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숙 시집
춥게 걸었다
춥게 걸었다
숱한 표정이 묻어 있는
뒷모습을 숨기고 싶어서
소심하게 걸었다
육교만 남고
고무줄과 단추를 파는 노인의 얼굴을
지나칠 때마다
춥게 걸었다
뒷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수많은 육교를 건넜다
사유상 뒷모습에서
흘러내리는 숨을 들이마셨던 날
춥게 걸었던 날이 깨어나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먼 데를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끌고 가는 길고 긴 곡선의 길에
당신이 풀 수 없는 망망한 것들의 목록
먼 데는 멀어지고 있었다
사랑하게 되는 일
동쪽으로 십 킬로쯤 달려와
살게 된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쌓이는 걸 보면서 이삿짐을 풀었다
막막한 걸음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이 있어
세상은 얼어죽지 않았다
넓은 인도에는 띄엄띄엄 벚나무가 있고
가게 앞에는 옷을 입은 강아지가 있다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는
빨간 벽돌집 마당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는 기쁨이 있고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처럼
여름밤 치킨집 앞에는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정겨운 소란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은행나무 아래 둥지 튼
공중전화 박스에 풀풀 눈이 들이치면
괜히 전화 걸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오래된 집에 푸른 물을 들여 꽃집 차린 아가씨가
화분에 물주는 뒷모습과
팝송 틀고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의 뒷모습은
뒷모습의 반경을 생각하게 한다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빛을 내고
창가 불빛이 지붕을 기댄 집들을 위로한다
동쪽으로 걸어가면 나무숲과 기찻길이 볕을 모으는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살짝 기운 지구와 오래 살고 싶어진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변산
노을을 끌어안고 바다의 눈가가 붉어졌다
슬프게 떠난 영혼을 끌어안는 사람들이 붉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한다
사람들은 흐릿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느리게 말하는 사람이 좋아졌다
슬픔을 손수건처럼 접어두고
무슨 생각해, 묻는 사람이 좋아졌다
땅거미를 끌어안아 본 사람은
발끝의 어둠 말아두는 법을 알아서
묵음으로 하나 둘 멀어져갔다
스웨터 읽는 시간
서랍 열면 나프탈렌 냄새
좀약 싼 신문지 쪽지처럼 펼쳐보면
녹여 먹은 사탕처럼 콩알만해져 있고
스웨터 꺼내
코에 대보는 시간은 눈처럼 따뜻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섬유 속으로 들어가
소라게처럼 움직인다는 옷좀 나방
얼마나 작으면 좀스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늘 좀스러운 사람 되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
남에게 통 크게 퍼주다가
주머니 돈이 돌아오지 못했다
떼돈 번다고 실내낚시터 만들어
우리 집은 바다가 되었지
돛단배로 자식들 구조한 엄마 눈물은 짰고
물려 입히는 옷에 좀 슬까봐
좀약 넣어두는 손은 나무껍질처럼 텄었지
행방을 알 수 없는 물고기와 옷좀 나방
그 겨울의 스웨터
옷장 속 물 먹는 하마에 물이 차오르고
이제는 신문지에 좀약을 싸지 않지만
여전히 서랍을 열고
좀먹듯이 서서히 잠식해 갈 것이
스웨터같이 따뜻한 것이었으면 하고
눈꺼풀 덮고 생각해보는 밤에는
밤새 눈이 퍼붓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