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공직문학상 / 윤계순
[금상] 무수한 건너편들 / 윤계순
고층빌딩의 창문을 닦는
로프공들은 만나는 창문마다
그 안쪽의 자신을 만난다
몇 개의 매듭을 풀고 나니 또 몇 개의
매듭이 묶이는 외줄이 되었다
공중을 닦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마리오네트쯤 될까
햇살의 찡그린 얼룩들을 지워나가면
선명하게 나타나는 무수한 건너편들
별들이 밤하늘의 창문들이라면
저 무중력의 희미한 사람은
늘 자신의 앞을 닦고 또 닦는 사람,
그도 한때 저 안쪽에서 일하고 싶었던 사람
수십 갈래로 번지던 생각들이
팔을 뻗어 햇빛의 너비를 가늠해 볼 때
하늘 사다리처럼 난간을 내어준 순간들
아찔한 일들이야 저 아래쪽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누군가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 주듯
천품을 살펴 내려 준 천직
이쪽을 닦아 저쪽을 선명하게 빛내는 일
아래로, 아래로 닦다 보면 어느새 바닥
문득 무수한 창문의 안쪽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지만
이미 노을이 거울 속으로
안과 밖의 하루를 편입시킨다
----------------
[은상] 당신의 가토 인비저블* / 주향호
나는 민원인을 응대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늘 케이크를 만든 답니다. 부드러운 쉬폰케이크만큼 사람도 얇아서 저마다 구멍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에 쉬폰케이크를 전문적으로 만들었어요.
재난지원금이 생긴 후부터는 가토 인비저블이라는 특별한 케이크에 관심을 가졌어요. 세상에도 구멍이 났기 때문인데요. 재앙이 닥칠 때 우리의 답은 늘 하늘이어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하고 묻게 되고 나는 오존층에서 쏟아지는 자외선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사실은 내 탓이어서 빛에게 부끄럽다고 고백하게 된답니다. 하늘의 답도 역시, 지상에 사는 우리여서 빛은 우리의 구멍을 층층이 엮어서 원래의 방향을 따라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이 본연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지요. 무작정 기다려야 했거나 평등하지 않다고 느꼈거나 가난했던 마음을 과일과 채소 슬라이스로 층층이 쌓아 올릴 때 보이지 않게 반죽하여 굽는 방법은 무척 매력적 이었어요.
까마득히 먼 번호표를 뽑아 들고 다가와 다짜고짜 화를 내는 민원인이나 온종일 말동무가 필요한 민원인에게는 달콤한 재료, 까칠한 동료와 무서운 상사에게는 달지 않은 재료를 고르지요. 케이크를 만들 준비가 끝나면 나는 손에 밀가루를 가득 묻히고 잠시 눈을 감아요. 내 손을 잡고 끝도 없이 달려서 바다에 닿은 타인이 새하얀 케이크를 내밀던 날을 떠올려봐요.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촛불을 끄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니까, 나를 여기까지 데려 왔겠지 이해하면서요. 심술궂은 바다가 달려와 나를 끄고 도망치고 또 끄고 도망치네요. 나는 심지에 맺힌 촛불이 타인의 눈물이라서 내가 후-하고 날려준 후에야 비로소 희망을 맛봤답니다. 빛이 잘
돌아가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허락된 순간이었어요.
케이크는 어쩌면 당신의 구멍 난 날들을 밀가루 속 글루텐 성분으로 엮어 초를 꽂게 하려고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르지요. 살다 보면 당신도 응원을 받아야 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 굽기가 끝난 가토 인비저블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맛있게 드시려면 보이는 곳에 놓아둔 채 미룬 일을 하면서 가토 인비저블을 일단 까맣게 잊어보세요. 곧, 한적한 순간이 와 옳거니 하는 박수 한 번에 한 가지를 깨닫고 아차 하는 박수 한 번에 잘못 하나를 인정하게 될 때 겹겹이 쌓인 높이 그대로 한입에 넣지 말고 포크로 조금씩 떼어 혀끝으로 음미하는 것이 좋겠어요.
제빵사가 되지 그랬냐고요? 과일과 하나가 된 반죽은 다 구워지면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데 나도 보이지 않게 살고 싶을 뿐이어서요.
* 가토 인비저블 : 보이지 않는 케이크라는 뜻.
