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간의 내 마음대로 살기 도중, 첫째 주가 끝날 때 즈음 우리는 해겸 김해익 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경주로 여행을 잠시 떠나왔다. 지난 3월에 만났던 스승과의 연, 오늘날 김해익 선생님은 21일간 가마의 불을 땐 이후 마지막 불이 타오르는 그 자리에 우리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런 초대에 응해 떠나게 된 잠시간의 휴식, 여행에서의 배움 이야기. 나에게는 소설을 쓰기 위해 지내던 시간을 멈추고, 잠시 남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지난 3월, 김해익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고 난 후 나는 가슴에 한 가지 물음을 품게 되었다. 바로 마음가짐에 대한 물음. 김해익 선생님은 3월 달의 만남에서 말씀하시기를, 20대에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해 내는 길을 계속해서 걸을 것인지 고심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길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하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 해오던 선택지. 끝내 김해익 선생님은 이러한 길을 몇십 년간 묵묵히 걸어오셨고, 지금의 김해익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영광을 지우고, 있었던 모든 일들도 지우고, 그때로 되돌아 갔을 때 20대의 김해익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걷기로 선택했을까. 종종 바보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그건 지나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이지 그때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길로 나아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도대체 그 자리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그 길을 걷기로 결정하셨는지, 이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지난 4월 스승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5월 신라 역사 기행에서, 그리고 일상 속 나의 삶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서 각기 다른 대답을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에 따라 내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고찰과 시각이 잡혔지만, 맨 처음 이러한 물음을 품게 해주신 선생님에게는 직접 묻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만남에, 나는 불을 때시던 선생님께 여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내게 들려주신 답변은 내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어떠한 다짐이 있으셨냐는 물음에, 선생님은 그런 다짐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주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던 일을, 도대체 무엇을 믿고 나아갈 수 있겠느냐고.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은 너무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해 내는 일을 이미 해 왔다고 덧붙이셨다. 어찌 보면 결국 김해익 선생님께 있어서는 그 길이 곧 정도였던 셈이었을까. 그랬기에 쉽지 않은 각오를 가지고, 이 일을 몇십 년간 해오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의미는 자신이 계속 이 일을 하며 청자를 만들었던 선배 도공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나감에 따라 의미를 찾고 가치를 느끼게 되었다고 하셨다. 또한 말씀하시기로, 이 일을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무엇이든 직접 해보고 겪어보아야 일의 가치를 알고, 속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기에 고려청자라는 실전된 도예 기술이 지닌 의미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정말 쉽지 않은 길, 새삼 김해익 선생님은 이 일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인이셨다.
내가 위와 같은 감상과 이야기를 빼고, 새삼 일요일 날 저녁에 직접 마주한 선생님의 모습을 설명해 보라 하면. 내가 만난 김해익 선생님은 불을 대하는 분이셨다. 직접 불을 때며 장작을 태우고, 그 과정에서 불이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그 자세한 이해를 지니고 계셨다. 어두컴컴한 밤 공간, 장작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불 앞에 서 계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선명했다. 딱히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마치 바로 그 모습이 김해익 선생님이라는 한 사람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많은 손님이 찾아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 따라 선생님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어야 했지만, 그때 그 선생님의 모습은 한치 흐려질 새 없이 당당하게 나타났다. 참,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은 스승님의 모습이라 할만했었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도공과 만남을 가지고 난 후, 마지막으로 김해익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우리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에는 지난 남산 산행에서 보지 못한 국보,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보기 위해 다시 남산을 올랐다. 그러나 산 좋고, 공기 좋고, 풍경도 좋았지만 기온은 영 좋지 못했다. 30도를 뚫고 올라간 온도는 오랜만에 느끼는 무더위였다. 이것은 안타깝게도 한 점의 불편함 없는 산행에 한 점이 되어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왜 굳이 날씨가 이런 것일까, 하는 심정이 드는 정도. 그러나 함께 오르던 친구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썩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평소에 잘 자각하지 못하던 나의 편협한 면들, 그리고 그 편협함과 신념, 두 개념 사이의 애매한 경계선.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직접 본 칠불암에서는 무언가 선축의 미에서 나오는 감상 같은 걸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계속 떠올린 건, 산을 오르기 전 죽은 부처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이 곧 내 주위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일상으로, 내가 있는 자리로, 온전한 나로 살기를 떠올리며 살고 있기에 내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이 또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너를 선의로 대하겠다.’ 결국 나는 타인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할 것인지, 이것이 나로서 고민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기 때문에 요즘 내가 고민하는 주제가 바로 존중이다. 무엇이 존중일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어떠한 언어로 사랑할 것인지. 어쨌든 결국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우선이니 마음 수련부터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윤보리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내게 길을 제시해 주었다. 윤보리 선생님은 화가이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기술과 그림에 담을 철학중 무엇을 먼저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윤보리 선생님은 병행해야 한다고 답하셨다. 병행. 결국 삶을 통해 모두 배우는 수밖에 없다. 오류를 범하기 쉬운 사람이 오류를 범할 수 있음에 의지처를 삼는다고, 나 또한 결코 정답이 아님을 알고,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무엇이든 되지 않을까. 애초에 내가 마음을 항상 열고 산다면 무엇에도 갇히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품으며, 요즘 내가 대하는 언어인 소설에 다시 집중해 보고자 한다. 여행을 다녀왔으니 이제 일상으로 되돌아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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