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 두 장만한 좌판에/약초나 산나물을 죽 늘어놓고 나면,/노인은 종일 산이나 본다/하늘이나 본다//손바닥으로 물건 한번 쓸어보지도 않고/딱한 눈으로 행인을 붙잡지도 않는다/러닝셔츠 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부채질이나 할 뿐.//그렇다고 한마디도 없는 것은 아니다/좌판 귀퉁이에 이렇게 써두었다/“물건을 볼 줄 알거든,/사 가시오.”//나도 물건을 그렇게 팔고 싶은데/잘 되지 않는다./노인을 닮고 싶은데/쉽지 않다.
「새의 얼굴」(2013, 문학동네) 전문
중학교 1학년 때, 꽤 오랜 기간 정형외과에 입원한 적이 있다. 한번은 옆 침대에 고3 여고생이 가벼운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다. 당시 나는 수술을 하려 시골에서 먼 대도시 병원으로 와 입원한 처지였다. 스물네 시간 병원에서 먹고 자며 간호하는 엄마 외에는 사람이 귀한 나와 달리, 집이 바로 근처라는 여학생에게는 할머니를 비롯해서 온 식구가 병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그런데 사람 보는 데 미숙한 내 눈에도 그들 가족은 문제점이 많아 보였다. 아버지란 사람은 윗옷 자락이 허리춤에서 반은 비어져 나온 모양새로 비틀거리며 찾아와 툭하면 엄마한테 말을 걸어 기겁하게 만들었다. 가출한 걸로 보이는 그 집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오빠라는 사람은 ‘건달’이라고 이마빡에 써 붙인 듯싶었다.
세상에 그런 우연도 있을까? 보호자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린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복도 끝 1인실에 입원한 남학생의 보호자, 즉 그 아버지와 우리 방 옆 침대의 여고생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병동을 돌았다. 둘이 용돈을 주고받는 사이였다는 말은, 아들 면회를 온 남자와 복도에서 마주친 여고생 입에서 나온 듯싶었다. 대체 그 여자아이는 무슨 생각에 그런 과거를 함부로 발설한 걸까? 하기야 이 모두는 세상을 좀 알고 나서 파편적으로 들었던 말들을 나중에 꿰어맞추느라 빚어진 오해인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 여고생은 오빠와 귤을 까먹으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전부이니 말이다.
알코올중독인 아들에, 무얼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는 불량스러운 손자, 할머니야 몰랐겠지만 사람 겁나는 줄 모르는 손녀와 행방불명인 며느리…….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은 술집을 돌며 취객들 상대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유일했다. 꽃을 파는 밤거리의 할머니란 얼마나 누추한 역설인지. 80년대만 해도 친구들과 술집에 앉아 있으면 이런 노인들이 드물지 않았다. 꼭 그 할머니 때문은 아니겠지만, 왠지 나는 아릿한 마음으로 그들에게서 꽃을 사곤 했다. 나고 자라서 사느라 정신없다가 어느새 돌아보면 늙고 병든 몸만 남는 게 인생이다. 누대를 이어 써 내려가는 이 진부한 스토리는 반전도 없고 열린 결말도 없다. 그래도 윤제림 시의 저 ‘노인’처럼 살다 가고 싶은 건 그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