[은상] 바지랑대의 꿈 / 황성관
사너멀 기와집 앞마당에 바지랑대는 하늘이었다
빨강고추가 멍석에 널리고 기와집 용마루에 거문고 걸리면
중년의 여인은 떨리는 손끝으로 여섯줄 현을 탄다
뒤뜰 대숲 따라 골바람이 불면 파도소리 귓가에 맴돌고
돛단배 무리지어 쪽빛으로 물 드릴 때
마당에 홀로선 아낙은 지그시 눈감고 어깨춤을 춘다
처서處暑를 갓 넘긴 들판에 벼이삭 부비는 소리
참새 떼 쫓는 깡통소리에 짝 이룬 메뚜기는 화들짝 놀라 뛰고
논두렁 서리태는 속적삼 쌈짓돈 되어 개다리소반에 올랐다
기와집 고명딸 사주단자 오가고
앞마당에 먹물먹인 차일遮日 높게 치던 날
초례청醮禮廳 기러기는 소곡주 합환주에 날개 짓을 한다
소복 입은 여인의 버선인양 백설기 같은 눈은 쌓이고
동네우물 가는 길에 차가운 발자국
손바닥은 쩍쩍, 이마에 주름살은 늘어만 가는데
우체통 빛바랜 고지서에 십년 묵은 신경통은 깊어만 간다
기관지 고질병에 검게 멍든 기왓장은 층층이 기침을 뱉어내고
장독대 정한수에 영정사진 드리우면 여든아홉 어머니는 망부석이 되었다
장군봉 넘어온 아침 햇살은 기와집 앞마당에 가득한데
수줍은 바지랑대 오월 목단꽃 붉은 꿈을 꾼다
[은상] 나를 보다 / 한숙희
긴 겨울속으로 숨은 너는
다시 읽는 詩
잃어버린 글자들이
푸르스름한 어둠속에 웅크린 채
시간을 기억한다
묵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둔다
어젯밤은 투명하고
불빛에 묻어버린 적막이
눈물로 차오르고
나는 텅빈 항아리가 된다
널브러져 지친 기억은
움켜진 손아귀에
붉은 자욱으로 남아
그 시간 끝에서
다시 마주할 너의 길위에 서있다
[은상] 사월 / 심진경
떨어진 꽃잎을 세다가
밥을 굶었다
매해 사월에는 바닥을 본다
사월의 마른 바람은 꽃잎을 날리고
찢어진 대기 틈으로 사라진 꽃잎은
다음 사월에 다시 나타난다
줄지도 않고 틀림없이
마른 바람이 잦아들어
비가 내리길 바란다
꽃잎을 모아 묻어주고 싶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없이 사월만 담은 꽃잎에게
자연의 성숙과 노화와 죽음을 알려주고 싶다
사월에는 꽃잎을 세어야 한다
바닥을 보고 밥을 굶어야 한다
아무래도 봄비는 쉬이 내리지 않으려나 보다
그러니 여전히 꽃잎은 나타난다
그러니 반드시 보아야 한다
적어도 사월에는 그렇게라도 하여야 한다
어느덧 노란 나비가 날아오를 때까지
[은상] 우리 동네 정육점 / 박형식
일주일에 세 번
주인이 정한 수 금 토요일은
우리 동네 정육점 소 잡는 날이에요
유난히 많은 눈이 예보된 주말 날씨에도
언제부턴가 지도에서 슬쩍 사라진 외진 골목에도
환한 눈을 넉넉하게 재어놓은 도심에는
선홍빛 육질이 좋은 어린 소가 되새김질한
붉은 달이 어김없이 뜨지요
한쪽으로 빗질을 잘해 넘긴 새벽 공기는
붙임성 좋게도
비릿한 우유가 살얼음처럼 얇게 부서지는 논둑을
새벽마다 살짝 밟고 넘어서요
밤새 꼬깃꼬깃한 어둠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헛간에선
건초가 누가 지켜보지 않는데도
밤마다 훌쩍 참 고맙게도 자라주어요
어느새 검붉게 물든 하늘은 차라리 너무 밝아
함박눈은 정말이지 깜빡 잠들었다 깨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데
채식으로 밝아진 눈엔
더 이상 뜯어 먹을 풀이 보이지 않죠
정육점 주인이 보기 좋게 썰어놓은 한 접시의 달이 뜨면
꼬르륵 들리나요
간도 보지 않고 삼킨 달은 여태 식지 않고
녹말 덩어리처럼 허옇게 굳어
논두렁을 따라 끝없이 흐르고 있어요
잠시 걸음을 멈추면 선명해지고 깊어지는 마블링
밤하늘 구석진 곳마다 조금씩 자라나는 붉은 살점 하나
살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혀요
저 멀리 호주에도 청정한 달이 뜬다는데
이번 달 주문량을 맞추지 못할까 하는 조바심에
연료를 가득 채운 보름달은
막상 구름에 가려서는 항구에서 연일 불법체류 중이에요
불판처럼 붉게 달궈진 정육점 냉장고에 누워
일광욕을 느긋하게 즐기는 소 혓바닥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을 거예요
신기하게도 발음기관이라고 적당히 구부러져 있어요
막상 혀뿌리를 무겁게 놀려
접시에 들러붙은 발음기호를 꺼내려고 하면
접시 한가득 흥건하게 침부터 고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소 혓바닥이 건네는 진솔한 말엔 시큰둥하던 손님은
정작 부위마다 붙은 터무니없는 가격표에는 혀를 내두르다간
잠시 딴청을 피워요
역시나 눈치가 빠른 주인은 식감이 좋은 부위로 시식을 권할 줄 알죠
특보를 낼 정도로 눈을 많이 품어
주둥이가 거뭇한 구름을 뚫고 이제 막 도착한 포화지방산은
