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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공직문학상 / 조정희
[금상] 창문에 드러나는 것들 / 조정희
유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속살을 모두 보여준다
빛이 출렁일 때 유리는 자기를 자신있게 나타낸다
유리는 부끄러움이 없다
검정색 투명 스타킹을 신고
살이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의 그녀가 화이트 와인을 즐긴다
공원 귀퉁이의 수은등 불빛이 차갑다
보도블럭에는 깨지고 금이 간 것들이 더러 보인다
수레가 골목길 한가운데서
바퀴 하나를 수렁에 파묻고 길을 막고 있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바퀴만의 일이 아니다
커튼으로 차단되어 노래도 햇빛도 들어가지 못하는 방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지만 닿지 못하는 손잡이가 있다
안이 어지러운 서랍은 혼돈이 새나가는 것이 두려워
밖을 꽁꽁 닫아버릴 때 많았다
새벽안개는 가도 가도 흐릿해서 앞날을 만질 수가 없다
소통은 너무 깊어 손닿지 않는 곳에서도
내일과 악수를 청하는 일
일상을 열어 낯선 세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은
불안을 밀어올리며 언덕을 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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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수채 / 김현욱
여기 모였구나, 우리 네 식구
머리털과 거웃들이
참으로 사이좋게 뒤엉켜 있구나.
눈곱이며 코딱지며 온몸의 각질이
양수(羊水)처럼 끈적끈적 엉겨 붙었구나.
단칸방 한 이불 속에서 깔깔깔
옆구리 간지럽히던 그 모습이구나.
어버이날 처음 받은 손편지에
구불구불 지렁이 글씨 같구나.
코끝 거뭇거뭇해지더니 가슴 부풀어 오르더니
안방에서 작은방까지 이역만리(異域萬里)가 됐구나.
안으로 잠긴 문은 열쇠 구멍이 없구나.
같이 밥 먹는 게 식구라는데
몰랐구나, 저 녹슬지 않는 목구멍으로
다행히 한솥밥을 먹고 있었구나.
거머리처럼 징글징글 한 집에 산다는
은장(銀裝) 가족관계증명서였구나, 저 아득한 물구멍!
거룩한 구멍에서 태어나
세상에 숨구멍 하나 뚫으려고 아득바득 살아도
서로 마음구멍은 맞추고 살라고
그래야 콸콸콸 잘 흘러간다고
기어이 모여 역류(逆流)의 물감을 풀었구나.
수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냐.
여기밖에 또 어디 모일 데가 있었으랴.
붓질하듯 낡은 칫솔로 네 식구를 거둔다.
고여 있던 탁한 말들이 엉긴 마음들이
수채를 지나며 맑아진다.
후련해진다.
[은상] 해양조사연보의 빛깔 / 김관섭
국립수산과학원 도서관 안 쪽
등록문화재 제554호 해양조사연보, 해양조사요보에
햇살이 닿아 시간이 열린다.
백년의 말을 걸어 인사를 한다.
그날들의 기록은 쿨럭쿨럭 바람도 토닥이고
수산과학자들의 해양연구일지가 되살아난다.
젊은 수산과학자들이 시간을 넘어
교신을 한다. 여전한 해양강국의 꿈은
백년, 오십년 전에도 현재에도
무전처럼 온라인처럼.
눈인사를 한다.
너의 시대에도. 나였던 시대에도
대한민국 해양강국 우리는, 꿈의 기록을
젊은 수산과학자들이 바다를 밝힌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책임
기록을 햇살이 어루만지는 5월,
목시조사와 동물플랑크톤과 양식수산물들과
희생된 영혼을 위한 기도가 분주한 지금
국립수산과학원 도서관 안 쪽
등록문화재 해양조사연보와 해양조사요보가
늙은 옷가지로 오늘을 말한다.
햇살에 주름을 펼친다. 다독다독 인사를 전할 때
인사를 받는 우리는, 빛깔은. 푸른 빛 바다에서.
