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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아가씨 손을 잡고 - 안유환
“올여름에는 아무데도 안갈 겁니다.” 흑산도 여행계획이 한창 내 머리 속에 무르익어갈 무렵 느닷없이 아내가 내뱉은 말이다. 폭염으로 인해 남부지방엔 가뭄이 극심하고 밭에서 일하던 노인네들이 열사병에 쓰러져 죽었다는 잇따른 보도를 보면서 아내는 원거리 여름 여행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색한 모습으로 폭염이 무섭다는데 다른 말로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태 전 우리는 딸네 식구들과 함께 흑산도 여름여행을 계획했다가 아이들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내외가 교사인 그들은 방학 중이라도 학교의 연수가 많아 여행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30여 년 전 신학교에 다닐 때 나는 가까운 친구의 아버지가 흑산도 예리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흑산도에 대한 생각을 가졌고 나이가 많은 우리 동기 한명은 흑산도 예리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목사안수를 받기도 했다.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기에 생각은 더 나는지 모른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노래는 또 얼마나 듣기 좋은가? 그녀의 ‘흑산도’ 발음은 특이하여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옛날의 흑설탕을 머금은 것처럼 그 섬이 그리워지기 까지 했다. 작년에도 흑산도 여행을 생각했으나 원거리 운전에다 또 배를 타고 2시간이나 가야하는 부담으로 인해 접고 말았다. 올해도 아이들은 학교연수가 끝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함께 피서여행을 제안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는 여름여행은 국내의 가보지 못한 곳을 찾기로 하고 생각만 하던 흑산도로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폭염은 아내의 마음을 약화시키고 나의 여행계획까지 무산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아내의 마음은 곧 돌아설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흑산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출발은 8월 둘째주일을 지낸 월요일(12일)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은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말복이고 기상청은 이번 더위는 다음 달 중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예보하고 있다. 3박4일정도 집을 떠나 있으려면 준비를 제대로 하고 여행계획도 세밀하게 점검해야한다. 그러나 환영하지 않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는 김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여행이란 기다리며 하나하나 계획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인데 나는 출발을 하루 앞둔 주일 저녁이 되어서야 필요한 것들을 대충 챙겼다. 다행히 아내의 마음은 어느새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고 나름대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하고 있었다.
목포 여객선터미널까지 4시간, 흑산도까지는 쾌속선을 타고 2시간이 걸린다니 긴 여행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워놓은 계획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예리교회 담임목사와 한 차례 통화를 하고 우리가 탈 수 있는 흑산도 행 배시간이 오후1시란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예년의 경험으로 보아 휴가기간에는 길이 막힌다는 것을 예상하고 우리는 한 시간 앞당겨 오전 7시30분에 집을 나섰다.
출발에 앞서 우리는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목적지는 있어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기분 좋게 출발했다. 진영까지는 약간 차가 밀리는 것 같았으나 휴가철이 막바지이기 때문인지 길은 오히려 한산한 편이었다. 목포까지는 4시간 반이 걸렸고 배가 출발하기까지는 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보길도나 사량도 처럼 카페리가 되는 줄 생각했으나 흑산도는 그렇지 않았다. 승용차를 갖고 가려면 화요일에 출발하여 금요일에 돌아와야 했다. 차는 터미널 주차장에 주차를 했고 요금은 하루에 5,000원이었다. 우리는 터미널 앞 제주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쉬다가 배에 올랐다.
나는 바다경치를 볼 양으로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통로를 찾았으나 문이 잠겨 있었고 승객들은 선실에만 머물러야 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주변에 떠 있던 아름다운 섬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높은 파도가 일고 배가 울렁거리면서 약간씩 뱃멀미도 나기 시작했다. 선내 스피커에는 뱃멀미를 하는 사람은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든지, 그래도 안 되면 그 자리에 드러누우면 덜할 것이라고 안내했다. 위생봉투를 가져오라는 소리도 들렸다. 아내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며 멀미를 견뎌낼 수 있었다.
두 시간이 가까워오자 선창으로 나무가 울창한 나지막한 산이 보이고 이윽고 예리 항으로 배가 들어갔다. “남 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부산을 출발하여 7시간이 훨씬 넘게 걸려 흑산도에 도착했다. 우리가 탄 배는 흑산도 승객을 내려놓고 30분 거리인 홍도로 향했다. 홍도는 오래전 교회 당회원들 내외와 함께 다녀간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흑산도만 둘러보기로 했다. 내가 보낸 문자를 보고 예리교회 담임목사가 마중을 나왔다. 5년째 시무하고 있다는 L목사는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먼저 숙소로 안내했다. 교인이 운영하는 그 모텔은 가장 최근에 지어져서 시설이 좋다고 했다. 한여름에도 더운 물이 나오고 에어컨과 냉장고도 비치되어 있어 모텔은 별로 불편함이 없었다.