예상은 늘 빗나가지 않아
밤하늘 가득 불꽃놀이처럼 폭죽을 터뜨려 주어요
혀를 말아 올리면 그에 질세라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며
입안 가득 부챗살처럼 퍼지는 육즙으로
혀는 누가 지켜보지 않는데도
입속에서만 어물어물
옆구리가 결리도록 혀뿌리만 연신 꼬아대기 바쁘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과분하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잘 대접받은 오늘이
안타깝게도 최후의 만찬일이래요
거세된 수소의 눈은 너무 순박해
단골을 오래 기다렸다 덤으로 따라나서죠
완전하게 익히지 않아도
눈가에 습기를 품은 미디엄 달빛도
조악하게 만져 놓은 구름이 먼저 채가며
날 것으로 꿀꺽
낮부터 어스름 미리 나와 낯을 유난히 가리던 붉은 달도
순식간에 판매 완료
갑작스런 폭설과 교통체증에도
셔터를 내리는 주인의 손놀림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해요
대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이벤트 언니들도 없고
요란한 광고판 없이도
우리 동네 정육점에 다시 올 주말은
입소문만으로도 즐거운 달구경 제대로 하는 날이에요
소 엉덩이에 악착같이 붙어있는 배설물 위로
착 감기는 꼬리뼈가 만들어낸 바람은
오늘따라 더욱 매섭기만 해요
[은상] 색즉시공 / 이정원
1.
날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블루와 레드를,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날에는 그린과 블루를 섞는다
기억이 임계점을 향해 달려갈 때는
블루와 그린과 레드가 한꺼번에 섞여 백색이 되기도 한다
거울 앞에 선 물체의 색은 같은 방향을 유지한다
마이크로폰이 처음 목소리를 이탈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색만이 아니다
음성이 벽에 부딪쳐
난반사되어,
블루로 변하기도,
블랙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떤 마음들은 부딪치다가
블랙아웃되기도 한다
2.
어둠이 오면 색의 경계가 사라지고 너머의 광장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창밖 어둠속에
익숙한 얼굴이 어제처럼 다가온다
지나간 것들은 무슨 색으로 정의될까
나만의 방식으로 색을 입힌다
그리움에는 또 무슨 색을 칠해 놓을까
레드, 그린, 블루, 옐로, 화이트, 블랙...
그대로 놓아둘까
도화지를 찢어 버릴까
점점 줄어드는 나의 여백에,
점점 넓어지는 너의 부재에
3.
검정색 새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간다
찰나에서 찰나로
[은상] 설렁탕집 반딧불이 / 하재분
혼자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멀리서 불빛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는 몇 사람이 보였다
수어를 하며 밥을 먹는 그들의 눈동자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 마디, 마디에서 작은 반딧불이가 태어난다
뚝배기를 비우며 그들은 눈 앞에 떠오르는
반딧불이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간혹, 묵은지 같은 웃음들이 배시시 공중으로 번졌다
침묵에는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속앓이가 있다
죽은 후에야 허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열병에 걸려 목소리를 잃어버리신 큰 아버지
입안에서 나오지 못한 말들이 고인 채,
끝내 방 한가운데서 고목처럼 구부러지셨다
내가 모르는 설움을 가슴에 묻은 채 떠났다
입관을 하러 가기 위해
그의 가슴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반딧불이가 큰 아버지의 가슴 바깥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식당에서 혼자 먹는 저녁은
멀리서 보면 모두가 반딧불이들 같다
깜박이다가 사라지는 상처처럼
반딧불이는 맑은 상처 속에서만 살다 간다
[동상] 달팽이 / 유효정
담벼락 사이 상처가 있는 곳,
뭉글대는 달팽이 무리 신기해 반짝이던 나는
저 멀리 호박넝쿨 위에서 또깡또깡
곡괭이질 하는 어머니 간간이 확인해보곤 하였는데
쓸데없이 흙 속에서 무엇 하는 짓이냐!
