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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의 신관 ***
1. 개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정신적·영적 전통에서 발생했고, 유대교는 고대 이스라엘 신앙에서 발생했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 그 안에 나타난 영적 생명의 힘이 당시 지중해 문화권을 이루고 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토양에서 발전해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이어받고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흡수하면서 고유한 신관을 형성했다.
2. 이스라엘 신앙의 유산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신 체험은 엘, 엘로힘, 엘 샤다이, 야훼, 엘 엘룐 등 다양한 형태의 신의 호칭에서 비롯된다.
다신론적 신 체험이 철저한 유일신론으로 정립된 것은 대체로 모세의 출애굽 사건 때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야훼 신을 체험했는데, 정작 이같은 유일신론적인 이스라엘 신앙은 BC 6세기, 즉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신명기학파와 예언자들의 신앙운동으로 정립되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는 모세의 신 체험과 신의 자기계시가 전해지고 있다.
신의 이름을 묻던 모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또는 "나는 존재 자체이다"로 번역될 수 있는 신의 응답을 듣는다. 이 신의 이름은 미래형태로, "나는 존재할 자이다"로 번역할 수도 있고, 최근의 어원 연구에 따라 "나는 존재하게 할 자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야훼라는 이름은 신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신의 속성을 알려주는 말인데, 그 본질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기능'과 긍휼과 연민의 진통을 통하여 고통 속에 있는 생명들을 '해방시키는 기능'에 있다. 〈구약성서〉가 전하는 이스라엘 신관의 특성은 민족·혈통·국가를 초월하는 초월적 주권성(主權性)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창조의 주 하느님이라는 신앙에 있다.
* 야훼(Yahweh) 이 이름은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바빌론 유수(BC 6세기)가 끝난 뒤, 특히 BC 3세기부터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유대교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얻어 보편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신'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적인 명사 '엘로힘'을 '야훼'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발음했는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은 이 단어를 '키리오스'(주)로 번역했다. 6~10세기경에 히브리어 성서 원본의 재간행 작업을 벌인 마소라 학자들은 'YHWH'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모음들을 히브리어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의 모음 부호들로 대치했다. 이때문에 '여호와'(Jehovah, YeHoWaH)라는 인위적인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야훼' 대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19~20세기 성서학자들은 다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야훼'와 비슷한 음역형태를 사용했고, 이 4글자(YHWH)를 이렇게 발음하는 관행은 그뒤로도 없어지지 않았다. 다른 그리스어 필사본들도 'YHWH'를 '야훼'로 발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느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는 것이 가장 정확한 뜻이라고 믿는다. 〈사무엘 상〉에서 하느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즉 '그는 만군을 존재케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느님의 이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것은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속했던 레위 지파는 '야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 이름은 원래 'Yo, Yah, Yahu라는 짧은 형태로' 신비스럽고 두려운 광채에 압도되어 특별한 뜻없이 신을 부르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엘로힘(Elohim) 요약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단수형은 Eloah. 지존을 뜻하는 '엘로힘'은 모압인들의 신 케모시, 시돈인들의 여신 아스타르테 같은 다른 신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천사·왕·판관(〈구약성서〉의 shofeṭim)·메시아 같은 위엄있는 존재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YHWH', 즉 '야훼'로 계시한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엘로힘'이라는 이름이 '야훼'를 가리킬 경우, 자주 정관사 '하'(ha-)를 붙이거나, 때로는 하느님의 속성을 더욱 자세히 밝히는 '하임'(ḥayyim)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Elohim ḥayyim)이라고 쓴다. '엘로힘'은 비록 그 형태는 복수형이지만 의미는 단수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한 처음에 하느님(엘로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라는 구절에서 '엘로힘'은 문법 구조상 다신을 뜻하는 듯하지만, 그 속뜻은 유일신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인들에게서 복수형 명사 '엘로힘'을 빌려와 예배의식과 신학에서 단수의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
야훼 하느님의 언표불가능성, 불가시성은 신의 배타적 초월성과 주권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는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는 창조의 주이다. 십계명의 제1·2 계명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신의 형상 제작 금지 명령'을 계율로 받는다. 우상숭배 금지명령은 이스라엘 야훼 신의 초월성과 자유에 상응하는 인간의 자유를 지키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신은 그리스적인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같은 영원한 존재가 아닌, 세계의 창조자·유지자·구원자로서 역사와 자연의 지평에서 항상 미래를 열어가는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임마누엘)으로 고백된다.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은 자연의 영속성·순환성·지속성·반복성으로 고백되기보다는, 역사의 지평에서 약속과 희망의 능력으로 새로움을 창조해가는 구원의 주로 고백된다.