[은상] 배추적/ 이상재
함박눈이 내내 고양이 걸음으로 내렸다
감나무 줄기를 칭칭 감고 오르던 흰눈은
수북하게 쌓였다 허물어지고 있었다
마당에서 장독대까지 묶여있던 발자국들과
가난도 스며들어 시들어갔을 골방 어디쯤
배추 한 포기, 어머니 손끝에서 푸르렀다
고쿠락 속 콩들이 가마솥을 두드려주는 저녁
어둠을 환하게 밀고 나온 밀가루 한 됫박이
눈처럼 부풀려져갔다 아버지 술 장단에 맞춰
가마솥엔 돼지비계가 솔잎사이로 녹아들었다
밀가루풀에 적셔진 배춧잎들은 부풀어 익어갔고
막걸리잔 부딪치는 틀니사이로 아버지, 환하다
칠남매의 입마다 배추적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은상] 보원사지 / 이준복
홍수 때 가슴에 둘러붙었던
검불들도 떼지 못하고
갈대는
곯은 배 허리띠 조여 버텨 세우던
작년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 모습으로
서걱댄다. 밥 칭얼대는 아기를 구슬리던
풀벌레 소리를 다시 낸다.
메마른 등뼈 몸이 바래고 바래어서
백탑이다.
가쁘던 숨 고비가 마디마다 매듭 되어
고이고 밀어 올린 꽃이
보주쯤의 높이에서
아들 딸의 경전을 바람으로 읊는다.
둘레바람 천지 들판일 때
넘어지지 마라! 서라, 서라! 빌어주는
두 손 비빔이 당간지주 공명하는
보원사지 갈밭머리.
갈꽃 씨앗 하나가 노을 미립자 하나 데리고
빈 큰 석조 바닥에 이슬로 앉는다.
[은상] 물 잡은 논 / 이용심
모내기 하려고 곱게 써레질 해놓은 논마다
물이 가득 잡혀 있다
물 잡은 논은 하늘을 한껏 담고 있고
땅에 내려온 그 하늘 안에도 구름이 흐른다
하늘의 하늘은 하나인데
논에 담긴 하늘은 조각보처럼 나눠 있다
달리는 열차에서 본 물 잡은 논은
파노라마다
낮에는 하늘도 품고 저 산의 그림자도 품다가
저녁이면 서녘으로 길게 키가 자란 햇살도 품는다
물 잡은 논은 작은 바다다
바람이 바다마다 가벼운 물결을 만든다.
깊어야 내 종아리 깊이인 그 바다는
고요한 밤에는 깊이를 가늠 못할 만큼 엄숙해진다
물 잡은 논의 밤바다에는 별과 달이 뜬다
이 계절, 물 잡은 논은 하늘과 바다가 공존하는
거대한 화폭이다
화가 없이도 그려지는 수채화다
[은상] 플로라의 반짇고리 / 이기석
봄이 오기를 기다려 꽃을 피운다
몸 생채기야 기다리면 된다지만 마음에 상처가 났으니
땅속 헤쳐 돋아난 것들로만 무더기로 쥐여줘 봐도
무덤덤해 하니
플로라는 반짇고리를 이고 나온다
갖가지 색깔의 실로 채워진
가장 고운 자줏빛 실을 바늘귀에 꿰고
깊은 상처는 긴 바늘로 옅은 상처는 작은 바늘로
골무 끼고 수놓던 정성으로
한 끝 두 끝 상처를 깁고도 모자라
모아 둔 헝겊을 겉에 대서라도 한 올 두 올 깁는다
아픔이 아물어야 새살이 돋는데
돋은 살이 굳어야 사는 것인데
그래야만 끼리끼리 모여서들 산뜻한 웃음기 보인다면야
아픔을 깁는 거라면
삶에 애착을 피울 거라면
잘 풀어진 실뭉치 아끼던 골무 뭐든지 언제라도 준다
기꺼이 내어놓는다
플로라의 반짇고리
봄꽃과 함께
새살도 같이.
