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52)
五大天地 主人居士
오대천지 주인거사
"나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전별금 스무 냥을 내는 대신에 영전을 축하하는 현판(懸板)을 한 폭 써다 주면 돈 보다도 더 좋아할 것이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주인은 김삿갓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노형이 글씨를 아무리 잘 쓰기로 돈밖에 모르는 사또가 현판 따위나 받고 만족할 것 같지 않소이다.
그건 어림도 없는 말씀이오." 그러나 김삿갓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탐관오리들은 돈도 좋아하지만, 명예 또한 돈 만큼이나 좋아합니다.
자기를 치켜 올려 주는데 누가 싫다 할것입니까? 이 문제는 내게 맡기시고 주인장께서는 현판이 될 만한 적당한 널판지 한 장을 내일 아침 일찍 구해주십시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조반을 얻어먹고 나니 주인장이 구해놓은 널판지를 가리키며
"이만하면 되겠소이까?"
하며 물었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한 현판감입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五大天地 主人居士" 라는 글자를 휘갈겨 썼다.
"이게 무슨 뜻이오?"
"주인장은 모르셔도 됩니다.
내가 주인장을 대신하여 스무 냥 대신
사또에게 이 현판을 직접 헌납할 것이니 그리아십시오."
김삿갓은 십 리가 넘는 읍내까지
현판을 몸소 메고 동헌으로 찾아가 원님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대가 누군데 사또 어른을 뵙자고 하는가?"
이방이 묻자 김삿갓이 대답했다.
"사또 어른께서 이번에 영전을 가신다기에, 시생이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현판 한 폭을 써왔습니다.
바라건데 사또 어른께 직접 상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사또는 이방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기쁜 얼굴로 동헌 마루로 달려나왔다.
김삿갓은 허리를 정중히 숙이며 현판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
"이 현판은 시생이 사또 어른의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직접 써 온 것입니다.
글씨가 치졸하오나, 시생의 성의를 생각하시어 받아주시옵소서."
사또가 글씨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더니 크게 기뻐하였다.
"자네는 왕희지보다 더 명필일쎄!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물론 나를 가르키는 말이렷다?"
"물론입니다. 사또 어른의 지금까지의 치적으로 보아 '오대천지 주인거사'라고 찬양하는 게 합당하다 여겨서 그렇게 써 온것이옵니다.
다른 고을로 가시더라도 동헌 대청 마루에 이 현판을 꼭 걸어놓도록 하옵소서."
"음... 참 좋은 생각이야!
오대천지 주인거사라는 말만 들으면
내가 기상이 웅대한 인물임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게야!"
사또는 자못 만족스러운 듯 흥청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가만.. 五大天地란 무슨 뜻이지...?"
김삿갓이 사또에게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현판을 써온 뜻은 탐관오리를 골려주려는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또는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한 채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말이 마치 자신을 영웅호걸에 견주어 지칭하는 것 같이 여겼다.
김삿갓은 속으로 웃음을 삭이며 사또에게 물었다.
"사또 어른께서는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무엇을 뜻하시는지 아시옵니까?"
사또는 모른다고 대답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그야 모를 것은 없지 않은가?
고금 경서를 두루 통달한 내가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말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나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는 말이렸다."
하고 큰소리조차 쳐보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웃음을 참아가며 물어본다.
"사또께서 오대천지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글씨는 자네가 써와설랑 설명은 나더러 하란 말인가?"
"사또 어른께서 워낙 박학다식하시기에 가르침을 받고자 하옵니다."
"음... 자네가 나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그렇다면 내가 설명을 해줌세."
사또는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얼굴을 들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였다.
“오대천지란 커다란 천지(天地)가 다섯 개 있다는 말이렷다. 대천지란 영원불멸의 천장지구(天長地久)를 뜻하는 것으로 옛날부터 석학들은 천장지구란 말을 즐겨 써 왔다네.
노자의 도덕경에도 나오지만 백낙천의 유명한 장한가에도 천장지구란 글이 등장하고, 송지문의 시에도 또한 천장지구가 나오니 그런 것들이 바로 ‘대천지(大天地)’라는 것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김삿갓은 놀랐다.