3.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관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하느님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신관을 유산으로 물려받으면서도 '부활의 케리그마'와 '성령의 경험'으로 새로워진 삼위일체론적 신관으로 고백되었다.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관을 나타내는 사도 바울로의 표현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로마 15:13, 8:11)이다. 거룩함·공의로움·사랑·전지전능·무소부재(無所不在)·영광과, 영성·절대자유·창조성 등이 신의 속성으로서 고백되기도 했다. 신의 초월적 주권과 아울러 신의 내재성도 인지되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17:27~28)
교리적으로 삼위일체 신관은 니케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확립되었지만,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예배의식문과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에서 삼위일체론적 신관이 고백되고 있다. 성부 하느님은 모든 신성의 원천이며, 존재 그 자체이며, 제약이 없는 근거이다.
성자 하느님 로고스는 신성의 자기계시의 원리이다. 성령 하느님은 신의 자기충만과 내적 교제와 하나됨의 원리이다.
* 삼위일체(Trinity , 三位一體) <신약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나 이에 관한 명확한 교리가 나타나 있지 않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 역시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신명 6:4)라는 〈구약성서〉의 셰마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들 가운데 임했다고 생각되는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그리하여 성령의 도래는 오순절과 연결됨)이 갖는 의미를 밝혀야 했다. 〈신약성서〉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러므로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라는 대임 명령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Ⅱ고린 13:13)라는 사도의 축복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 교리는 수세기에 걸쳐 많은 논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유일신 신앙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성서의 가르침을 그리스·로마 세계의 종교인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즉 말씀 또는 로고스는 최고의 존재에 종속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성부·성자·성령이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서는 구별되지 않지만, 유일신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3가지 양태라는 것이었다. 첫번째 해석은 3위격을 구별하기는 했지만, 이들 사이의 동등성과 통일성을 상실했고(종속론), 2번째 해석은 3위격의 통일성을 포착하기는 했으나 3위격을 구별하지 못했다(양태론). 4세기에 이르러서야 3위격의 구별과 통일성이 '하나의 본질과 3위격'이라는 정통교리로 통합되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비록 성령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을 갖는다"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문구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했다. 그후 반세기에 걸쳐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옹호하고 다듬었으며, 4세기말경에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인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지도 아래 삼위일체 교리가 사실상 완성되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4. 현대신학의 신관
카를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발견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는 계시자와 계시사건과 계시의 현실재(Offenbarsein)를 구별하면서도 분리할 수 없는 통일성·일치성·동시성에서 체험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존재양식'이며, 계시의 해석이라고 보았다. P. 틸리히는 삼위일체론을 그리스도교가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을 서술하는 방식이며, 신의 역동성·계시성, 영의 현존적 활동을 표현하는 신학적 표현으로 본다.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 세 위격 안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하나의 신비요 비의(秘義)인데, 세 위격으로 존재하면서도 항상 통일성·교제·구원·창조행위의 충만 속에 있다. 삼위의 상호 발현관계에 대하여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견해를 달리한다. 서방교회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현한다고 보지만, 동방교회는 성령이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고 본다.
신은 하나의 최고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이며, '존재의 지반'이며, '존재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 증명에 관련된 고전적인 2가지 변증론, 곧 '존재론적 증명'이나 '우주론적 증명'은 어느 것이든 개연성일 뿐이다. 신의 존재는 증명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궁극적 실재'이다.
* 계시(revelation , 啓示) 여러 전통마다 그 구체적인 형태가 매우 다양하기는 하지만, 계시는 모든 종교의 본질적 양상이다. 계시 형태는 일반적으로 대조적인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현세적 실체와 초월적 실체 사이에 고도의 일치를 가정하는 종교 전통에서는 우주 그 자체가 초월자를 밝히는 일차적 매체로 간주된다. 이런 일반적인 계시 유형의 종교에서는 계시된 실체를 보통 비인격적 존재로 인식하며, 이런 맥락에서 계시는 '우주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속(俗)의 영역과 성(聖)의 영역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는 전통에서 계시는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며 계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서 신의 뜻이 전달됨을 나타낸다. 신이 개별적인 실체로 인식되는 이런 계시를 가리켜 일반적으로 '예언자적'이라고 말한다. 우주적 유형의 두드러진 예는 고대 인도 〈베다Vedas〉의 영감적 시가(詩歌)가 있다. 〈베다〉는 자연계를 신적 능력을 지닌 브라만을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상호 연결된 힘의 체계로 묘사하고 있다. 종교사학자 엘리아데가 고대종교의 특징이라고 묘사한 불교의 깨달음[覺], 여러 형태의 '성현'(聖顯) 혹은 성스러운 존재의 현현(顯現) 역시 우주적 계시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예언적 유형의 계시 위에 세워졌다. 여기서 예언자는 세상의 창조주요, 심판자로서 세상과는 구별된 절대 신의 뜻과 행위를 증거한다. 이런 전통을 토대로 하여, 유대교와 그뒤를 이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서문서는 계시된 것으로 간주된다. 신탁, 조로아스터와 마호메트의 교훈도 예언자적 계시의 또다른 예이다. 이런 계시유형은 세계의 여러 종교간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이것을 차이점을 발견하는 방법이 아니라 표준으로 적용할 경우 오해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에서 베다를 우주적 계시의 예로 들었지만 그 경전에는 예언자적 계시의 요소도 들어 있다. 즉 단순히 우주를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변화시키는 행위를 명령하는 내용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 성서에도 우주적 계시의 요소가 들어 있는데, 소위 지혜문학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유사한 형태의 대비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는 용어에 반영되어 있는데, 일반계시는 우주적 계시, 특별계시는 예언자적 계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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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의 이름들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 |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칭호 이상의 중요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은 십계명 가운데 하나로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할 뿐만아니라 그 이름을 높이며 찬송하는 의도로 불려야만 했다. 이런 점은 주기도문의 첫번째 부분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도 나타난다.