*플로라 : 로마 신화에 나오는, 꽃과 과실과 풍요와 봄의 여신
[은상] 꽃다발과 포승줄 / 이순호
꽃다발의 리본을 푼다
접힌 종이 위로 푸른 줄이 꽉 매어져 있다
꽃에게서 햇빛을 억지로 떼어 낸 줄과 종이가
몇 겹으로 둘려있다
이 꽃들의 죄는 무엇일까
포박의 자국이 분명한 곳에 줄기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포승줄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꽃은 알지 못한다
이제 막 봉오리 올리는 어린 꽃대를 붙잡아 매고
넓어지는 바람의 품을 휘감아 길들이던 줄들은
평소에는 늘 하우스 안에서 대기중이었다
줄의 강력함에
하우스를 기웃거리던 찬 바람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었다
가위는 포승줄에 조였던 줄기를 잘라내고
시든 꽃송이를 골라낸다
햇빛도 바람도 어쩔 수 없었던 꽃은
향기를 탐한 죄가 있다
꽃잎들이 안간힘으로 남은 물을 올린다
올리는 물의 속도보다 시드는 속도가 빠르다
어쩌면 꽃은 빨리 마르는 방법으로
시간이 걸어놓은 포박을 벗어나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 물은 어떤 도주가 가능할까
힘겹게 수액을 올리던 물관을 닫고 꽃은 탈주를 시도한다
색은 바람이 되어 가볍게 몸을 빠져나가 보기로 한다
꽃은 슬쩍, 햇빛의 부축을 다시 받고
오래된 뿌리의 기억에 불끈 힘을 준다
[은상] 바람도서관 / 주향호
달과 별도 숨을 멈춘 숲속 깊은 밤
혼자인 줄 알고 산 민들레 한 송이
바람의 가슴 안쪽 책갈피처럼 꽂힌다
이달의 추천 도서가 되어 북 수레에 실린 바람 따라
오늘은 민들레도 떠날 결심을 한다
얼굴을 들어 북 수레 너머 세상을 본다
두 발이 흙 속에 묶여 있을 때처럼
정지된 모든 것이 지나간다, 돌이킬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 뿌리가 있었으므로
떠나고 잊은 것은 민들레였을 가능성이 있다
잠시일지라도 머물다 간 새와 나비 그리고 구름
민들레의 심장을 두드리던 간절한 기척들이
적막만을 남겨두고 떠나던 날마다
해가 지고 꽃이 피고 별이 뜨는 곳에서
바람이 태어난 것이라는 서평을 읽는다
청구기호를 받은 바람이 서가에 가지런히 꽂히고
허공을 가르며 번개가 번쩍 빛나는 순간
불 켜지며 존재를 드러내는 바람도서관
민들레를 읽어 줄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누·구·나
허공에 흩어진 홀씨처럼 바람도서관으로
입장한다; 검색어를 정돈한 하늘이
검색창에 ‘나’라고 치자, 사서 제한이 풀린 ‘너’의 얘기가
비로소 열람 가능해진다
[은상] 잠깐만요 / 이청우
약수터에 가면요 빛바랜 산수유나무. 꽃송이 몇
연두 빛 새 잎 뒤에 아직도 숨어 있고요
어제 온 비로 젖은 돌 틈엔 알 듯 말듯 꽃들이 배시시 웃어요!
물통에 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아래로 눈을 돌리면
이상해요 숲을 이룬 고층아파트단지 흰 모서리가
저녁 어스름에 스며들어요! 문득
밑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에 동공이 더 커지기도 하지요
잠깐이죠. 잠시 그 본모습을 드러내는 황금빛 모서리. 소란스러워요
둥지로 돌아오는 산새. 덤플 속 토끼나 들쥐. 새끼들
밥투정에 하늘도 저물어 가요
물통의 뚜껑을 닫으며 낮과 밤의 경계를 정해요
잎만 흔들리던 갈참나무가 몸 부풀려 하늘로 오르려하고
멋모르고 하산하다 치어죽는 날 숲의 가족들의 장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요. 낮은 오래 꽃피고 일몰은 길게 이어져요
서방정토 아미타불 반가사유 하는 곳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달같이 대한항공 A433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고 있지만요
[은상] 2월의 골목 / 이남호
고모는 골목입니다
덜 마른 빨래 냄새가 서성이는 담벼락으로 바람이 넘을 때마다
동네 개들은 떫은 소리로 짖어댑니다
오래된 이웃들이 떠났지만 낮은 지붕은 더 낮아지지 않았고
전봇대에 붙은 셋방 전단지처럼 술 취한 남편을 기다립니다
그늘보다 먼저 늙은
그녀의 등줄기로 울퉁불퉁 겨울이 지나갑니다
이제는 걸음 뜸해진 길
며칠을 붙여 냄새 빠진 파스처럼
볕이
창문에 머물다 갔습니다
머잖아 봄일 텐데,
병상의 고모는
골목 깊은 곳에서 삭지도 않는 2월입니다
[동상] 지금 당신과 나의 거리 / 송남순
겨울의 끝자락에서 가장 뜨거운 기침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한 뼘 마스크 안에서
한 뼘보다 넓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입을 가리고 새로운 호흡법을 익힌다
입술이 사라진 자리에서
더운 숨은 갈 곳을 잃고
나는 매일 당신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
당신의 안부를 묻는 가장 먼 이웃이 된다
한 손을 뻗어 당신에게 소식을 전할 때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화면은 우리 앞에 놓인 유일한 창이 된다
말들이 빗방울처럼 또렷한 무늬를 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리는
매일 닦아내는 물의 양
한 조각 휴지를 흠뻑 적시는 물기가 마음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쉽게 휴지통으로 버릴 수 없는 온기
맑은 날이 올 것이다
우산처럼 둥근 간격을 언젠가 고이 접어둘 날이
봄이 오고 가로수가 울창한 그늘을 심는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무한한 가지를 뻗는
가로수의 간격으로
푸른 포옹으로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다.
