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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한강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1998년에 출간되었던 것을 평론가인 백지은의 해설을 붙여 2017년에 다시 펴낸 것이다. 한강의 장편소설에서 잘 드러나는 특징인 서술자의 교차가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집중해야만 한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비로소 등장인물들의 형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그들이 엮어내는 줄거리가 손에 잡히기 시작한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검은 사슴>의 존재도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도시에서 살면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의선과 나(인영), 그리고 나의 대학 후배인 명윤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차츰 기억을 잃어가는 의선과 인영은 한때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면서 안면을 익힌 관계이다. 그러나 어느날 옷을 다 벗고 거리를 질주하면서 갑자기 사라진 의선이 인영의 집에 찾아오면서 그들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게 된다. 함께 생활하던 의선이 인영이 찍어서 모아 두었던 사진과 필름을 태우고, 그로 인해서 의선은 다시 인영에게서 사라진다. 대학 시절 교내 문학상을 받았던 인영의 후배 명윤이 사라진 의선을 만나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이들의 관계는 다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명윤에게서 사라진 의선을 찾아, 인영과 명윤은 그녀가 내뱉었던 희미한 말의 단서를 찾아 탄광이었던 ‘함곡’으로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잡지사 기자였던 인영의 취재 대상이었던 사진작가인 ‘장’이라는 인물을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서, 이들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각자 지난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작품이 전개되면서 어두운 과거가 각자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의선에 대한 명윤의 집착은 과거 집을 나갔던 여동생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연골’에서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의선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그곳을 찾았고, 그녀의 흔적을 좇아 의선과 명윤이 그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벌어지기도 한다.
함곡에서 만난 ‘장’의 과거를 통해 탄광에서의 생활이 드러나기도 하며, 결국 등장 인물들 모두는 의선 혹은 그의 아버지인 ‘임씨’와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흔히 막장이라고 불리는 탄광에서 광부들 사이에 전해지는 ‘검은 사슴’의 전설은 이 작품의 소재이자 복선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면서 햇빛 보기를 원해 광부들에게 뿔과 이빨까지 빼앗기고, 광부들은 두려운 대상인 검은 사슴을 상처를 방치한 채 도망가는 이야기가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아마도 작가는 기억을 잃어가는 의선의 형상에 ‘검은 사슴’의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인 각 장마다의 서술자의 교체는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때로는 나(인영)의 관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때로는 의선이나 명윤 혹은 ‘장’이라는 인물을 통해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온전한 3인칭 시점이 아닌, 시점의 교체는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다소 어두운 삶의 흔적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만나 엮어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고, 특히 ‘어둠’과 ‘빛’의 이미지가 인물들의 삶과 관련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향인 '연골'의 어둠과 어둑한 반지하에서 살던 의선이 4층 혹은 옥탑방에서 살던 인영과 명윤의 세계에 틈입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빛을 동경햇기 때문은 아닐까? 서로 적당한 거리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서로 얽히고 때로는 어긋나는 인간관계의 면모를 이 작품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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