1. 이름과 의미
저 히브리어 4글자 상형 문자인데 각각 무슨 모양인 지 찾아라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 1)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 25)
레이몬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신학적 설명에 뛰어남을 보여준다. 고대 중동에서는 어떤 큰 역사적 또는 종교적 사건을 기념하거나, 부모의 희망을 담거나 아니면 어린아이의 성품에 기대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창 4: 1, 25; 5: 29; 10: 25; 삼상 25; 25). 어떤 이름이 어떤 사람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처럼,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도 자신의 신적 성품을 반영하는 호칭과 이름들을 점진적으로 사용하셨다.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1) 엘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 11)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겔 31: 11)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말 2: 10)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 9)
구약에서 217회 사용되었는데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강한 분, 능력이 많으신 분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God(한글, 하나님)으로 번역되어 사용된다.
2) 엘로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 1)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 2)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 7)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 1)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 31: 13)
‘엘’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되며 정관사가 붙는다. “경외 받아야 하실 분”이시다(창 3: 24). 구약에서 2570회 사용되었는데 복수형 명사로,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위엄의 관념을 나타낸다. 강하고 또 위엄 있으신 분, 참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3) 엘로아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신 32: 15-17)
‘엘로아’는 ‘경외하다’라는 알라에서 왔다. 즉 ‘엘로아’는 ‘경외하는 분’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57회 사용되었다(시 18: 32; 50: 22; 욥기에 41회; 잠 30: 5; 사 44: 8; 합 3: 3; 느 9: 7).
4) 엘 엘리온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 14: 18-22)
‘엘’이라는 명사와 ‘엘리온’(높은)이라는 수식어가 합성되었다. ‘위로 올라가다’라는 의미의 ‘알라’ 동사에서 ‘엘리온’이 되었다. 동격 문구인 하늘과 땅의 주재(창 14: 19, 22)와 함께 쓰였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표현되었다(창 14: 19-20).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해야 함을 보여준다. 한편 ‘엘리온’(Elyon)은 숭고한 자, 곧 존귀와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매우 거룩하신 분임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또한 이 명칭 ‘엘 엘리온’은 높임을 받는 존칭이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은 낮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신적인 권세와 능력이 ‘절대적’임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민 24: 16; 신 32: 18; 시 7: 17). 최고의 절대적으로 높으신 하나님은 그 어떤 세력도 범할 수 없으며, 대적할 수 없는 지극히 높임을 받으시는 강한 분이다.
5) 아도나이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 2)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5: 23)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 3)
히브리어 ‘아돈’은 ‘아단’(다스리다)에서 왔으며 다스리는 자, 심판하는 자로 번역된다. 창세기 15장 2절은 야훼와 함께(아도나이 야훼, 나의 주 야훼) 합성되어 나타난다. 시편 110장 1절(“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은 야훼와 대칭되어 사용되어 야훼의 보좌에 않아 있는 제 2의 구별된 분을 가리킨다. 즉 메시아 예수님으로 인용된다. 이 호칭이 자주 복수형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주의 주로서 지극히 높으심을 강조하는 강의적인 복수형으로 해석된다.