[동상] 소라의 빈소 / 임승환
비가 그친 하늘에 썰물이 무너뜨린 낮달의 어깨가 보입니다 뻘에 발자국을 남기고 소라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그때 소라는 나선형으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소라의 발자국은 어머니의 내비게이션이 됩니다 소라 같은 주먹을 쥐고 사는 어머니는 늘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밀물에 휩쓸려 달려갔던 새끼는 뻘에 쳐둔 그물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그물 밖에서 어미가 낮달 같은 얼굴로 바라보다 쓸려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부는 동네에서 자비로운 사람이었으면, 알맹이가 빠진 낮달이 물결 위에서 일렁입니다 점점 커지는 파도소리는 껍데기만 남은 어미의 귓속으로 걸어 들어간 새끼들의 발자국 소리입니다 희미해진 낮달이 마침내 그물처럼 잡고 있던 바다를 놓치고 밀려오는 구름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바지락처럼 달그락거립니다 모든 게 쓸려갔는데 소라는 아직 뻘에 박혀 있을까요 구름을 흉내낸 포말의 시간입니다
소라를 줍던 갈매기들이 공중에 떠 있는 한낮, 어머니가 낮달을 물에 헹굽니다 쪼그리고 앉아 햇볕에 갇혀 있던 나는 그제야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갑니다 귀퉁이가 깨진 소라 주먹을 잡자 어머니의 얼룩진 어깨에서 쏟아진 물결이 해반닥거립니다
[동상] 어머니의 가을 / 김진희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조용한 대문간
삭은 감나무 어깨 슬쩍 건드려만 보고
뒤안 언덕배기로 곧장 올라서는
어머니에게는 늘 지나가는 바람
- 아랫집 누구네가 죽었단다
아프다 하더니만
글쎄 그래 금방 갔네
저어기 저기가 그 집 밭인디
사람 맴이 참 이상도 하지
밭고랑에 서 있으믄
흰 수건 감은 머리를 이쪽으로 돌려
무어라 아득하게 부를 것만 같어
내 이 밭에 혼자 오기 겁이 난다
고구마 줄기는 치렁치렁 넝쿨지고
마른 대궁들 사이 흰 도라지꽃 드문드문 일어섰는데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와
어머니 머릿수건이 잠깐 들린다
- 이런 바람이 불믄
저 아래 논배미 가진 사람이 부러워 야
그 맴이 오죽 든든할까
저 누런 것들을
다 내 것이다 품고 있으믄
하루 세 끼 밥 안 묵어도 배부르겄다
고요한 산그늘
아랫논에는 맴맴 도는 잠자리
- 그만 내려가자
느그들도 왔으니
일찌감치 저녁이나 해 묵어야제
또 바람이 분다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 낡은 뒤축에서
툴툴 털려나는 흙먼지
머릿수건으로 훔쳐내는 골 패인 얼굴 위로
오늘은 뉘엿한 가을 햇볕 한 조각 얇게 펴진다
[동상] 소래포구에서 / 김대환
포구에 갇힌 바다는 오랫동안 안개를 끓이다 식으면서 강이 되어간다
안개와 비린내가 비벼진 갯 펄이 고깃배를 묶어두고 있는 사이
밧줄을 지팡이 삼아 찾던 것은 강일까 바다였을까
포구에서 시간은 수직으로 흐른다
가라앉은 모든 것들은 이미 경계를 잊은지 오래다
물은 바닥을 보일 때 가장 깊이 흘렀음을
갯펄이 바다의 손을 놓을 때쯤 강의 이름으로 살아갈 뿐임을 안다
포구에서 추억은 젓갈과 함께 삭아간다
유년시절을 닮은 작은 꽃게들이 튀겨져 집게등에 걸린 오후
이제와 파도의 무덤곁에서 팽팽히 울던 바람을 붙잡고
내청춘의 실향민 같은 멸치떼들에게 다시 묻는다
강에서는 어떻게 파도를 숨기며 살아가야하는지를
숯불에 등 지지지다 은빛 날개까지 태워버린
전어의 냄새가 그물처럼 퍼지는 어시장
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염전위에 남은 한줌 소금을