얼굴 붉어진 아버지의 엄포가 바람에 실리면 어쩌나
어머니의 마른 등살을 치고 가면 어쩌나
여섯 살의 나는 쪼그려 앉아
달팽이를 보며 시간을 세고 있었다
그만 밝은 곳으로 나와 주면 좋으련만
몇몇은 회오리치는 얇은 껍질 속에서 비밀같이
꽁꽁 박혀있고 몇몇은 흐물텅 흐물텅
어둠을 뭉치고 있었는데,
첫째는 도망치듯 시집을 갔고
달러 빚 삼부이자 얹어서 짜낸 대학 등록금
둘째, 셋째, 넷째가 일수 찍듯 줄을 섰던 그 시절
방 한 칸에 빨래처럼 널려있던 오 남매의 내일은
땀으로 흥건했던 어머니의 속옷처럼 마를 줄을 몰랐다
새벽을 보고 밤의 별을 얹어서 이고 가도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 이런다 달팽이는
강낭콩 꼬투리도 담고 까끌까끌한 콩잎까지 엮어 넣어
자신만 없는 빈집을 사연 많은 소설집처럼 등에 메고
기우뚱 기우뚱 꿈틀거리는데,
종아리 사이에 노을처럼 걸린 시간을 저릿저릿하며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 무리 속으로
던졌다 돌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그러진 가계(家系)를 짊어진 얼굴 하나가
벽을 타고
오른다
[동상] 투명한 길 / 김일하
창문에 난 길을 들여다본다
초록의 풀밭이 투명하게 일렁이는 길 위에서
길잡이 개미가 표시해둔 페로몬 향을 따라
한 행렬이 고요히 흘러간다
개미처럼 걸어다니고
개미처럼 살아내면서
누군가의 무사한 걸음을 위한
길 하나 내어놓지 못하고
나를 위해서만 나를 부려먹었는데
앞서간 개미의 걸음이 창에 매달려
다른 개미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저 긴 행렬이 한 몸이다
얼마나 많은 길이
허방 같은 창을 무사히 다녀갔을까
[동상] 느린 걸음 / 정호석
어차피 멈추어 설 시계바늘을 왜 자꾸 돌리시나요?
제자리걸음 일거라는 소아신경과 교수의 진단 후
아기 엄마의 시간은 맥없이 내려앉았다.
일곱 달을 채 품지 못한 엄마의 마른 눈물이
시계의 투명한 살결 위에 떨어지고
파문에 갇힌 시계바늘은 부르르, 털썩 주저앉는다
엄마의 손길이 닿으면 발가락에 힘을 주는 시계바늘
몇 번의 까치걸음은 하나의 반경으로 귀결되고
얼마 가지 못하고 엄마의 품으로 들어와 박힌다
중력을 거스르고 열두시를 향해 올라가 보지만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여섯시로 회귀하는 시계
결국 오른쪽으로만 돌고 돌아 제자리인걸까
한걸음 가고 비틀, 또 한걸음 가다 멈칫
초침의 힘겨운 걸음을 바라보다
엄마가 알아차린 것은
시계바늘이 걷는 길이
동심원을 그리는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매순간 새로운 직진의 연속이었다는 사실
세상이 규정해 놓은 열두 개의 숫자 대신
엄마의 간절한 눈빛을 이정표 삼아
넘어져도, 멈췄다 천천히 가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두려울 리 없는 시계는
끝없이 전진을 하고 있었나보다
언젠가, 돌돌말린 고무나무 어린잎 같은
앙상한 시계바늘에도 살이 차오르는 날
째깍째깍 아기의 옹알이
마디마디 연결되어 단단한 문장으로 뻗어 오를 테지
잃어버린 시간이라도 찾은 듯
[동상] 無窮花 / 김경미
오랫동안 그 나무에 무엇이 피고 졌는지 알지 못했다.
비바람에 휘청이지도 않았고, 붉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 나무 아래 앉아 촉촉한 눈시울을 훔치고는
막차에서 내린 나를 맞아
된장국에 불 켜러 잰걸음으로 앞서곤 했다.
이내 돌배처럼 작아지는 그녀의 길은,
수없이 국을 데우고, 나물을 무치고, 깨를 뿌리는,
그건 무슨 신념처럼 보였다.