오후3시에 흑산도에 도착했기에 해가지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오의 더위는 육지와 별다름 없을 정도로 더웠지만 아내와 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여장을 풀자마자 우리는 L목사를 따라 예리교회로 올라갔다. 교회는 1996년에 신축한 본당을 비롯하여 사택과 복지관 부속건물까지 완비하여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도 보여주고 있었다. 교회요람에 따르면 이미 1983년부터 교회전용 자가발전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내가 늘 생각하던 옛날의 예리교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은 마치 고향에 온 것과 같았다. 남에게 평안을 준다는 것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늘 성도들에게 어디를 가든 교회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라고 말했고 그런 경험을 이번에도 하고 있었다.
흑산도는 이름난 것과는 달리 특별한 시설이 없고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이 관광의 전부라고 말했다. 예리교회 교인가운데는 직접 해설을 하며 택시로 일주관광을 시키는 운전기사가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차에 L목사 내외와 함께 타고 관광에 나섰다. L목사는 한 번도 정식으로 섬 일주여행을 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 차를 타고 해설을 듣는다고 말했다. 운전기사는 노래도 부르고 자작시도 낭송하며 재미있게 우리를 안내했다. S자형 열두 굽이를 돌고 돌아 차는 흑산도에서 제일 높은 상라봉(象羅峯)에 이르렀다. 산마루에 세워진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앞에서 기사가 버턴을 누르자 이미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흑산도 아가씨’를 따라 불렀다.
상라산성을 넘어 굽이굽이 해안길을 달리며 석주대문, 촛대바위 등을 구경하며 절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리마을에 이르러서는 다산(茶山)의 둘째형이며 자산어보(玆山魚譜)로 유명한 손암 정약전(丁若銓)의 유배지도 둘러보았다. 조그만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옆으로 손암이 기거했던 초가집이 시멘트지붕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우리가 묵은 모텔 앞에 있는 자산문화관에서는 손암에 대해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자산(玆山 혹은 慈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다. 흑산이란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을 번번이 현산(慈山)이라고 쓰곤 했다.”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 중에서-. 문화관 입구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자산어보’는 우리가 아는 대로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에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으로 수산업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손암선생은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이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을 이 섬에서 살았다.(1901~1816년)
사리마을 정약전의 유배지를 둘러보는 동안 산 그림자는 어둠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기사의 육성 노래를 들으며 해안 길을 돌아 교회로 돌아왔다. 시간은 두시간정도 소요되었던 것 같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교회에서는 저녁만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목포노회 장로회원 40여명이 홍도를 관광하고 돌아와 예리교회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저녁식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오랜만에 자연산 광어회를 마음껏 먹었다. 어느 교회에나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은 일터에 나가 있기에 나이든 권사님들이 많은 수고를 하고 있었다. 곳곳마다 ‘역전의 용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담임목사 내외와 예리항 중심을 가로지르는 듯한 긴 방파재로 산책을 나갔다. 나는 방파재 입구에 동상으로 세워져 있는 ‘흑산도 아가씨’와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했다. 500m가 넘을 듯한 긴 방파재위에는 해수면을 스쳐오는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잊게 했다. 낮의 더위에 시달린 마을 사람들도 여기저기 놓여있는 평상에 누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빨간 십자가가로 구분되는 예리교회는 낮에 보아도, 밤에 보아도 예리항의 중심에 있었다. 나는 더위를 잊고 계획 없는 이번 여행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다. L목사는 나에게 피곤하지 않느냐고 몇 차례 물었으나 시원한 바닷바람은 나의 여독을 말끔히 씻어주고 있었다.
흑산도에 아쉬운 것이 있다면 요즘은 관광지마다 개설되어있는 올레길, 둘레길 같은 걷기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튼 날은 해수욕을 하며 푹 쉬기로 했다. 무리해서도 안 되지만 일주 관광을 하고나니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우리는 농협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5분 거리인 ‘배낭기미 해수욕장’으로 갔다. 면사무소에서 내다 걸은 환영 현수막이 있는 송림에는 쉴 수 있는 평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해수욕객은 십여 명도 되지 않았고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해조류를 줍는 아낙네들 몇 명뿐이었다. 아내와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차례로 바닷물에 몸을 담그었다. 한참 뒤에는 시장기를 느끼고 미리 하나로 마트에서 준비해간 빵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했다. 호젓한 바다를 좋아하는 내게는 배낭기미가 안성맞춤이었다.