기억속에 차근차근 녹여내는 일이 아닐는지
낯달을 데리고 나온 갈매기들이 자맥질하며 터진 그물을 깁고 있다
협궤열차는 바퀴없이 그곳에서 사는 법을 알 듯이 통통배가 들어오기 전
먼저 바다가 만선이 었음을
강이되어서야 알것같다
새처럼 앉아 지저귀던 나무 이파리들이 소래철교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동상] 엄마의 버스정류장 / 조기봉
무거운 그릇 보따리를
훈장처럼 이고 산 엄마
그 보따리를 자전거에 싣고
나는 뒤뚱뒤뚱 정류장으로 나섰다
보따리를 사람처럼 태우고
짐짝처럼 실려 장터로 떠난 엄마
나는 엄마가 떠난 빈자리에 서서
다시 올 버스를 기다린다
[동상] 갈치와 장미 / 암영희
갈치 트럭이 확성기를 켜고 장미 울타리를 돌고 있다
안 사요 안 사 우리 손녀는 가시에 잘 걸려요
그렇지, 갈치는 가시의 편이고 헤엄치고 어울려 사이가 좋지
갈치는 핑계대기 좋은 가시를 뼛속 깊이 사랑하지
뱉어내고 피해야 했던 뾰족한 것들의 오랜 버릇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스티로폼 박스 안의 갈치는 칼날처럼 떨고 있다
가시는 겁에 질린 무른 무른 살이 녹을까 봐 촘촘히 붙들고 있다
갈치와 장미가 섞이기 좋은 오후 다섯 시
핑계대기 좋은 가시와 체념하기 좋은 가시가 서로 찌르더니 이내
농담하고 위로한다
아마 내가 당신의 풀덤불을 지나갈 때
넘겨다 볼 수 없었던 굵은 가시도
실은 그냥 가시
오래 아프지 않을, 삼키면 삼켜지는 것이었는지도
가시에 걸려 울먹이는 나에게
할머니는 밥숟가락 위에 취나물을 두툼하게 올려주셨지
[동상] 봄을 기다리는 병실 / 김두길
누군가의 울퉁불퉁한 발소리가
병실의 문 틈으로
신문지처럼 얇게 접힌 새벽을 밀어 넣는다
두꺼운 잠을 덮지 못한 환자들은
살아 있는 분량만큼만 눈을 뜬다
벌써부터 상반신을 벗은 만년필이
환자의 몸 속에
문장보다 긴 통증을 받아 적고 있는 아침
아침 식단은
씹을 것도 없이 잘게 토막 낸 차가운 수액이다
병실 안은 해열제 몇 알과
봄과 겨울의 체온이 뒤섞여 미지근하지만
온통 겨울투성이인 환자들의 날씨
면회객들이 돌아간 뒤에도
아직 떠나지 않고 창에 모여 있는
핏기 없는 햇살의 발목들이
아직 춥다
‘쾅’ 해머처럼 어디서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그놈의 봄은
도둑처럼 살며시 스며드는 걸까
최근에는 수족냉증 환자의 몸 밖에 있는 꽃도 가끔 기침을 한다
오랜만에 빵처럼 잘 부풀어 오른 오후였지만
환자의 기분을 찔러버린 주사 바늘
기분이 정상치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한 환자에게 처방했다
파릇파릇한 인턴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봄을
빌려서
[동상] 다 망쳤다 / 강우성
우리 집 마당 앞산에는
진달래, 개나리, 벚꽃, 배꽃 가득하다
참새, 까치, 까마귀, 꿩, 딱따구리 찌르레기 운다
비 오면 한 폭의 그림 같다
언제부턴가 송전탑들이
까만 줄을 늘어뜨린 채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쭈그리고 앉아도
까치발을 들어도
허리를 숙여봐도
시커먼 줄들이
좌-악, 좍 그어져 있다
예쁜 그림 다 망쳤다
[동상] 외줄 타는 사내들 / 허석천
황사처럼 뿌연 아침안개 속
높은 고층건물 외벽에
두 사내가 외줄 하나씩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페인트통 두 개 차고앉아서
큰 괘종시계의 추처럼
슬픈 곡예사의 외줄 인생을
묵묵히 타고 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회색의 콘크리트 외벽에
레몬색깔 행복을 그려가고 있다.
오르려
오르려 하는 오늘만의 세상에서
내일의 희망을 꿈꾸며
외줄 타는 사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