가을비는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이곳은 생각의 끝과 시작
빛바랜 꽃나무 아래, 때 묻은 무지개색 보료
꿈을 꾸다가 울던 곳
무지개색 보료 앞에 어머니가 신념처럼 상을 들인다.
가을비를 맞아 붉은 어머니
젖은 무궁화처럼 앉아 손을 흔든다.
[동상] 버드나무 / 이정행
첫 봄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투명한 몸이 되어 버드나무의 뿌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더니
더 깊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한때 구름 속에 있을 때
바닥의 세계가 훤히 보이는 듯한 착각도 했지만
여기서는 옅은 구름만큼 부질없는 것이었다
사방은 어두운 공허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내리고 마는 것이
길을 걷는 자의 여행법일지도 모른다
공허 속에 어두운 방이 보이기도 하지만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아 머무를 자리 없다
머물 곳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더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얇고 부드럽기만 한 손가락 같은 것이
나를 끌어올린다 강한 힘에 이끌려 올라가는 동안
고개를 들어 나보다 앞서간 것들을 본다
햇빛을 받으면서 끌어올린 손가락이 끝나는 지점에는
허공에 연둣빛 줄기가 그려지고 있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들도 자리가 있었다
저마다 아름답고 싱그러운 자리가 있었다
[동상] 또 다른 나를 위하여 / 김병철
나뭇가지가 철컥 부러지며 통증을 호소했다.
바람은 잠자코 있고 풀잎은 거꾸로 드러눕는다.
앙상한 슬픔, 해를 향해 휘어지고 있다.
붉은 혀가 지평선과 은밀하게 입맞춤하는 사이,
강바닥은 메말라가고 죽은 넋 위로 모래가 쌓여갔다.
그때 거침없이 나는 사막을 걷고 있었다.
바오밥나무는 넌지시 나에게 소곤거린다.
<성령에 이르기 전 눈을 감아선 안 된다>
모래바람에 묻힌 미라도 눈꺼풀이 열려있다.
혼돈의 길을 따라 눈 부릅뜨고 사막을 걷는다.
기나긴 여행의 끝은 집을 바꾸는 일일 뿐이라며
새들은 날아간다. 아!
부끄러운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내 곁에
다가와 쌓이는 청춘의 잔해들,
끈덕진 불면증은 밤새도록 늙지 않는다.
내가 비로소 어둠의 잠을 접고 일어선 날
꿈은 낭자한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꿈이 동강난 허수아비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같이
바람처럼 일어나 외친다.
<허튼 맹세의 어둠에서 깨어나라>
이제 나는 낼 새벽녘 머언 바다로 나가
초록의 물고기를 잡아와야 할 것이다.
뜨거운 사막 위를 걷던 부릅뜬 눈으로 가장 낮은
땅으로 걸어 들어가 아름다운 아라비아 처녀의
그 짙은 눈썹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동상] 아마조네스의 변 / 김래연
그랬다.
세상은 질서정연하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원주에 가까웠다. 서슬 퍼런 칼날을 움켜쥐고 언제건 내리치겠다는 묵직한 의지가 모래바람에 끊임없이 실려 왔다. 모근까지 쭈뼛서는 몇 번의 경험을 하고 나서야 발밑에 드리운 건 평지가 아닌 나락인 걸 깨달 았다.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작태로 위태로이 외발을 서는 일뿐임을 알고야 말았다.
바스락,
오른쪽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파도처럼 몰아치던 날 밤에 여자는 달빛으로 벼린 칼끝을
제 심장에 겨누었다.
활쏘기가 불편해 오른쪽 가슴을 도려냈다는 그리스 신화 속 아마조네스처럼,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바위에 제 발톱을 간다는 매처럼. 살기 위한 희망으로 가득 찬 절망의 쇳조각이 살갗을 누빌 때 한껏 여윈 얼굴의 달이 정갈한 빛깔로 결의의 장면을 목도했다. 달빛을 빚어 만든 시위로 쏘아 올린 활이 원주의 끝에 걸렸다.
푸우,
일그러지는 원주는 질박한 달항아리. 고아한 자태 앞에선 불균형한 몸체도 예술에 가까웠다. 날선 세상은 무뎌졌지만, 여전히 견고한 성이었다. 한쪽 가슴을 도려낸 채 외발로 선 여자는 나락을 등지고 섰다. 뱃고동처럼 온몸을 둥둥 울리는 맥박이 성난 활시위를 당겼다. 한껏 기울어진 세상을 향해 여자가 쏜 건 서러움, 절박함, 그리움, 혹은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한 깊은 우물 속 언어들.
달이 푸른 밤이었다.