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世 부헌당공(負暄堂公) 배익겸(裵益謙)
公의 휘는 익겸(益謙), 字는 도형(道亨) 號는 부훤당(負暄堂)이니 낙암공(洛庵公, 諱 得仁)의 맏아들이다. 선조 26년(1587) 7월 5일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과 달랐고, 문예(文藝)에도 뛰어났다. 자라서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일찍이 인정을 받았다. 詩에 특별히 조예가 있어서 도헌 류잠(陶軒 柳潛), 李先憂, 李石屛, 南秋月 등 諸賢과 더불어 강구연마(講求練磨)하였다. 성재(醒齋), 석남(石南), 허주(虛舟) 등 諸公과 함께 서로 도와 공부하였다.
성품이 염정(恬靜)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草野에 묻혀 詩書를 읽었으나, 지은 시를 보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많았다. 강가에 암자(庵子)를 짓고 부훤당(負暄堂)이라 하고, 또 그 서편에 산수헌(山水軒)을 지었다. 자연을 즐기고 소요(逍遙)하시며 시를 짓고, 또 향리(鄕里)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고 연마하기를 싫어하지 않아서 성취한 바가 많았다. 이를 통해 아취(雅趣)와 진락(眞樂)의 오묘한 경지를 홀로 얻어 즐기면서 평안하고 한가로이 지내셨다.
효종 5년(1654) 12월 1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5세였다. 풍산읍(豐山邑) 미질곡(美質谷)에 있는 관찰공(觀察公)의 墓 앞에 장례(葬禮)하였다. 공은 안으로 어진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받고 밖으로 엄한 사우(師友)들의 도움이 있어서 오직 청백(淸白)만을 숭상하였다. 병자호란 후에는 벼슬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명승고적을 유람하고 시를 지으면서 세상의 공명(功名)을 잊었다.
配는 의성김씨니 약(瀹)의 따님이요, 운암(雲巖, 諱 明一) 선생의 손녀이다. 법도있는 가문에서 생장(生長)하여 매우 부덕(婦德)이 있었다. 묘소는 고위(考位, 부헌당공)와 같은 언덕이다. 四男을 기르시니 성유(聖裕), 성우(聖佑), 성조(聖祚), 성지(聖祉)이다. 공이 남긴 글을 현손(玄孫)인 유한(維翰)이 수집했고, 호와 류현시(壺窩 柳顯時)공이 감교(勘校하였고, 족예손(族裔孫) 연발공(淵發公)이 遺事를 짓고, 서파(西坡, 諱 必永) 선생이 묘갈명을 지었다. 유고(遺稿) 三冊이 있으나 아직 간행하지 못하였다.
● 염정(恬靜) : 편안하고 고요함.
● 호와 류현시(壺窩 柳顯時)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호와(壺窩). 아버지는 유계휘(柳啓輝)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이조영(李朝英)의 딸이다. 향시에서 장원하고 45세 때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는데, 66세에 안동부의 추천으로 안동부내 도훈장(都訓長)이 되었다. 1749년(영조 25)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만년에 『심경(心經)』과 『근사록』을 연구하였다. 이재(李栽)와 태극에 대한 토론을 벌여 그에게 인정받았으며, 김성탁(金聖鐸)으로부터는 소동파(蘇東坡)에게 비견할만한 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저서로는 『호와유고(壺窩遺稿)』 2권이 있다.
● 감교(勘校) : 자세히 조사하거나 대조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침.
● 족예손(族裔孫) : 같은 가문의 후손
● 유사(遺事) : 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
첫댓글 <흥해배씨세적>을 보면 부훤당공께서는 시에 조예가 깊었다고 나옵니다. 부훤당공에 대한 글 중의 절반 정도는 남긴 시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시를 우리 글로 쉽게 표현할 능력이 없어서, 위의 글에는 포함시키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