셋째 날은 오전 9시 배를 타고 목포로 나왔다. 곧바로 산청의 황매산장으로 향하고 싶었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엊그제 흑산도로 가면서 목포에서 목회하는 동기 K목사에게 나는 인사 겸 전화를 걸었었다. 세 차례 만에 연결된 전화에서 울리는 그의 음성은 왠지 평소 때와는 달리 다정다감하지 못했다. K목사는 해외여행 휴가에서 막 돌아왔다고 대답했을 뿐 돌아가는 길에 교회에 한번 들리라는 인사말조차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여름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 맞기가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자위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가기가 몹시 아쉬웠다. 나는 그가 시무하는 교회라도 보고 싶었다. 교회위치는 내비게이션에서 1.5km로 나타나고 있었다.
교회당은 2층으로 높지는 않지만 넓게 퍼진 형이고 선교관이 따로 있었다. 본당은 잠겨 있었고 사무실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K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갑게 전화를 받는 그에게 나는 교회에 와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남은 휴가기간을 강원도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는 “목사님, 모처럼 오셨는데 모시지도 못하고-” 라고 인사말을 했다. 나는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 참으로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그의 교회라도 보고 가려고 들리지 않았더라면 나 혼자 오해를 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차례나 나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50~60권씩 선교용으로 쓴다면서 자원해서 사주었다. 오해란 만나지 않거나 대화가 없는 데서 생긴다는 생각을 해본다.
교회를 나와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청 황매산장으로 향했다. 나는 먼저 황매교회에 들려 기도하고 담임목사를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말했다. 산장의 S집사는 몇 해 전 아이들과 함께 들렸던 일을 기억하고 토종닭 2마리 백숙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닭요리를 먹었고 다행히 알레르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에는 황매교회에서 수요저녁예배를 드리며 내가 설교를 했다. 몇 안 되는 교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힘찬 ‘아멘’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은혜를 받는 시간이었다.
산장의 밤은 한없이 시원했다. 해발 500~600m의 황매마을의 밤은 더위는 이미 물러가고 없었다. 자정이 넘게 K집사와 바둑을 두다 잠자리에 들 때는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자다가 일어나 창문을 모두 닫았고 홑이불을 여몄다. 나보다 추위를 덜 타는 아내도 일어나 옷을 껴입었다고 말했다. 아침 산책은 더욱 일품이었다. 우리는 한여름에 초가을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배롱나무 꽃이 핀 언덕이며 올벼가 패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카카오 톡에, 페이스 북에 올리기도 했다. 생각 같아서는 여름 한 달 동안은 황매산장에서 지내고 싶었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나는 일찍이 남사교회 L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내가 사랑하는 후배목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L목사 내외는 친구목사 두 가정과 함께 부산 해운대로 나들이를 계획하고 일행과 함께 이미 출발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부산에 와서 만나보기로 하고 일찍이 황매산장을 나섰다. 아내를 통해 숙식비도 계산했다. 이번에도 여러 가지 사랑의 선물을 받았다. 몇 병의 효소음료와 정성들여 가꾼 풋고추, 토마토, 가지, 감자 등이 몇 꾸러미로 무겁게 차에 실렸다. 오는 길에 Y집사의 요청으로 이태 째 개간하고 있는 그의 농장에 들렸을 때 그는 고추, 가지, 호박 등을 두 자루에 넣어 실어주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먹을 사람이 없다’며서 안겨주는 그의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다.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피서여행은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남 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나는 차를 운전하면서 아내와 함께 ‘흑산도 아가씨’ 노래를 몇 차례나 불렀다. 아내는 이 노래를 잘 몰랐기에 내가 가르쳐주는 격이었다. 차가 함안 터널을 지날 무렵 내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운전 중이기에 전화기를 아내에게 넘겼다. 전화내용은 우리가 지불한 산장의 숙식대금을 감자 보따리에 도로 넣었다는 S집사의 말이었다. 올해는 산장에 찾아오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는데 홀가분하던 마음이 어깨까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사랑의 마음을 생각한다. 언제쯤 이러한 사랑의 빚을 다 갚을 것인가? 언제까지나 다 갚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