔씩 따라주기도 했다. 그의 건배사 ‘남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라는 문장을 되새기기도 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세월이 흘렀고 아이들은 포플러처럼 불쑥불쑥 커갔고 자본주의는 불안을 먹으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우리들은 등이 굽고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몸이 쇠해졌다. 모두가 급해졌다. 스마트폰이 물에 빠지면 영혼이 빠진 듯 절망하고 빨간 신호등 앞에서도 클락숀 빵빵 누르는 시국이 쏜살 같이 흐르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대천 임해수련원에서 가졌던 처갓집 가족 모임날의 삽화 한 장.
아침 구내식당에서 아내와 딸을 동행한 그를 우연히 조우했다. 나는 잔반을 쏟는 중이었고 그는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는 중이었으니 짧은 스냅도 못되는 찰나다. 그의 아내 양연옥 선생님은 해바라기처럼 화사하게 웃었고 음악교사가 된 딸 김수정 선생은 수수꽃다리처럼 휘청 허리를 숙였다. 그의 2세 피붙이가 스승의 길을 걷는다는 소식에 가슴이 짠했지만 더 이상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귀갓길 내내 그의 그림자를 떠올리며 가슴 싸맸다.
이제 우리도 인생의 나이로 오후 네 시쯤의 시점이다.
응달진 자리 찾아 씨앗 뿌리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여전히 글쟁이 교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달콤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우리끼리’ 운동화끈 풀러놓고 목로집 막걸리 기울이는 풍경도 아주 가끔 곁눈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