6) 엘 샤다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 3)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 11)
복 주시는 하나님, 먹이시는 하나님,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드’는 ‘젖가슴’을 의미한다. 창세기 17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을 복 주시는 ‘엘 샤다이’로 계시한다. 창세기 28장 3절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번성을 기원할 때, 창세기 35장 1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할 때, 48장 3절에서 그로 생육하게 하여 번성하게 하여, 49장 25절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복을 빌 때, ‘엘 샤다이’가 그에게 젖가슴과 태의 복으로 복 주시리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숭고한 분으로서 피조물과 친교 관계에 들어가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면서 이 이름을 족장 시대에게 사용하였다. 이 명칭도 역시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축복과 위안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의 힘을 지배하시어 그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에 공헌케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7) 여호와(야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 3)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출 33: 9)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 14)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 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 26)
이 명칭은 고유한 하나님의 이름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6000번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원래 발음을 지금 알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레위기 24장 16절,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는 말씀을 두려워하여 이 이름을 ‘아도나이’나 ‘엘로힘’으로 대체했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의 주장은 이름이 출애굽기 6장 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는 본문 이전에도 사용되었다고 하면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여호와가 영광이다)에서 근원을 찾는다. 다만 이 이름이 가진 언약적인 성격을 족장들이 실제로 알거나 체험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독자성과 언약적인 주권을 나타낸다고 한다. 외형적으로 보아 이 이름은 ‘하와’(‘하야’의 고어 형태) 또는 ‘하야’(존재하다) 동사에서 온 듯하며 따라서 ‘그가 존재하다’를 의미한다. 즉 ‘스스로 있는 자’(출 3: 14-15)이다. 하나님은 언약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출 33; 19)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결정하시는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불변성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에서는 하나님 본질의 불변성이라기보다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언약 관계의 불변성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명칭은 성부(시편 2: 7; 110: 1), 성자(사 6; 1; 참고, 요 12; 41), 성령(시 95; 7; 히 3: 7-9)에 사용되었다.
8) 만군의 여호와(야훼 체바오트)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삼상 4: 4)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시 84: 1-8)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시 89: 7-8)
야훼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보스(Vos)는 주장하기를, 이 이름은 예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오경, 여호수아, 사사기에 잘 나오지 않고 사무엘서, 열왕기서, 시편, 요엘, 오바다, 요나에 나타나며 에스겔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예언서들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왕국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을 때, 야훼는 이 이름으로 자신을 군주, 곧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참 군주로 계시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만군이라는 대상은 모든 피조물의 집합, 별들, 이스라엘의 군대라기보다는 천군 천사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위하여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며,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영광의 왕이시다. 이 명칭은 ‘만군의 여호와’(Jehovah of hosts)라는 강한 형태로 가끔 표현되었다. 이 만군이란 천사의 많은 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천군 천사에게 호위를 받으며 그의 백성을 위해서 천지를 통치하시며, 그의 모든 피조물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영광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인 것이다.
9) 이름(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 7) “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시 76: 1)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여러 면들이 그의 이름들과 야훼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름이라는 단수형 단어(셈)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충분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레위기 24장 11절은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이름을 훼방하였다”(출 20: 7; 시 76: 1)고 말한다. ‘이름’을 훼방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훼방한 것을 의미하므로 여기서 사용된 ‘이름’은 하나님과 동의어이다.
10) 테오스
그리스어로 θεός는 신을 의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 1)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 28)
70인역 헬라어 성경에는 ‘테오스’가 구약의 ‘엘’, ‘엘로아’, ‘엘로힘’에 대한 번역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테오스’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통용어였다. 이 단어는 ‘나의’, ‘너의’, ‘우리의’, ‘너희의’와 같은 소유격과 함께 사용되는데, 구약의 민족적 개념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녀들의 하나님으로 발견된다. 이 호칭은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요 1: 1, 18; 2: 28; 행 20: 28; 롬 9: 5; 딛 2: 13; 히 1: 8; 벧후 1: 1; 요일 5: 20).
11) 주(Κύριος, 퀴리오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 7)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고전 5: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고전 16: 23)
70인역에서는 ‘퀴리오스’가 ‘야훼’에 대한 번역으로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신약의 저자들이 성부를 가리킬 때는 ‘테오스’로 표기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는 ‘퀴리오스’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두 신을 믿는 신앙을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70인역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으로 사용된 ‘퀴리오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법적인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전능자와 주님, 소유자, 통치자로 묘사하는 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근본적인 관념은 가끔 ‘알파와 오메가’, ‘지금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다.
12) 아버지(파테르)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신 32: 5)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 6)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 4: 22-23)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낸다(신 32: 6; 시 103: 1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출 4: 22; 신 14: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요 그들을 지으시고 세우셨다고 한다(신 32: 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장자라고 성경은 말한다(출 4: 22). 그런 경우 신정 정치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아버지’라는 명칭은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신약에서 ‘창시자’, ‘창조자’(고전 8: 6, 엡 3: 15, 히 12: 9), ‘삼위일체의 제 1격’으로서 제 2위이신 아들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에 사용된다. 하나님이 그의 영적인 자녀들인 모든 믿는 자들과 맺으시는 윤리적 관계를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