사또를 무지막지한 탐관오리로만 알았는데, 대천지를 해석하는 경륜이 고금경서에 능통한 대학자의 면모였다.
‘이렇게도 유식한 사람이 어째서 탐관오리로 타락해 버렸을까?’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김삿갓은 사또가 한층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제가 현판에 써다 드린 ‘五大天地’란 말은 사또께서 지금 말씀하신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써다 드린 것입니다.”하고 눈 딱 감고 말해버렸다.
“이 사람아!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오대천지라 썼단 말인가?”
“이 고을 백성들이 말하는
‘五大天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사또 어른이 뇌물을 잘 받아 자신다고 금천은지(金天銀地)요,
둘째는 사또 어른이 색과 술을 좋아 하신다 하여 화천주지(花天酒地)요,
셋째는 백성들이 느끼는 고을 원의 인심이 암흑천지와 다름없으니 혼천흑지(昏天黑地)요,
넷째는 백성의 원한이 사무친다 해서 원천한지(怨天恨地)요,
다섯째는 탐관오리가 천만다행으로 이 고을을 떠나게 되어 백성들이 그야말로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을 하니
사천사지(謝天謝地)라는 뜻이옵니다.
백성들이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를 ‘오대천지’라 하기에 시생이 그런 뜻으로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현판을 써다 바치게 된 것입니다.”
사또는 삿갓의 설명을 듣자 이를 뿌드득 갈며, 부들부들 치를 떨다가 뜰을 굽어보며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어 능지처참 시켜라!”
이렇듯 사또는 길길이 뛰며, 김삿갓을 끌어내어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침 동헌 뜰에는 사또의 분부를 거행할 군관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또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이방! 어디 갔느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지 못할까?”
그러나 김삿갓은 사또에게 태연히 말을 했다.
“사또 어른, 고정하시지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아시면 아무리 사또라도 큰소리는 못 치실 것이오.”
사또는 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황급히 되묻는다.
“아니~ 그대가 뉘길래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가?”
“사또는 한양에 계신 재동 대감을 잘 아시겠지요? 나는 재동 대감의 생질로서 지금 민정시찰을 다니는 중입니다.”
김삿갓은 이 사또의 뒷배경이 재동 대감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자신을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고 대포를 놓았던 것이다.
그러자 금방 잡아죽일 듯이 길길이 뛰던 사또가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는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김삿갓을 향해 연방 머리를 조아려 보였다.
“예~옛? 선생께서 재동 대감댁 생질님이시라고요? 그러시다면 존귀하신 몸이 어떻게 이런 벽지까지... 미처 볼라뵈어 죄송스런 말씀 다할 길이 없사옵니다.”하고 쩔쩔매며 말했다.
“나는 외숙부의 특별 명령을 받고, 민정시찰을 나온 길이라오. 따라서 나의 신분을 함부로 밝혀서는 안 되도록 되어 있는데, 그러나 사또에 대한 이 고을 백성들의 원성이 하도 크기에 어쩔 수 없이 한마디 충고를 하기 위해 들렀소이다. 그런 줄 아시고 행여 백성들 원성을 듣지 않도록 하시오. 아시겠소? 그럼 나는 이만 가겠소이다.”
김삿갓이 동헌을 나오려 하자 사또는 황급히 김삿갓의 소매를 잡는다.
“귀하신 몸이 모처럼 오셨다가 이처럼 섭섭하게 가셔서야 되겠습니까? 하룻밤 편히 쉬시면서 박주라도 한 잔 하셔야지요.”
“말씀은 고맙소만 나는 누구에게서도 향응을 받을 입장이 아니라오. 외숙께서도 그런 것을 걱정하실 터...”
김삿갓은 이런 말을 내 던지고 동헌 대문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이 사또는 쩔쩔매며 김삿갓이 행여 무슨 말을 할까? 노심초사하며 졸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만 들어가시고, 떠나면서까지 고을 백성의 원성을 듣지 않도록 재차 당부하는 바이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김삿갓은 동헌을 벗어났다. 생각하면 통쾌하기 짝이 없는 연극이었다.
고을 백성들에게 호랑이 같이 군림하고 포악한 악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